트럼프는 굳건하다
지난 18일 발행된 뉴욕 타임스의 기사다. 저널리스트 사브리나 태버니즈는 몇 트럼프 지지자들을 만나 인터뷰해 보도했다. 샤이 트럼프를 포함한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지지를 거두지 않고 있는 데에는 리버럴들의 ‘도덕적 우월감’이 한몫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트럼프 지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은 코너에 몰렸어요. 트럼프에 관해 조금이라도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해요. ‘내 말에 100퍼센트 동의할 수 없어요? 당신은 도덕적으로 파산했어요. 트럼프의 어느 부분이라도 지지한다면 멍청한 거죠.’ 저는 갈 곳이 없어요. 날 트럼프를 지지하도록 몰아넣고 있죠.
길거리에 나선 이들 모두 트럼프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들이 두려워 떨고 있다. ‘차에 흠집을 낼까 두려워 트럼프 지지 스티커도 붙이지 못하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을 거부한다는 말에 데이트 상대를 구하지도 못하고 있다. 트럼프 지지를 밝힌 후에는 ‘역겹다’는 비난을 듣는다.
리버럴의 눈에는 그들은 도덕적으로 파산한, 악일 뿐이다. 그래서 트럼프 지지자들은 비난을 쏟는 이들과 대화를 하기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트럼프를 계속 지지하는 쪽을 택하게 됐다. 그들은 ‘코너에 몰렸기 때문’이다.
선악 구분이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선 도전을 선언한 안희정은 한 강연에서 전·현직 대통령인 박근혜와 이명박의 ‘선한 의지’를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들이 이야기한 대로 그들의 정책을 ‘선의’로 간주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더라도, 그들의 실책과 실패를 지적할 수 있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희정의 주장은 민주진영의 거센 비난에 의해 기각되어야 했다. 그들에게 선의가 대체 어디 있냐는 것이다. 그들의 선의, 또 악의 없음을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민주진영의 지지자들에게 수구 보수진영은 거대한 악이며 이명박과 박근혜는 그 거대한 두 축이다. 이런 그들에게 선의가 있다는 주장은 ‘비판받아 마땅한’ 이야기였다.
보수 진영을 비판할 때 늘 따라다니는 말들을 살펴보자. 정책에 대한 비판보다는, 부정, 부패, 부역, 친일, 파렴치, 구속, 비양심, 병역기피, 비도덕. 민주 시민들에게 그들은 악과 구분하기 어려운 존재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선악 이분은 모든 논쟁을 가로막고, 거대한 벽을 세울 뿐이다. 누구도 넘어올 수 없는 그런 벽.
토론은 성립할 수 없다. 옳은 건 이쪽이고, 그른 건 저쪽이기 때문이다.
좌파라는 천사, 우파라는 악마
좌우를 선악으로 치환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선악은 당위이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몇몇 반트럼프 주의자들에 대해,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를 뽑았던 오코넬 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민주당의 지지자들은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어요. 그들은 제게 이슬람 테러리스트들보다 무서운 존재죠.
민주주의는 건전한 논쟁의 장이 되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 보수와 진보는 선악의 구분일 수 없다. 보수가 부패했다고? 박근혜가 탄핵당한 것은 그가 우파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민주당은 부패에서 자유로운가? 박연차 게이트는 어땠나. 심지어 안희정조차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징역형을 받은 바 있고, 출소 직후에도 박연차로부터 백화점 상품권 5천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는 ‘대선자금을 총대 멨던’ 안희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민주진영에 속해 있던 모두의 문제였다.
상대를 악이라고 규정한 순간, 이 게임에서 상대를 아예 배제해버리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그럼 그들이 투표에 나서지 않을까? 정치적 의견 없이 생업에 종사할 뿐일까?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그들을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오히려 악으로서의 타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닐까.
배제가 낳은 끔찍한 혼종
우리는 그 배제의 결과물을 너무나 잘 안다. 인터넷 하위문화와 혐오 정서, 열등감과 민주진영의 경멸을 먹고 자란 일베라는 존재를 말이다. 그리고 일베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까지. 민주진영의 커뮤니티 이용자들과 달리 우파 성향의 네티즌들은 발을 붙일 곳이 없었다. 오늘의 유머, 아고라, MLB파크, 루리웹, 클리앙, SLR 클럽, 싸커라인. 우파 성향을 가진 네티즌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이명박에 투표했다거나, 박근혜에 투표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비난이 뒤따랐다. 정치토론은 없었다. 선과 악, 상식과 비상식, 옳음과 그름의 싸움에서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논쟁이라도 할라치면 온갖 조롱이 날아들었다. 결국, 그들은 일베에 발을 붙였고, DC인사이드에서 흡수한 문화를 확대해나갔다.
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을 비난했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을 비난한 결과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되려 똘똘 뭉치기만 할 뿐이었다. 필요했던 건, 그런 식의 비난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규칙이 제대로 작동하는 새롭고 건전한 논쟁의 장이었다.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
일베는 2016년 박근혜 정부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분열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커뮤니티가 되었다. 하지만, 민주진영이 보수진영에 대해 경멸하며 ‘선의 논란’에서와 같은 스탠스를 유지한다면 또 다른 일베, 더 나아가서는 한국식 트럼프가 나타나는 일도 먼일만은 아닐 것이다.
우파는 악이 아니다.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상대다. 물론, 보수 진영에 선 이라고 해서 민주-진보-좌파 진영의 지지자를 악마 취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태극기 집회에서 보듯, 오히려 더 심하다고 느껴질 때조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화의 문을 닫아 벽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들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속성이니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시대가 만든 자상이니까. 진보주의자들이 야당의 독재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야당의 정치인이 새로운 유신헌법을 만들어 지배하는 것이 아닌, 민주적 결정에 따른 민주적 정치를 원하고 있으니까.
나를 악마로 대하는 이가 있다면, 그의 말처럼 악마가 되어 대할 게 아니라 악마가 아님을 증명하면 될 일이다. 그뿐이다.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원문: AMUK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