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그 롤랜드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미국인 소년 제르미 버틀러의 어머니 산드라의 결혼 상대인 그는 겉으로는 매우 이상적인-어쩌면 영국신사라는 단어만으로는 형용하기 부족할 정도로-영국신사, 내지는 남편상이다. 무역상사를 운영하는 자산가에 저택과 호수 딸린 숲을 소유하고 있고,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며, 품행도 무척 신사적이고,수상쩍어 보일 정도의 은혜로운 선물공세를 퍼붓는다. 또한 회사에서도 유능하고 믿음직한 존재고, 가정에서는 인자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등 여러모로 이상적인 중년남성으로 보인다.
여성이라면-특히 평균적인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표가 어느 정도인지 인식, 경험한 여성은-이런 남자가 호의를 보이면 절대 싫지는 않을 것이고, 어쩌면 횡재의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의붓아들이 된 소년을 갖은 협박과 속임수로 포로로 만든 뒤 성적, 정신적으로 학대하여 그 여린 몸과 마음을 짓밟고 갈갈이 찢어놓는 짓을 매 주말마다 반복하는 남자 역시 바로 그, 그레그 롤랜드다. 사실 그레그의 존재가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상상도 못할 끔찍한 행위를 범하지만 동시에 일상 생활과 현실에 충분히 존재할 법한,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즉 그레그는 직장동료일 수도, 이웃일 수도, 가족일 수도…심지어 자기 자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처형이든, 돈을 주고 산 창녀든, 의붓아들이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대신 가정의 평화는 지킨다는 그의 폭력의 논리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현실에 팽배하게 실존하는 것이기에 섬뜩하다. 나타샤와 제르미를 침묵의 공포로 몰아넣은 그의 악마적인 간교함의 정체는 그가 힘과 폭력의 구조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강자의 입장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인간인지를 폭로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의 폭력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알게 된 장남 이안 등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파괴한-그 역시 점차 붕괴되지만-그의 행동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단순히 괴물이라고 치부하고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근원적인 혐오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산드라 버틀러(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그레그가 강자이고 힘과 폭력의 논리를 꿰뚫고 있어서 악을 범하는 것이라면 산드라의 죄악은 그녀의 나약함에 있다. 죄를 알면서도 방임하는 것 역시 죄이며, 특히 당신이 성인이고 한 아이의 안녕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라는 입장일 경우 더더욱 그렇다.
아직 제르미가 10살이었을 때, 새 남자친구와 파국을 맞은 충격으로 자살시도를 한 후 어린 제르미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건은 그녀가 성인으로서, 부모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드러낸다. 사실 어린 자녀가 자신을 지켜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부모 자체가 어딘가 잘못된 것으로, 이미 이 시점에서 제르미는 친척 집에 입양되었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모자간의 높은 (상호) 의존도와 산드라의 미성숙함은 그레그가 제르미를 이용하고 협박하는 편리한 구실이기도 했지만, 사실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그 둘 사이의 일을 알면서도 방임하거나 무시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아무리 그레그라도 제르미의 옛날 여자친구의 편지까지 압수할 정도로 치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 범인은 산드라.)
그녀는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던 여자였다. 1권에서 그레그를 처음 만날 때도 좀 티가 났지만, 후에 산드라의 어머니 이야기가 언급되면서 그녀에겐 결혼을 통한 계급 상승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주입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 ‘행복’은 제법 구체적인 사회경제문화적 형태를 지닌 셈이다.
이전에도 연애에 실패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등 유약한 성격이었던 산드라로선 그레그와 제르미의 관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힘겨웠으며, 무엇보다 신혼생활이 상징하는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행복을 원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그 행복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진 것인지 안다면? 만약 그것이 타인의 끔찍한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행복을 붙잡고 싶은가? 그러면 진정으로 행복할까? 행복해지고 싶다는 이유로, 그리고 너무나 나약하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를 범함으로써 그레그의 공범이 된 산드라. 그녀의 존재 역시 그레그와 같이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와 닮은 악의 모습을 상징한다.
마쿠베 로쿠로(뱀파이어)
첫인상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따온 이름(일본어의 표기법은 마쿠베스)답게 끊임없는 야망을 보여주는 장면, 세 명의 마녀에게 점을 보는 장면, 일말의 양심 혹은 심적 나약함으로 인해 자신이 희생시킨 피해자들의 망령에 시달리는 장면 등 맥베스와 유사한 캐릭터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실상은 맥베스보다 한층 더 비인간적이고 포악하고 간교한 천하의 대악당. 인간사회의 규율과 도덕을 무시하고 본능과 욕심대로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의 사고방식은 거의 사이코패스의 그것과 같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이용하며, 자신에 대한 진심 어린 호의나 신뢰라도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배신하고 버린다.
뱀파이어 소년 톳페이는 목숨의 은인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마을의 규율에 따라 자신을 구한 마쿠베의 각종 범죄에 가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비록 그를 위기에 빠뜨린 것 역시 마쿠베였지만 말이다.) 이렇게 순진한 소년을 농락하고,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을 짓밟고, 심지어 뱀파이어들의 혁명마저 이용하며, 그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인간성을 상징하던 죽마고우마저 죽여버리는 마쿠베지만, 이상하게도 비난하고 책망만 하게 되진 않는다.
그것은 그의 얼굴이 데즈카 스타시스템의 미소년의 얼굴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각종 악행이 결코 순탄치 않으며 몸소 변장하여 몸으로 뛰며 온갖 험한 일을 다 겪고 있다는 점, 또한 무엇보다 자신의 악함을 사회나 국가나 부모 등 다른 이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솔직함과 초월성 때문이리라.
비록 만화는 분노한 톳페이 어머니에게 쫓긴 끝에 바다에 몸을 던져 대만까지 헤엄쳐간 뒤(추정), 본래 자기가 이용하려고 했던 페코 일족에게 반격당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결말이 나지만, ‘블랙잭’에서 어둠의 황태자라는 (민망한) 이름으로 불리는 암흑가의 거물로 대성한 것을 볼 때, ‘뱀파이어’에서 요인암살 및 갈아치우기의 패턴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10대 수준의 뻘짓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끈질긴 생명력의 악당인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자신의 창조주인 데즈카 오사무마저 죽일 뻔한, 어쩌면 악당 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놈이 아닐 수 없다!
데바닷타(붓다)
데바닷타는 출생부터 불행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사 반다카로, 그는 1) 왕자 시절의 붓다-싯다르타가 별로 원치도 않던 약혼녀 야쇼다라 공주를 차지하겠다고 설치다가 꼴사납게 낙마하여 사위 시험에마저 떨어진 주제에 2) 싯다르타가 출가한 틈을 타 왕이 되겠다고 설치다가 그래도 결국 야쇼다라에게 차이고 정신이 나간 나머지 3) 아무 여자라도 좋으니 결혼하고 싶다고 통통한 배구공 같은 귀족 여자에게 손댔다가 몇 시간 (혹은 몇십 분) 뒤에 썰렁하게 죽어버린, 그야말로 한심함과 찌질함의 결정체 같은 인생을 살다 간 사내였다.
이렇게 불행한 결합에서 태어나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며 험난하게 자란 데바닷타는 일찍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배운 약육강식의 이치와 처신술, 그리고 (신기하게도 부모를 하나도 안 닮은) 빼어난 외모를 살리며 마가다국 왕자의 교육담당자 신분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 그에게 자비를 설파하는 붓다의 가르침은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지만 우연히 붓다의 기적을 목격하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교단을 지나치게 조직화, 세력화시키려 한 나머지 (그리고 자신의 미인계가 붓다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굴욕감과 분노 때문에) 붓다에게 쫓겨나 앙심을 품고, 붓다의 부재와 자신의 정치력을 이용해 교단을 분리시킨다. 이어 돌아온 붓다를 암살하려고 각종 치졸한 수법을 사용하지만 전혀 먹히지 않고, 마지막에는 손톱에 독을 물들여 할퀴어 죽이겠다는 괴이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만 제풀에 엎어져 손톱이 부러져서 죽고 만다.
그 애비 못지않은 한심한 최후지만 더욱더 딱한 것은 그의 행동과 이상의 부조리함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온 악한 방식과 판이한 진리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따르고자 하지만, 정작 삶의 방식을 딱히 크게 반성하거나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붓다의 제자가 된 후에는 머리를 깎고 엄격한 규율을 세우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마가다 왕에게 독을 먹이고 그 왕자의 증오심을 부채질하며 왕자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불려 나가는 방식이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
외형적인 형태만을 바꾸는 것에 매진하는 데에서 그의 특징과 한계와 왜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되고 싶었던 붓다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해답이 있다. 데바닷타는 붓다의 무엇에 이끌렸을까? 그 초능력, 위엄, 아니면 자비로움 때문인가? 인간이 어느 정도는 선을 추구하려는 본능적인 의지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데바닷타가 붓다에게 느낀 끌림이라고 설명될지도 모른다. 단지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길을 잘못 들이면 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