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배우는 건 하나도 없지만 졸업증 때문에 다니는 것뿐”
…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간혹 만난다. 뭔가 더 많이 배울 것 같은 인(IN) 서울 명문대 출신들도 그런 말을 많이 한다. 학벌 위주의 사회를 반대하며 적극적으로 대학을 거부하는 운동도 있다. 대체로 서울이나 인근 대도시 출신이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가 이방인이란 걸 실감한다. 나는 현대 시민으로서 필요한 모든 교양을 오로지 대학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야만스러운 내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시골 출신이다. 지방 대도시가 고향이면서 겸손하게 ‘시골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레알 시골 출신이다. 고향은 강원도 삼척 사직동. 사람들이 ‘댓골’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이곳이 얼마나 시골이었는지 대충 말해보겠다. 요즘은 꽤 도시화 되었다.
애증의 시골 라이프
주민 구성
주변 어른들은 대부분 농부나 어부. 그것도 아니면 동양시멘트 공장에 다녔다. 삼척은 석회석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수돗물은 석회가 많이 포함된 센물이라 비누가 잘 안 풀렸다. 다니던 국민학교에서는 반 친구들 절반 이상이 명절 때마다 초코파이가 포함된 오리온 과자 선물세트를 받았다고 자랑하곤 했다.
동네 모습
통학하던 길에 외양간이 있었는데, 지나칠 때마다 근처 풀을 뜯어서 소들에게 먹였다. 소들은 제 입에 풀이 가까이오면 일단 입을 벌리고 받아 먹었다. 그 집 할아버지가 밭을 갈려고 소를 끌고 나갈 때마다 점박이 발발이가 따라갔다. 동네에 개장수가 오는 날이면 동네 개들이 대거 사라졌다. 우리 집에서 기르던 하얀 쌔니도 없어졌다. 쌔니가 없어졌을 때까지만 해도 겨우 참았는데, 그 점박이 발발이를 5,000원에 판 할머니가 우는 걸 보고 나도 따라 하루종일 울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궁촌’이란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 자주 놀러갔다. 거긴 시냇물이 풍부했다. 나는 여름마다 냇물에서 물고기 잡고 가재 잡다가 어느 순간 물에 떠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고, 드디어 헤엄을 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해양소년단원으로서 고무 보트의 노라도 젓기 위해 우리 시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오십천 강변에 나가면 타죽은 개 시체를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런 걸 봤을 때의 충격은 여기서 다시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해상도 높게 저장되어 있으므로 각설한다. 그저 아동 인권, 학생 인권, 동물권 등등에 무심하고 심지어 유난스럽다며 적대적인 분위기란 걸 말하고 싶었다.
주거환경
이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현대식 주택으로 개조해놓던 때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던 우리집은 그때까지도 가스레인지가 없었다. 대신 가마솥이 설치된 부뚜막이 있었고, 온돌집이었다. 밥 공기를 이불에 묻어놓았던 아랫목의 장판은 갈색으로 눌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장작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무를 해오곤 하셨다. 그러니 당시 내가 매일 먹은 밥이 장작을 때서 지은 무쇠가마솥 밥이라는 얘긴데, 특별히 추억 돋을 정도로 맛있진 않았다.
씻는 곳은 집 밖에 따로 있다. 석면 슬레이트와 나무 판자 등으로 둘러 친 간이 부스(?) 같은 곳이었다. 보일러라는 게 없으니 온수는 나오지 않는다. 겨울이면 아침마다 어머니가 가마솥에 끓인 뜨거운 물 한 주전자를 주셨다. 난 그걸 들고 가서 대야에 받은 찬 수돗물과 섞어 씻었다. 목욕은 김치 다라이(…)에 받아서 한다. 싫어 죽겠다는데 강제로 마당에 놓인 다라이에서 목욕하던 날, 동네 남자 아이들이 대문 간에 몰려 들어 낄낄대며 구경하던 기억이 사진처럼 남아있다.
이런 집이니 화장실은 푸세식. 나름 시멘트로 시공한 그런 임시 변소 같은 곳이 아니라 정말 나무 판자로 지은 조선시대 풍 변소였다. 이 변소에선 누구나 가공되지 않은 나무 판자 두 쪽에 몸을 의지해야 한다. 한밤중에는 손전등을 켜고 화장실까지 간 후, 그 안에 설치된 백열 전구를 켜고 일을 봤다. 백열등에 흥분한 나방이 달려들어도 절대 날뛰어선 안 된다. 나무 판자 위에서는 언제나 침착을 유지해야 한다.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귀신 손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난 변소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아끼던 스누피 인형을 데리고 갔다가 빠뜨렸다. 변소에 갈 때마다 녀석은 똥에 반쯤 잠긴 채 날 올려다보곤 했다.
시골 학교
국민학교에는 재래식 공중 화장실과 장작 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번은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서 장작으로 쓸 땔감을 주워와야 했다. 내가 주번인 날, 한 번은 몹시 장작 주으러 가기 귀찮아서 학교 창고 안에 쌓여 있던 걸상들을 가져와 태우다가 걸렸다. 그 때 서울 구경도 못해보고 인생 하직할 뻔 했다.
국민학교 2학년 때는 6.25 노래를 배웠다. 그냥 반공 교육을 6년 내내 받았다. 방학 숙제로는 권장 도서 중 3권을 골라 독후감을 써야 했는데, 리스트 중에 무얼 골라도 반공도서였다. ‘붉은 허수아비’ 뭐 이런 제목이었다. 더럽게 재미없는 책들이었다. 배우는 게 그런 것이니 친구들끼리 떠드는 재미있는 주제 중 하나가 북한 공산당이었다. 휴전선 사이에서 벌어진 도끼 살인 사건 같은 걸 배운 날이면 하루 종일 그 얘기만 했다.
반에 비치된 도서도 대부분이 반공 도서였다. KAL기 폭파범 마유미 이야기라던가, 새파랗게 젊은 김성일이란 청년이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빌려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내용의 만화 같은 종류였다. 그저 내가 반공 교육을 받은 세대일 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서울에서 만난 내 또래들은 나같은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망할 놈의 무장 공비는 왜 꼭 삼척이나 강릉으로 넘어 와가지고.
국민학교 졸업식 때 졸업앨범은 남자는 1,000원을 내고 컬러로, 여자는 500원을 내고 흑백으로 해야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제였다. 그래서 내 졸업앨범은 흑백이다. 또 반장 선거 때는 추천받은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을 세워놓고 교사는 남학생들을 향해 반장 후보, 여학생들은 부반장 후보라고 선언했다. 여학생이 표를 더 받아도 부반장이었다.
서점
시내에 가면 서점이 총 세 곳 정도 있다. 서점이란 곳은 재미있는 책을 사러 가는 곳이 아니다. 오로지 표준 전과나 동아전과, 그것도 아니면 아이템플 같은 문제집을 사러 가는 곳이다. 서점 구성도 대체로 학습지 위주로 되어 있다. 만화도 유명한 거 몇 종류 아니면 안 판다.
대여점
대신 대본소가 있었다. 만화방과 대본소, 비디오 대여점, 그리고 게임 팩 교환해주는 가게가 내 시골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었다. 물론 궁촌까지 내려가면, 근처에 비디오 가게조차 없다. 그래서 보름에 한 번 정도, 읍내에 갈 때만 비디오를 빌려야 한다. 그래서 무협 시리즈를 통째로 빌려서 내 덕질의 윤택함을 배가한다.
지능개발 콤퓨타 전자 오락실은 제외. 왜냐하면 국민학교 시절 오락실에 갔다가 걸리면, 여러 벌 중 가장 무시무시한 체벌을 당했기 때문이다. 심하게 두들겨 맞고 괴로운 자세로 벌을 서던 반 친구가 견디다 못해, 수업 중간에 ‘선생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오락실에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외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렇게 게임을 죄악시 하며 자란 우리들은 미래에 게임 산업 역군 소리를 듣게 됩니다.
어느 샌가 만화책 뒷 페이지엔 ‘대여점에서 빌린 만화에는 세균이 많다’라는 정보가 실리기 시작했고, 만화방과 대여점이 만화 산업을 갉아먹는다는 것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러나 ‘좋아하는 만화를 사 본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그러려면 시외버스 타고 다른 시까지 가야 한다. 적어도 동해시나 강릉시까지는. 원빈네 아버지가 원빈더러 ‘강릉만 가도 너 같이 생긴 애는 널렸다.’고 말한 그 강릉이다. 그 말 때문에 강릉엔 미남이 많이 나냐는 질문도 받았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강릉은 대도시를 뜻할 뿐이다. 즉 서울의 대체어다. 서울까진 못 가니까.
패스트푸드점
없었다. ‘요즘 10대’를 분석한 기사에 등장한 ‘빅맥’이 어떤 먹거리인지 서로 물어보던 기억이 난다. 우리 반에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몇 개 있다.
영화
‘전국 동시 개봉’이란 말이 왜 필요한지 서울 사람들은 모르겠지. 동시 개봉 영화가 아니면 비디오가 대여점에 꽂힐 때쯤에야 극장에 걸린다. 그것도 모두 내려오지 않는다.
연극, 뮤지컬, 전시회, 박물관, 도서관
없거나, 드물거나, 부실하다.
문화 자본은 평등하지 않다
지금까지 무슨 시골 부심을 이렇게나 부렸냐면, 얼만큼의 시골인지 체감하게 하기 위해서다. 적당한 중소도시에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점을 못 느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시골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최종적으로 나는 문화 자본도 중요한 자본이며 정보의 평등함이 이 격차를 해소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문화 자본엔 정서 자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 자본이 척박하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내 경험을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어릴 때부터 둘리 등이 연재되던 ‘보물섬’을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그림를 따라 그렸고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한국 출판 만화가 전성기를 맞이할 때라, 100만 부 판매고를 올린 만화들이 실시간으로 대본소로 들어왔다. ‘마이러브’나 ‘진짜 사나이’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열혈강호’ ‘붉은 매’ 등을 보고 자랐다. 여기 안 적힌 대형 만화들은 대학에 가서 보았기 때문에 제외.
그런데 만화를 어떻게 그리는지 전혀 모르겠다. 종이는 뭘 써야 하지? 이 무늬들은 어떻게 그리는 거지? 그러다 고등학생 때, 강릉의 서점에서 박무직의 ‘무일푼 만화 교실’이란 책을 샀다. 오오, 종이 종류가 그렇게 많을 줄이야. 오오, 펜 종류도 여러 개구나. 아, 이런 무늬나 명암은 스크린톤이라는 걸 붙여서 만드는 구나.
그렇게 어느 정도 감은 잡았지만 직접 해보기까지도 또 벽에 부딪쳤다. 예를 들어 ‘을지로 제지소에 가서 모조지를 잘라오라’는 대목에서는 ‘이제부터 요리를 할 건데, 먼저 정원에서 바질을 뜯어오세요’라는 글을 본 느낌. 을지로는 어디야? 도시 이름인가? 델리타 원고지란 건 화방 주인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른다. 일단 종이 자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로지 2절지냐 3절지냐 4절지냐, 두꺼운 도화지냐. 그러니 그냥 닥치는 대로 스케치북을 여러 개 사서 시험해 본다.
스크린톤이라는 걸 찾아 동네 화방을 다 뒤졌는데, 강릉의 큰 화방에서 몇 종류 발견했지만 그 책에 나온 스크린톤 상표도 아니었고 그나마 종류도 거의 없다. 일단 그거라도 산다. 펜촉도 G펜, 스푼펜 같은 구분은 없다. 그냥 종류는 하나. 역시 그거라도 산다. 그렇게 만화를 독학하고 있는데 조언해 줄 사람도 없다. 내가 아버지 전근 문제 때문에 강릉에서 살아본 적 없었다면 이 보잘 것 없는 경험조차 없었으리라.
시골에서 태어난 학생은 만화조차 한 번 그려보기까지에도 난관이 많았다. 그리고 시골의 모든 문화 생활이 이와 비슷하다. 시도할 수 없거나, 난관이 있거나. 흙 만지고 잠자리 잡고, 개울과 바다에서 실컷 놀며 수영도 스스로 배우고, 평상 위에서 수박 먹고 낮잠 자면 좋을 것 같은가? 코 찔찔할 때까진 좋다. 아니면 서울 생활을 이미 해 봐서, 서울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당연하고 별 거 아닌 사람들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인생을 찾아가야 하는 청소년들이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때부터 시골은 텅 빈 사막과도 같다는 사실이다. 서울, 적어도 지방 대도시에 있는 대학에 갈 때까지 모든 경험을 연기해야만 하는 곳이 시골이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당장 할 수 있는 것, 보고 싶은 공연, 보고 싶은 전시가 있으면 당장 보러 갈 수 있는 서울과는 달리, 시골은 모든 경험을 대학갈 때까지 미뤄야 한다. 심지어 ‘무언가를 아는 것’조차도 대학갈 때까지 미뤄야 한다. 정보가 없으니까.
꿈이 생기면 시골은 고통이다. 우리 시에는 제대로 된 입시 전문 미술 학원도 없어서 그놈의 만화 때문에 미대를 가겠다고 결심한 이후로는 매일 수업 마치고 시외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 즉 강릉까지 가야했다. 강릉에서 학원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시외버스도 끊겨서, 나와 같은 처지의 시에 4명 있는 같은 학년 미대 지망생의 부모님들이 돌아가며 장거리 운전으로 데리러 왔다. 전교에 4명 있는 게 아니다. 시에 4명 있었다.
미술학원 다니기 전만 해도 미대란 건 일반 대학과는 달리 ‘○○미술대학’으로 따로 분류된 대학이라 생각할 정도로 개념이 없었다. 심지어 예체능 계열의 수능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아는 선생님들도 없어서 수능 직전까지 미적분을 풀었다. 삼척시의 고3 여고생 중 미대 지망생이 4명 있었고, 음대 지망생이 1명, 그리고 체대 지망생은 전멸이었다. 예체능이란 꿈을 가지기에도 척박하기 그지없다. 무용? 피겨? 재즈댄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고2 때 내가 미술학원을 가고 싶다고 담임 선생님한테 말했을 때 ‘네가 미술로 강원도를 벗어난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라고 비아냥댔다는 사실을 전하며 대신 갈음할까 한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디지털
시골에서 나고 자란 것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지만 누가 시골 라이프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며 부럽다고 말할 때는 말문이 막힌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서울민국이다. 그리고 지방인, 특히 시골 사람은 그냥 이방인이다. 어쩌면 외국인과 더 비슷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서 올라가게 되었을 때 우리 할머니는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담은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어디 나돌아다니지 말고, 항상 학교하고 집에만 있으라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모르는 사람 만나지도 말라고. 서울은 숭악하다더라며. 그 정도로 우리는 서울민국에서의 외국인이었다.
내 삶을 불편하게 했던 모든 것을 설명할 용어는 서울에 와서, 대학에 와서 배웠다. 인권, 민주주의, 가부장제. 대학교 1학년 1학기 교양 수업부터 머리가 개이는 느낌을 받았다. 야만스럽던 나는 대학에서 문명인으로 훈련되었다. 그렇게 오래토록 하고 싶던 밴드도 당장 시작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종로 5가 세화 합주실을 한 시간 내로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이 마법 같았다. 대학 도서관의 책은 정말이지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지레 포기할 정도로. 돈만 있다면 정말 모든 것이 가능했다. 당시 내가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며 쓴 일기의 문구는 이러했다.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 지옥보다,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지옥인 곳이 그래도 좀 더 낫다.’
‘대학에서 배우는 게 없다, 졸업장만 따려는 것 뿐’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 저 사람은 서울이나 적어도 대도시 출신이겠구나.’라고 생각한다. 대학 교육을 대체할 문화 자본이 있는 환경에 있었다는 뜻이니까. 고등학생, 중학생들이 청소년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본다. 학생들이 집회에 나와 100만의 관중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본다. 내가 있던 시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학생 인권? 운동? 그런 걸 뒷받침하는 논리? 나는 너무나도 무지했다.
그렇게 야만스럽고 무지하던 내가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8할이 대여점과 통신, 그리고 잠깐 강원도의 대도시 강릉에서 살아 본 경험 덕분이었다. 만화책과 비디오, 게임 팩 대여점이 가진 콘텐츠만큼은 서울의 그것과 비교해도 비슷했다. 서점보다도 평등했다. 소장형 소비가 갖는 무거움보다, 가벼움을 지향하는 행위가 정보를 더 멀리까지 전송해 준 것이다. 만화책 대본소 자체는 찬성하진 않지만, 가벼운 대여와 전송이 내 삶을 구원해줬기에 같은 방식인 이북을 지지한다. 비디오라는 문명의 이기, 게임기라는 기술의 혁신을 손에 넣던 순간의 전능감 때문에 여전히 최신 기술에 매료된다.
그리고, 통신. 강릉 우체국에 가서 단말기를 빌려와 케텔로 서울 및 각 지방 소도시의 사람들과 동시에 소통하던 순간, 난 비로소 문화 자본의 평등에 접근했다고 생각한다. 서울 사람들은 떡볶이나 짜장면 같이 촌스러운 음식은 안 먹는 줄 알았는데, 서울러라도 시골 사람이 먹는 건 다 먹는다는 것도 통신을 통해 알았다. 패닉 2집의 ‘밑’에 대해 격렬하게 토론하고 있는 토론방을 통해서 서울 학생들이라도 다 패닉 편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만화 ‘진짜 사나이’나 ‘어쩐지 저녁’에 나오는 고등학교 라이프는 서울 학생들도 못 하는 판타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통신을 통해 그렇게 보고 싶던 아키라나 공각기동대를 주문해서 봤다. ‘go game’을 쳐서 게임 동호회 사람들과 게임 이야기를 했다. ‘go comic’을 쳐서 만화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던 내 만화를 pcx 파일로 바꿔서 게시판에 올리고 피드백을 받았다. ‘go rock’에 들어가서 미국과 영국의 음악 정보를 얻었다.
디지털 혁명이 흔한 시골러 하나를 망쳐놓으면서 구했다. 흔히들 말하는 아날로그의 감성? 난 모르겠다. 난 내 고향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내가 진심으로 고향이라고 느끼는 곳은 대학을 다니며 10여년 간 자취하던 대학가 주변이다.
얼핏 최신 기술은 시골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시골은 그저 아날로그적인 것이 어울리고 목가적이고 느리고 조용해야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이지, 시골이야말로 디지털과 최신 기술이 필요한 곳이다. 이제 인터넷은 전국에 깔린 것 같다. 이걸로 키보드 워리어만 키울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서 문화 자본을 더 평등하게 흘러다니게 할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정치인이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기술 자체의 어려움과 낯섦이 또 다른 기술에 무지한 이방인을 만든다는 것은 안다. 내가 기술을 소유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박탈감을 주고 타자화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나는, 아톰보다는 비트가 더 가볍고 빠르고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원문: 괴벨의 brun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