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The New York Times에 기재된 「What Beyoncé Won Was Bigger Than a Grammy」를 번역한 글입니다.
흑인들은 뛰어난 상상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술 분야에서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건이나 재산으로 취급받던 시절부터 실은 우리가 인간이며, 가족이라고 상상하며 살았습니다. 좀처럼 경험해본 적 없는 자유와 평등을 상상했죠. 신이 흑인에게만은 사랑을 돌려주지 않는 것 같던 시절에도 우리는 늘 사랑과 관용이 넘치는 신을 상상했습니다.
주말 내내 화제가 된 그래미상 시상식 퍼포먼스에서 비욘세가 보여준 것도 바로 상상력이었습니다. 유럽식 성모 마리아에 오슌과 같은 아프리카 여신의 이미지 등을 덧입혔고, 자신의 임신을 축하했고, 와산 샤이어(Warsan Shire)의 시가 울려 퍼지는 무대에 수많은 흑인 여성을 함께 세웠죠. 공연 막바지에 환호하는 흑인 관객들의 손을 잡으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 비욘세는 마치 검은 모나리자 같았습니다. 그의 표정은 단순히 자기 공연에 만족한 퍼포머의 미소가 아니라, 승리를 거머쥔 자의 미소였습니다.
올해의 앨범상이 아델에게 돌아가자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해서 저는 좀 놀랐습니다. 저는 늘 백인 친구들이 얻는 것의 절반이라도 얻으려면 두 배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했던 어머니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비욘세가 어린 시절 ‘스타 서치’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 담담히 털어놓던 장면도 떠올랐죠.
엄청나게 열심히 노력하고 내 모든 걸 바쳐도 질 수 있다, 그때 그런 교훈을 얻었어요. 이렇게 지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죠. 내가 이렇게나 잘했는데, 이렇게 대단한데, 이렇게 똑똑한데 질 수가 있나, 그런 건 없는 거예요.
급진적이고 저항적인 일을 하는 흑인은 백인우월주의적 자본주의 문화에서 승리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하게 됩니다. 현재 미국의 음악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대부분 백인 남성입니다. 어떤 아티스트, 어떤 장르, 어떤 주제가 인정받고 투자의 대상이 될지, 어떤 것이 지워지고 타자화될지에 관한 결정이 이들의 손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투자와 지원을 받는 작품은 백인 관객의 취향에 부합하는 작품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는 단순히 투자 위험이 높은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인 중심의 구조와 사업 모델에 반기를 드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포지셔닝하게 되는 것이죠.
흑인 아티스트이면서 백인 관객의 구미에 맞는 작품을 내지 않고 나의 경험과 나의 문화에 집중한다면, 이는 곧 저항적인 행동으로 비치게 됩니다. 여성 아티스트인데 남성 관객에게 어필하는 작품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저항적인 행동이 되죠.
비욘세의 ‘레모네이드’처럼 급진적인 흑인 여성 사상과 미학을 내세운다면, 내가 반기를 든 바로 그 시스템이 나에게 상을 줄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레모네이드’는 한 흑인 여성이 다른 흑인 여성들에게 건네는 이야기였고, 백인들의 불편함을 덜어줄 설명을 덧붙이는 수고 따위는 하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백인성(whiteness)’은 흑인의 저항에 절대 박수를 쳐주지 않습니다. 조라 닐 허스턴(※ 소설가, 흑인 여성 문학의 선구적인 위치에 있다)이라는 이름이 앨리스 워커의 작품에 의한 소환 이전까지 묻혀있었던 사회니까요. 미국 문화는 오랫동안 백인 소비자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은 채 흑인 내러티브를 다룬 흑인의 작품을 응징해왔습니다. 비욘세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기 전까지 줄리 대시(※ 흑인 여성 영화감독)라는 이름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사회가 비욘세를 칭찬할리 만무한 것입니다.
더 안전하고, 더 백인적이고, 더 비정치적인 대안이 있는 한, 급진적인 흑인이 상을 탈 리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비욘세는 단순히 그래미상 경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음악 업계의 백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급진적인 흑인 여성주의적 상상력을 펼쳤다가 벌을 받은 것이죠. 그래미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백인들이 따라부를 수 없는 앨범으로 상을 받을 가능성은 없었던 겁니다.
그래미상 시상식이 끝난 후 DJ 칼리드는 비욘세와 제이지 피처링으로 ‘샤이닝’이라는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비욘세가 부른 부분을 들으며 저는 그녀의 최우수 어번 컨템퍼러리 앨범상 수상 소감을 떠올렸습니다. 자신이 올해의 앨범상을 거머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믿었다면 시상식 마지막 순간까지 아껴두었을 법한 수상 소감이었죠. 이는 ‘레모네이드’에 대한 궁극적인 해설이자, 자신의 예술적 의도,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의 상태에 대한 사회정치적 코멘터리와도 같은 연설이었습니다.
이 영상과 앨범의 의도는 우리의 고통과 투쟁, 어두움,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 목소리를 실어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슈를 직면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제 아이들에게 그들의 아름다움을 담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제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이들이 거울을 보면서, 가족을 통해, 뉴스에서, 슈퍼볼에서, 올림픽에서, 백악관에서, 또 그래미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비욘세는 이런 말을 하면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곳인지는 아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미 상상 속에서 흑인 여성인 자신이 그래미 최고의 영예를 안게 되는 상황을 그려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거둘 수 있는 승리는 모두가 자신을 주시하는 상황에서도 백인 관객의 구미에 맞는 아티스트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그 자체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알면서 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을 자신의 목표, 아이들,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 결정을 통해 비욘세는 수많은 흑인 시청자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고, 너무나 오랫동안 백인의 취향과 백인 사장님들에 의해 지배되어 온 업계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는 선반 위에 올려놓고 감상하는 트로피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나의 예술이 세상을 바꾸었다는 것을 아는 예술가만이 평생동안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승리인 것입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