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됐습니다. 16일까지 밝혀진 정확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저가항공사 터미널에서 여성 2명이 김정남과 접촉.
- 김정남이 공항에서 고통을 호소해 병원 이송 도중 사망.
- 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 암살과 연루된 것으로 여겨지는 베트남 여권 소지 여성 한 명 체포.
-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된 다른 4명의 남성도 찾고 있음.
- 북한 대사관, 김정남 부검장 방문.
- 2016년 2월 16일 오전 6시, 부검 결과 나오지 않아 정확한 사망 원인 알 수 없음.
위의 사실을 토대로 많은 언론이 갖가지 추측성 기사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김정남의 피살이나 암살 동기에 대한 추측은 자신들의 판단으로 내놓을 수 있지만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틀릴 경우 그마저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김정남이 ‘북한 여성공작원의 독침에 의한 암살’이라고 보도하는 추측성 기사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이나 경찰에서는 대부분 액체류 분사 또는 여성 2명과 접촉했다고만 보도했지 독침을 사용했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은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어떻게 보도하고 있을까요? 그 사례들을 모아봤습니다.
최첨단 암살 기법 소개(TV조선): 불안에 떨어라
TV조선은 ‘北 독침기술 어디까지 왔나…130㎜의 치명적 무기’라는 제목으로 ‘파커 만년필형 독총’ ‘손전등형 독총’ ‘볼펜형 독총’ 등 최첨단 독총을 소개했습니다. ‘브롬화네오스티그민’이란 독극물까지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또한 북한 공작원에 의한 독침 암살 사례를 들면서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덕근 한국 영사가 독극물 공격에 피살됐다’고 말합니다. 최 영사의 몸에서 독극물 성분이 검출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사망 원인은 머리를 8차례나 가격당했기 때문입니다.
‘독침’을 부각하는 것은 북한의 암살 기법, 즉 정교해진 공격 수단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북한이 최첨단 무기로 공격하니 대한민국도 사드를 배치하고 안보를 굳건하게 해야 한다는 논리를 조성하기 위한 요소도 있습니다.
진일보된 암살작전 분명(채널A): 그냥 믿어라
채널A도 독침 관련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채널A는 ‘‘볼펜 돌리면 독침’…‘상상초월’ 北 암살 도구’에서 ‘김정남 피살 사건 이후 북한 간첩이 쓰는 비밀 무기가 주목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김정남의 피살에 관심 있지 어떤 무기로 사망했는지에 궁금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언론이 스스로 국민들이 관심이 있을 거라고 단정 짓거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소재를 자극적으로 보도했을 뿐입니다.
채널A는 ‘김정남 암살과 관련해 범행수법을 놓고 독극물이 든 스프레이와 천 등 엇갈린 정보들이 나오고 있다’라고 하면서도 “하지만 과거 독침에서 진일보된 방법으로 암살 작전에 나선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라며 단정 짓는 말로 보도합니다.
도대체 ‘진일보된 방법’의 근거가 무엇인지 전혀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면 그냥 믿어라’는 종교에서나 사용됨 직한 말을 합니다.
미인계, 독침 여성공작원(연합뉴스): 너흰 80년대 수준이야
연합뉴스는 ‘현장영상’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미인계에 살해까지’…북 영화에 등장한 여성공작원‘이라는 제목으로 북한 영화에 등장했던 여성공작원을 소개합니다.
연합뉴스는 ‘이 영화 속에서 여성공작원은 미인계를 동원하고 특수부대 무술 실력까지 뽐냈다’라고 설명하는데 이 영화는 1986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 제목도 ‘명령 027호’로 국민 대부분은 알지 못했던 영화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함부로 볼 수조차 없는 북한 영화입니다. 그런데도 연합뉴스는 이 영화가 ‘재조명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연합뉴스의 이런 자신감은 국민 수준을 1980년대 3S(스포츠, 섹스, 스크린)를 동원해 통치했던 전두환 시절 수준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듣지도 보지도 못한 80년대 북한 영화를 갖다 놓고 김정남 암살에 동원된 여성과 같다고 우길 수는 없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북풍 저널리즘을 꿈꾸는 사람들
1987년 대선 아침 조선일보 1면에 대한항공 폭파범 마유미(김현희)의 사진이 게재됐습니다. 이미 마유미는 대선 전날 서울 도착했지만 조선일보는 선거 당일에 1면에 배치한 것입니다. 선거 때마다 안보 이슈를 부각하는 ‘북풍 저널리즘’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대한항공 폭파의 본질은 사라지고 마유미-김현희로 이어지는 ‘미모의 여간첩’만 주목받았습니다. 지금 언론이 벌이는 ‘독침’ ‘여성공작원’ 타령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혹자는 ‘북풍 저널리즘’이 이제 먹히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김정은의 공포정치를 강조하며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아울러 사드 문제가 또 주요 선거 이슈로 나올 가능성도 높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 또다시 재연될 것입니다. 성조기를 흔들고 태극기를 들다가 쓰레기통에 내팽개치면서 ‘종북’과 ‘빨갱이’를 외치는 극우세력은 이번 주말에는 ‘김정은 사진’을 불태울 수도 있습니다.
언론이 1980년대 수준으로 국민을 우롱할 수 있는 자신감은 저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문: 아이엠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