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디오테이프를 정리하면서 과거에 녹화한 다큐멘터리도 찾아보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책이나 다큐멘터리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정보와 지식은 다른 것이고, 무엇보다 정보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누군가의 시선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보는 ‘작품’이 아닙니다. 작품은 정보뿐 아니라 누군가의 주관이 담긴 것입니다. 또 그러한 생각을 통해서 정보를 새롭게 바라볼 수도 있죠.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통해 책을 만난다.”라는 말은 다큐멘터리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이 사람을 바꾸어 놓기도 하지만 좋은 다큐멘터리 역시 사람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죠.
이번에 소개하는 ‘결투의 역사(Deadly Duels)’라는 다큐멘터리는 당시뿐 아니라 지금의 제게도 큰 영향을 준 좋은 작품입니다.
총 3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소개되었습니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역사 다큐멘터리는 기술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펼쳐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꽤 다르죠. 당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떤 이유로 결투했는지에 대해서 복합적으로 파고듭니다.
1부: 기사도의 탄생
결투의 역사는 이른바 ‘신전 결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에게 옳고 그름을 믿는 사회 문화 속에서 결투는 “신은 올바른 자를 수호하신다.”라는 믿음을 실천하는 수단의 하나였죠.
뜨거운 쇠를 쥐고서 화상을 입거나, 몸을 묶고 눈을 가리고 물에 던져서 물에 떠오르면 유죄로 인정된다니, 정말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이라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의 역사가 종식되고 기원후 501년, 게르만의 지도자인 군데팔트왕이 ‘사법적 결투‘를 생각함으로써 상황은 바뀌게 됩니다. 당시의 싸움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싸움이었고, 전사들은 승리를 위해서 무엇이든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다리를 노렸다는데, 그건 방어하긴 힘들고 노리긴 쉬웠기 때문이라고 하죠.
실제로 역사에 남은 결투 중 상당수는 다리를 다쳐서 종료되었습니다. 그만큼 싸움은 역동적이었다고 하는데 결코 낭만적이었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싸움이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당대의 사람들은 결투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기사들의 대결이 이어지고 서민들까지 결투에 뛰어드는 일이 늘어나게 됩니다.
결투에는 다양한 병기가 사용되었지만, 중세까지는 주로 검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부상은 외과 기술로 치유되지만, 손상된 명예는 검으로만 치유됩니다(Wounded flesh cured with heals, Wounded Honor only cured Steels).”
무기 연구학자가 이야기한 이 말은 검에 대한 당시의 생각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군요.
2부: 목숨과 맞바꾼 명예
제게 있어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법적 결투’보다는 근대에 들어 시작된 ‘명예의 결투‘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자낙의 결투’라는 것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명예의 결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하죠.
“만일 상대와 싸워 죽이기 위해서 검술을 배우고 연습한다면 그건 광적인 살인자와 다름없어요.”
현대인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과 싸우기 위하여 검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당시의 검술 사범들은 매력적인 외모와 실력을 겸비함으로써 스타로 대접받았다고 하죠.
열차에서 옆자리에 발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와 결투를 벌여서 죽여 버린 장교의 이야기라든가, 상대방의 턱수염이 마음에 안 든다고 결투를 신청한 사람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많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은 가장 큰 모욕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거짓말쟁이라는 말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건 ‘신의 말이 곧 성경이듯’ 말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습니다만.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에서 달타냥이 처음 만난 삼총사 전원과 결투를 하기로 했던 것도 이러한 ‘명예의 결투’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적인 결투는 국가의 질서를 위협하기에 나라에선 엄벌로 다스리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결투는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처럼 “결투는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관습이다”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3부: 신세계에서의 결투
‘신세계에서의 결투‘에서는 굉장히 대담한 이론이 나옵니다. 바로 ‘남북전쟁이 거대한 결투였다’는 것입니다. 남북전쟁은 북부가 남부를 모욕함으로써 시작되었고, 남부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는 것이지요.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사실 ‘게티스버그’ 같은 영화를 보아도 그런 점을 잘 느낄 수 있죠. 남군의 지휘관 중에는 의외로 노예 제도에는 관심이 없거나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하니까요. 명예로운 결투 제도를 지키고 있던 남부, 그리고 그러한 것과 거리가 멀었던 북부… 두 의식의 차이가 분쟁을 가져왔고, 결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남북전쟁이 벌어질 당시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 나온 내용은 아닙니다만, 첫 전투 당시 사람들은 피크닉을 하듯 전쟁터에 구경하러 왔다고 하니까요. 결국 ‘결투 구경’처럼 ‘전쟁 구경’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도 당시 남북전쟁이 일종의 결투였다는 견해가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지게 되죠.
하지만 남북전쟁의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고 그 장면이 사진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전쟁의 끔찍한 모습을 잘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에서 ‘명예의 결투’는 사라지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로 유럽에서 결투가 한심한 짓이라 여겨지게 된 것처럼요.
그렇지만 아직도 결투라는 전통은 남아 있다고 하는군요.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일종의 모의 결투인 ‘멘수르’라는 게 있다고 하니. 물론 이는 사법적 결투도, 명예의 결투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용기의 입증’이라고 해야겠군요.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단지 뒤로 물러나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벌이는 결투…
굳이 비교하면 누가 더 술을 많이 마시는지 내기하는 것 정도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결투라는 것은 사실 미친 행동입니다. 상대방의 수염이 마음에 안 들어서 결투를 벌이다니, 대다수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 시대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다면 바로 그러한 점을 생각할 수 있어야겠죠.
이 다큐멘터리는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오직 결투라는 하나의 내용을 바탕으로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파고들기 때문이죠.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당대의 사고방식을 결투라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조명하고 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재미있게 연출해 주었습니다.
사실 ‘사법적 결투’라는 말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 다큐를 보기 전에 저는 게임 ‘메크워리어 2’에 빠져 있었는데 여기에서 등장한 시련(TRIAL)이라는 미션이 사실은 ‘사법적 결투’를 뜻한다는 것을 이 다큐멘터리 덕분에 알게 되었죠. 31세기를 무대로 한 전쟁의 이야기인 ‘메크워리어 2’에서 중세 시대의 사법적 결투가 등장하다니 이상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설정이야말로 ‘메크워리어’ 시리즈의 제작자가 역사에 대해 폭넓은 생각을 가졌다는 증거일 겁니다.
왜냐하면 ‘메크워리어 2’의 세계는 사실상 중세 시대와 같은 봉건 국가의 시대이며, ‘메크 워리어’라고 불리는 전사 계급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대거든요. 전사 계급이 지배자로 군림하고 강력한 전사가 국가의 중추인 만큼 ‘강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가 필요함은 필연적입니다. ‘강한 자가 옳다.’라는 설정의 사법적 결투는 그러한 환경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메크워리어 2’의 시스템에 대해서 이해하고 왜 그렇게 되는지, 왜 그런 사회가 구성되었고, 만약에 내가 이런 세계관을 만든다면 어떻게 하면 될지…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결투의 역사(Deadly Duels)’는 바로 그런 점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정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상상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요.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이 달라질 수 있으며 현대인의 눈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보시길.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분들, 특히 중세나 고대 스타일의 판타지 작품을 좋아하는 분들께도 권합니다.
원문: 표도기의 타임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