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들만의 상식 vs. 제도와 학술적 합리성
자료를 찾으러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심각한 우려를 느끼게 되었다. 원래 남초적 지향이 강한 곳인 줄은 알았지만, 현재 이 커뮤니티에서 공유되는 페미니즘(여성주의)에 대한 반감은 상상 이상으로 거의 ‘광기’ ‘정신병’ 급으로까지 매도된다. 일전에 몇몇 게시물에서 정리한 적이 있었지만, 남초커뮤니티에서 일베=메갈리아 ↔ ‘정상 시민’이라는 포지셔닝이 지난 1년 여간에 걸쳐 만들어진 방식으로 일베=메갈리아=페미니즘 ↔ ‘정상’ ‘합리성’이라는 프레임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 눈에 띤다.
이것과 함께 최근의 무고죄·’꽃뱀’ 케이스로 인해 확대된 ‘한국은 여성차별이 거의 사라진 나라이며, 오히려 남성이 차별받고 있다’는 (냉정히 말해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남성피해자주의 프레임이 결합되어 반여성주의적 담론을 형성한다. 물론 ‘페미니즘’의 기치 하에 이뤄진 모든 언행에 어떠한 문제도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여성주의를 단순히 비합리적 남성혐오와 여성상위사상으로 자의적으로 규정하고 어떠한 지적인 검토도 없이 그것을 상식으로 삼는 태도가 만연하게 된 것은 무척 당혹스럽다.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의 페미니즘 혐오‘라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선택적 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예를 들어 이 여성주의혐오자들은 성폭력이나 성차별에 문제가 있으며 (그게 뭐가 됐든) 우리사회가 합리적인 평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인정하고, 연인관계에서 남성의 폭력이나 ‘연서복’적 태도가 긍정될 수 없다는 데도 동의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과거의 여성주의혐오자들과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새터(신입생OT)에서 반성폭력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새터의 여성주의 교육이 ‘사상의 강요’라고 외칠 때, 애초에 반성폭력 교육 자체가 여성주의적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참고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그들 자신이 배척하는 유교적 가부장제가 바로 여성주의의 강력한 문제제기 덕택에 문제시되고 점차 사회적으로 ‘괴상한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의 온라인 여성주의자/넷 페미니스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여성주의의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역사적 기여는 새로운 여성주의혐오자들로부터 무시당한다.
내가 이 과정에서 특히 우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익명중심-폐쇄형 커뮤니티에서 종종 나타나는 태도, 즉 ‘그들만의 상식’을 유일한 표준으로 간주하고, 일체의 학적·제도적 논의 자체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이의제기를 배제·축출·무시해버리는 독특한 형태의 반지성주의다. 물론 이 현상은 해당 커뮤니티만의 것이 아니며, 심지어 여초 커뮤니티라고 해도 여기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몇몇 개인이 경험한 ‘주관적 사실’이 제도와 학술적 합리성을 가뿐히 밀어낸다. 이 ‘사실’들은 몇 차례 게시판을 도는 과정에서, ‘카더라’가 그렇듯이 종종 크게 부풀어서, 어느새 암묵적인 사실처럼 성장한다. 이것은 물론 해당 커뮤니티, 혹은 유사한 성향의 커뮤니티에서만 통용되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커뮤니티들은 규모와 양 모두 크다.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왕왕 처음부터 ‘페미나치’나 ‘보빨’로 낙인찍히는데, 여기까지 오면 이제 해당 주제로 서로 다른 의견이 논쟁을 벌이고 입장을 수정해나가는 합리적 의사소통과정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2. 음모론을 만드는 거대한 익명의 목소리
2010년대에 들어와 좁게는 학생의견수렴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던 각종 사업추진, 넓게는 지난 9년간 자리잡은 한국 행정부에 대한 포괄적인 불신은 이러한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보인다. 공식적인 제도나 문제처리기구, 학술장에서 여성주의적 고려에 입각한 입장이 피력될 때 여성주의혐오자들은 이것을 공적 권위가 여성주의자들에게 굴복하거나 식민화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권센터가 성희롱·성폭력·성매매 교육 등을 수행하면서 가해자를 남성으로 설정한 사례를 제시할 경우(한국에서 해당 범죄의 가해자가 남성인 경우와 여성인 경우 중 어느 쪽이 대표성을 갖는지를 아는 데는 그렇게 높은 추리능력이 필요하진 않다)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집단이 남성혐오를 전파한다는 비난을 받으며, 교수A가 여성주의에 가까운 제스처를 보일 경우 ‘수업을 들을 때는 좋은 선생님이었는데 페미니스트라니, 문제가 있는 분이다’ 식의 논평이 어떤 반성도 거치지 않고 공유된다.
즉, 이들은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상식과 제도·학술장이 상충할 경우 자신들의 믿음을 재검토하는 대신 제도나 지적인 권위가 비합리적이라는 판단으로 너무나 쉽게 도약한다.
공적 권위에 대한 불신 혹은 반제도적 음모론에 입각한 판단은 자신들끼리의 추천과 동조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여기에 자신들이 공식적인 언론과 제도의 ‘카르텔’을 통해 억압받는 피해자라는 감정이 결합하면 이 틀은 확고부동한 것이 된다. ‘내가 틀렸나’라고 잠시 질문해보지만 같은 커뮤니티에 속한 다른 이들로부터 곧이어 ‘네가 맞다’라는 코멘트가 붙고, 뒤이어 ‘그래, 이건 다 저 끔찍한 페미니스트들이 국가와 학교를 장악하고 나 같은 선량하고 합리적인 남성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거야’라는 피해자 의식이 덧붙여져 일종의 확증편향이 발생한다.
그리고 대체로 익명커뮤니티에서 진행되는 이 대화과정에서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지는 이들은 없다. 거대한 익명의 목소리가 ‘정신병으로서의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음모론’을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이 목소리는 비웃고 무시해서 치워버리기에는 너무 크다.
이 상황이 조금 더 악화될 때 우리는 ‘태극기집회’의 참여자들 및 충성스러운 트럼프지지자들처럼 애초에 합리적인 대화 및 설득수단이 불가능한 대규모의 집단을 마주하게 된다(나는 이 여성주의혐오자들이 자신들의 사고방식과 바로 그 자신들이 혐오하는 박사모, 트럼프 지지자들 등의 논리구조가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언제쯤 깨달을지 궁금하다). 트럼프지지자는 어쨌든 다른 나라 이야기고, 태극기집회의 할아버지들은 어쨌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다소 안이하게) 믿곤 하지만, 이러한 여성주의혐오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걸 현재와 같이 방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결과가 여성주의자들 및 불합리한 성차별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닐 것은 분명하다. 좀 더 끔찍한 가능성은 여성주의혐오가, 마치 미국의 일부 힐러리 혐오자들이 보여주었듯, 대대적인 반지성주의로 이어지면서 여성혐오적 포퓰리즘의 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이 한국의 여성주의자들 및 제도적 합리성의 신봉자들이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3. ‘설득하는 페미니즘’ 전략
2010년대 중반은 다른 무엇보다 이전까지 성평등, 젠더, 퀴어 등의 언어에 의해 차츰차츰 대체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던 ‘여성주의’라는 말이 다시금 극적으로 부각된 매우 놀라운 시기다. 이것 자체가 운동사에 기초한 성인전이나 휘그사관으로 만족할 수 없는 진지한 사상사적 검토를 요구하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왜, 어떻게 이 말이, 이 입장이 이토록 단기간에 다시 부활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이 단어가 부활하면서 동시에 거대한 여성주의혐오가 표면화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사태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일부 여성주의자들과 달리, 나는 여성주의혐오의 확산이 여성주의의 대두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병렬적으로 등장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메갈리아 및 넷 페미니스트들이 채택한 사이버불링과 혐오표현(‘미러링’)이 기존의 반성없는 여성혐오자들을 공격하는데는 의미가 있었을지언정 새로운 여성주의혐오의 대두에도 효과적으로 작용할 방식인 것 같지는 않다.
내 생각에 가장 정도에 가까운 해결책은 어쨌든 이들과 적지않은 불편함을 무릅쓰고라도 대화할 수 있는, 합리적·온건주의적이며 제도적 장치를 보다 편안하게 활용하는 스탠스가 지금보다도 더욱 중요한 입장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성차가 불평등의 원인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거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지점까지 왔고, 과거에 비해 좀 더 합리적인 논쟁이 가능하게 되었다. 불과 15년 전만해도 이러한 입장이 주류라고 보기 힘들었다는 걸 감안하면 확실히 한국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것이 ‘급진적’ 언행에 기초한 여성주의자들이 전부 배제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성주의를 단순히 반사회적 태도나 자의적인 공격성의 표출로 믿는 이들로부터(이는 심지어 자신이 여성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이 말을 구출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합리성’의 가치를 여성주의혐오자들에게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합리적 대화가 가능한 이들’이라는 포지션을 내주고 게임을 시작하는 것은 여성주의자들의 선택지를 매우 좁히는, 전략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이다. 왜 페미니즘이 합리성, 지성, 제도적 실천, 공식적인 규범으로 기억되면 안 되는가? 왜 공격하는 페미니즘 못지않게 설득하는 페미니즘이 있어서는 안 되는가?
물론 적지 않은 여성주의자들은 왜 여성혐오주의자들과 굳이 대화해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하는지, 그냥 서로 무시하고 살면 되는 게 아닌지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나의 답변은 간단하다. 만약 여성주의가 이 세상 자체를 좀 더 평등하고 합리적인 곳으로 재구축하고자 하는 사상·입장이라면, 이게 현시점에서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우리와 다른 입장에서 시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투표를 통해 공통의 정치적 대변인을 선출하는 나라에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을 여성주의혐오자로 남겨두는 것은 바로 국가, 법, 행정권력의 상당한 부분을 여성혐오적 정치가들에게 넘겨주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국가와 제도에 대한 ‘대항’만을 강조하는 입장이 한국의 현실에서 볼 때 나이브하다고 지적하고 싶다. 여성주의의 승리라는 걸 말할 수 있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더 많은 수의 여성주의자들을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