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의 막바지 추위를 견디며, 지난여름 그렇게 겨울이 오길 애태우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 간사하다. 문득 한파 속에서 여름을 생각하며 몇 가지 단상을 떠올리다 어느덧 살아보지도 못한 50년 전의 세상으로 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여름은 누군가에게 ‘사랑의 여름’이었다.
Summer of Love
서구사회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등장 이후 1960년대부터 락 음악이 대중음악계의 기수가 되었다. 비틀즈가 1964년 미국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며 흔히 말하는 ‘브리티시 인베이젼(British Invasion, 영국의 침공)’이 시작됐고 이후 롤링스톤즈와 더 후가 함께 침공에 가세했다. 당시 미국에는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3J(모두 이름이 J로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 27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이한 공통점도 함께 가진다)로서 미국의 락 음악을 지키고 있었다. 바야흐로 락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7년은 서구 대중문화계에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이 된다.
이 해에 비틀즈는 음악사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일명 ‘페퍼 상사’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세상에 내놓는다. 더불어 지미 헨드릭스도 대표작 ‘Are You Experienced?’를 만들어냈고 도어즈는 한 해에만 두 장의 앨범을 선보였다. 이외에도 앤디 워홀이 앨범 커버로 바나나 그림을 그려 유명해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과 롤링스톤스까지 1960년대 락 음악을 대표하는 마스터피스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같은 해에 쏟아져 나왔다. 1967년은 후에 락 음악의 찬란한 전성기 마지막 기수 역할을 한 1990년대의 대표 뮤지션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과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런 홍수 속에서 1967년 여름은 ‘사랑의 여름’이란 이름으로 찬란한 광휘를 만들어냈다. 사랑의 여름은 사회적 현상으로서 당시 젊은이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히피 문화와 락 음악, 마약과 표현의 자유 등 기존의 사회질서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의 절정이었다.
이는 2년 뒤 락 페스티벌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도 영향을 끼친다. 사랑의 여름은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헤이트-에쉬베리 교차로 부근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젊은이가 움직인 전무후무한 사건이었고 미국은 물론 캐나다와 유럽의 히피들까지 모이는 기현상이었다. 그들은 모여 함께 반전과 공동체, 친환경을 락 음악과 함께 외쳤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단 하나의 희망만으로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은 사랑으로 가득 찼다.
물론 단 한 번의 혁명적 운동으로 역사는 그리 쉽게 바뀌는 성격을 지니고 있진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서구사회의 1960년대는 무언가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 시기였다는 것이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미국에서 샌프란시스코에 히피들이 모였다면 유럽의 1967년은 어땠을까. 미국과 마찬가지로 냉전 시대와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해 불편한 시각을 지니던 젊은이들이 모여 운동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결국 그 응집은 1년이 지나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용광로가 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68혁명(Mai 68)’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사랑과 평화를 외치며 조금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운동을 펼쳤다면 프랑스의 청년들은 언론사를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해 대학생 시위, 노동자 파업 등 다소 과격한 형태의 반체제 운동을 펼쳤다. 68혁명은 사상적으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헤겔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을 이야기하며 사회는 어쨌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세계 양차 대전을 겪은 유럽인들은 다시 세상이 나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또다시 일어나는 베트남 전쟁과 냉소 간의 긴장감으로 인해 사회의 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한다. 이는 교육·문화·종교 등 기존 사회의 보수적 가치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사회의 진보를 향한 강력한 열망을 표출했다. 결국 이 혁명으로 인해 샤를 드골 정권은 무너지고 사회가 조금은 진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68혁명에 대해 프랑스 내에서도 의견은 갈린다. 무조건적인 체제에 대한 반대만 있었던 혁명이라는 비판과 동시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이뤄낸 혁명이라는 관점이 아직도 부딪히고 있다. 평가는 갈리고 있으나 당시 프랑스의 움직임은 유럽 전역과 미국에 퍼졌고 심지어 일본의 학생운동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에도 영향을 끼친다. 방식의 차이는 조금씩 있어도 어쨌든 전 세계는 혁명의 시기였다는 게 분명하다. 68혁명과는 관계가 없지만 또 하나의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가 세상을 떠난 해도 67년이기도 하다.
서슬 퍼런 시대의 개막
서구사회와 이웃의 일본이 혁명적 운동을 통해 사회의 체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을 때 한국은 아직 보릿고개를 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5년이 채 되지 않았고 폐허가 된 나라가 정상 궤도에 오르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었기에 한국은 반공 분위기가 점점 강해지며 서구사회처럼 체제에 대한 반대가 아닌 체제에 대한 순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당장은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기에 체제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1967년 한국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윤보선이 재대결을 한 제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한일기본조약과 월남파병에 대한 반대적 입장도 있었던 터라 박정희의 정권 유지에 의문이 들었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박정희의 승리였다. 재임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2년 뒤 69년에 3선 개헌을 통해 임기가 끝난 1971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40대 기수론을 외치던 상대 후보 김대중을 가까스로 꺾고 3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결국 72년 10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한다. 국회 해산, 정당 활동 금지, 비상계엄령 선포, 언론과 출판, 방송의 사전 검열 등을 내용으로 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을 가능토록 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우리는 이를 ‘10월 유신’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거의 모든 것이 통제된 서슬 퍼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엄숙함의 시대는 79년 10월 26일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1967년에는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사건)’도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지휘한 간첩단 사건으로서 독일로 넘어간 194명의 교민과 유학생이 동독을 통해 평양을 다니며 간첩교육을 받았다는 주장의 사건이었다. 작곡가 윤이상과 시인 천상병, 화가 이응로가 이에 포함됐다. 간첩으로 지명된 이들은 모두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어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 최종판결로 유죄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당시 정부의 불법 연행과 가혹 행위에 대해 사과할 것을 청구하기도 했다.
50년이 지난 후
50년이 지난 지금, 락은 대중음악계 왕좌를 힙합에게 내어줬고 히피들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총기가 넘치던 20-30대의 젊던 68혁명 세대들은 이제 장년을 넘어 노년이 되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만큼의 열정과 현시대를 이해하는 지식은 줄었을지라도 이제 그들에겐 세상을 더 깊게 바라보는 지혜가 생겼을 것이다. 무려 반세기가 지났다. 강산이 다섯 번 바뀌는 시간이 지나며 부분적으로 이 사회는 정말 많은 게 바뀌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은 크게 50년 전과 달라지지 못했다는 인상이 자꾸만 든다. 자유가 억압됐던 시대의 지도자가 아직 살아있는 것만 같고 예술인들은 어딘가의 리스트에 불순한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던가. 우리는 다시 과거의 모습을 보며 질문을 던진다. 이대로 가도 괜찮겠냐고.
그래도 희망적인 건 분명 50년 내내 우리가 정체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며 사회를 발전시켰으나 다시 과거로 조금 돌아간 것뿐이다.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해보자. 올여름은 다른 의미로 사랑의 여름이 올지도 모른다.
원문: 고덴의 영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