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은 참 재미있는 과목입니다. 현업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루는 업무면서도 아직 이론화되어 있지 않은 분야라 경영학과나 MBA에서도 과목으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분야입니다. 현장에서 교육 수요가 가장 많은 주제면서도 가르치는 전문 강사가 부족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저는 강사로 경력을 시작할 때 기획 교육으로 시작해 ‘기획전문가 양성과정’ 등의 프로그램을 수년간 진행하면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많은 직장인과 대학생, 기업을 대상으로 기획 교육을 하면서 스스로 시행착오도 겪어보고, 다른 교육을 벤치마킹하면서 기획 교육의 한계와 방향을 느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기획 교육이 가진 문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부분의 교육이 ‘기획’이 아닌 ‘기획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도구(Toolkit) 중심의 기술 교육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 ‘기획’이 중요한가 ‘기획서’가 더 중요한가
‘기획’은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좋은 기획’과 ‘좋은 논리’는 같은 뜻입니다. 대부분의 기획-전략-컨설팅 교육에서 ‘논리적 사고법(Logical Thinking)’이 핵심이 되는 이유도 결국은 이를 통한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우는 것이 기획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기획서’는 ‘좋은 기획’의 결과물일 뿐이지, 좋은 ‘기획서’ 또는 좋은 ‘프레젠테이션’이 기획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획 교육을 표방하면서 슬라이드 디자인이나 스피치 연습에 중점을 두는 교육을 보면 선후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철학적 개념으로서 ‘본질’과 ‘표현’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과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물론 실무에서는 최종 결과물로 판단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획은 좋은데 기획서가 좋지 않으면 대부분 준비가 미흡하다고 판단합니다. 반면 기획서는 잘 만들었지만 기획이 불완전하면 보통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라고 기회를 주곤 합니다. 이러한 문화가 논리적 기획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표현하는 기획서를 더 중요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가끔은 아무리 기획의 논리를 교육해도 결론적으로는 ‘잘 된 기획서 샘플 하나만 보내주세요’ 하고 끝나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기획의 본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과연 ‘기획이 중요한가, 기획서가 더 중요한가’라고 말이지요.
여전히 많은 실무자는 ‘기획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수요자 중심의 기획(결재권자가 좋아할 만한 보고서)의 관점에서는 기획서가 더 중요하지요. 하지만 논리적인 구조가 없이 만들어진 번듯한 기획서를 뼈대 없이 껍데기만 화려한 건축물에 비교하자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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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상 많은 수강생이 보이지 않는 기획서의 논리보다 ‘어떻게 하면 더 괜찮은 기획서를 만들 수 있을까’를 더 필요로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하는 관리자의 역량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자의 양심으로 말씀드리자면 기획의 논리는 펀더멘탈(Fundamental)입니다. 이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2. 결과물보다 도구 중심이 된 교육
두 번째 문제는 기획 교육이 도구 중심의 교육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기획서가 아닌 기획이 더 중요한 것은 맞지만 기술 중심으로만 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기획이 논리적 사고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도구도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논리적 사고법’은 바바라 민토의 ‘민토 피라미드(Minto Pyramid)’에서 비롯된 로직 트리(Logic Tree)를 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브레인스토밍, MECE, 5 Why 등의 핵심 기술을 주로 사용합니다.
그 외에도 기획 교육에서 언급되는 도구는 다음 수백여 가지에 이릅니다.
- 브레인스토밍법, 브레인라이팅, MBS법, NBS법, 퀵 사고법, 아이디어 비트법, 형태분석법, 체크리스트법, 매트리스 씽킹(Matrix Thinking), SAMM법, 비주얼 모티베이션법, 포스 필드(Force Field) 분석, SCIMITAR, 시넥티스, NM법, OCU법, SKS법, 7×7법, PERT법, FTA법, YM법, ZK법, 크로스 임팩트 매트리스법, MSL 시스템, Fishborn 등
실제로 기획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기획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인데 자칫하면 기획의 도구 사용법을 익히는 데 그치고 맙니다. 8시간 워크숍을 통해 로직 트리를 배웠다고 봅시다. 물론 이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좋은 도구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도구를 이용해 실제 기획 프로젝트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인드맵, 브레인스토밍, 피시본 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 교육 문화와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바텀업(Bottom-up) 방식의 토론 문화는 없고 결과 중심의 정답 찾기 식 교육을 해왔기 때문에 기획도 창의적인 과정보다는 주어진 프레임워크의 빈칸 채우기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실제로 대기업 신입사원 대상으로 교육할 때도 정답 찾기는 기가 막히게 잘하지만 이를 현업에 응용하는 건 쉽지 않았던 경험이 종종 있었습니다.
한편 기획은 경영학의 전략경영 과목과 가장 유사합니다. 여담이지만 전략경영 교육도 이러한 것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략 교육은 실제로 전략 목표를 세우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그 과정을 요약하는 전략보고서를 작성하는데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전략 교과서 자체도 내부역량 분석, 외부환경 분석, 경쟁전략 분석, 경쟁우위 분석, 경쟁사 분석, SWOT, PEST, BCG 매트릭스, 5 Forces 분석 등 방법론을 배우는 걸 우선합니다. 이것도 위에서 언급한 교육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합니다. 도구는 도구일 뿐 결국은 그 도구를 활용한 기획자의 인사이트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실제 현장을 목표로 바뀌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기획과 전략을 주제로 강의, 실습, 워크샵, 롤플레잉, 케이스스터디, 액션 러닝(Action Learning), 게이미피케이션 등등 다양한 교육기법을 실험해봤습니다. 그중 주관적으로 가장 효과가 좋았던 방법을 말씀드립니다. 적어도 기획 교육이라면 PBL(Project based learning)로 가야 합니다. 전략도 마찬가지입니다.
PBL은 제가 생각하는 가장 효과적인 교수법 중 하나로 요약하자면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사례로 직접 기획안을 작성하는 방식입니다. 일종의 시뮬레이션과 유사합니다. 교육을 마치고 실무로 돌아갔을 때 교육에서 했던 방식 그대로 적용할 수 있도록 트레이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구나 프레임워크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도구를 토대로 결론적으로는 상대방(의사결정권자)을 설득할 기획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됩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액션 러닝이 효과적입니다. PBL이 제한된 시간에 집중적인 효과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액션 러닝은 교육생이 일종의 코호트(Cohort)가 되어 수주에서 수개월에 걸쳐 현업과 연계해 트레이닝 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이런 방식은 전사적 차원에서 지원이 있어야 가능하고 단기과정이나 공개교육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PBL이나 액션 러닝 모두 참여자 중심의 실제 현장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리고 기획과 전략이 아니더라도 최근 대부분의 교수법 트렌드는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사례연구를 바탕으로 토론하는 케이스스터디와 워크숍 방식도 효과가 좋았습니다. 최악의 방식은 강의식인데 역설적으로 아직도 강의식을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또한 여전히 SWOT 분석의 빈칸 채우기, 보고서의 형식 맞추기 형태의 교육이 많아 개선이 필요합니다.
기획 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기획’은 일종의 접두어나 접미어처럼 거의 모든 단어와 조합이 가능합니다. 건축기획, 디자인기획, 교육기획, 축제기획, 행사기획처럼 말이지요. 다시 말하면 기획은 어떤 분야에서든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좋은 기획=좋은 논리’가 같은 항등식이라면 결국은 ‘논리적으로 생각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기획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교육자는 ‘어떻게 하면 더 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방식을 고민해야 합니다. 경험상 그것을 PBL과 액션 러닝이라고 보았고요. 기획 교육은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논의가 더 활발해져서 더욱 효과적인 교육 방법론이 연구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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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최효석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