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문적 지식을 갖춘 분야가 몇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다이어트다. 식욕과 싸우는 걸 싫어하는 우리가 원하는 건 마법의 알약이다. 먹으면 살이 빠지고 요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하지만 그런 건 없다. 다이어트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지식은 이미 반세기 전에 다 알려졌다. 그냥 하기 싫고 어려우니까 안 하는 거다. 말이 쉽지, 생활습관 자체를 바꾸고 평생 식욕과 싸워야 한다.
다이어트를 위한 철학
다이어트를 위해 철학이 도움될까? 물론 된다. 다이어트가 안 될 때.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철학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면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자신을 사랑하세요.”와 같은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는 데 있지 않다.
철학이 진짜로 도움이 된다면 이런 식일 거다. 다이어트에 관해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하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탁월한 선택을 하기,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증대시키기, 그리고 다이어트를 실천하면서 변화를 주도하고 지배하기 등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는 점. 아주 고전적인 정의를 빌려오자면…
“철학은 그렇게 탁월한 삶의 기술을 생각해내기 위한 도구적 지식이다.”
지적 유희가 돼버린 철학과 인문학
철학은 일종의 고급 실용 지식이다. 쉽게 말해 제대로 된 철학은 탁월한 다이어터가 되도록 해준다. 그 복잡하다는 철학자 이름 같은 건 외울 필요가 없다. 아낙시만드로스, 아리스토텔레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소크라테스라는 작자는 음미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했단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부터 위험한 구라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제자의 제자뻘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가면 결국 삶에 대한 명상이 최고의 행위가 된다.
그러니까 그 고전적 철학자를 따르면, 삶을 위한 반성이 아니라 반성을 위한 반성이 될 위험이 있게 된다. 현실과 거리가 먼 지적 유희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
“성찰을 하면 뭐가 좋나요?”
“더 많은 성찰을 원하게 되지.”
“술과 고기 같군요.”
“…….”
나를 위한 철학: 습관 하나에만 수많은 철학이 숨어 있다
삶을 위한 철학이라면 가장 첫 번째로 다루어야 할 주제는 바로 ‘습관’이다. 습관은 매 순간 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인 도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지난 삶을 다 돌이켜보고 지금 이 순간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가를 숙고한 이후에야 비로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라. 끔찍한 일일 거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을 만들었다.
하지만 습관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나쁜 습관이 삶을 망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콘돔을 쓰지 않는 습관만 해도 그렇다. 습관을 구성하는 ‘연관’들은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콘돔을 핸드백 속에 넣고 다니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개인들의 습관을 결정짓는 ‘연관’ 중의 하나 아닌가.
사소한(?) 습관 하나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필요한 ‘선택’의 무게가 어떠한 것인지, 그러한 선택을 함으로써 ‘나’란 존재는 사회적 연관 속에서 어떻게 규정되는지, 또 그 규정에 어떻게 저항해서 스스로를 지킬 것인지, 그렇게 습관을 바꿈으로써 삶의 어떤 부분들이 함께 달라지는지, 이런 걸 생각하게 될 때 초보적인 철학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다.
이게 거창해지면 세계관이라는 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비밀(!)을 말하자면, 철학적 사고란 결국 총체적인 연관을 잘 생각하는 데 그 성패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얻는 것은 좋은 습관을 형성해나갈 수 있는 ‘나’이다. 즐거움에 대해, 연애에 대해, 성공과 실패에 대해, 자기 마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로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전부니까. 철학은 바로 거기에 도움이 된다. 연관을 파악하고, 선택의 가능성과 무게를 가늠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에. 그리고 그를 통해 ‘나’를 더 강화하는 것에.
무작정 철학사를 드는 게 위험한 이유
그런데 아무런 도움 없이 그런 철학적 사고를 한다는 건, 산에 가서 아무 풀이나 뜯어 먹으면서 약초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그걸 정제해서 약즙을 만들어 내는 것이랑 별다를 게 없다. 이미 수천 년에 걸쳐 남들이 대신 고생해서 쌓아온 지식이 있는데 왜 그 짓을 하겠나.
그렇다고 철학사 책이나 철학 교과서, 심지어 철학 고전을 들고 읽는 것도 별 도움은 안 될 것이다. 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기보다는 시간 대비 효용이 너무 낮고, 자칫하면 학문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의 재미에 빠져 삶을 낭비하거나 전폐하고 철학에 빠지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필자가 그렇다.)
약 파는 것처럼 얘기가 진행되는데, 이게 마지막 망치질을 할 때여서 그렇다. 이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철학을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를 써먹도록 고안된, 드문 책 중 하나다.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이 책의 겉표지를 넘길 때까지 필요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했다.
삶이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끼거나 혹은 좀 더 나은 삶,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고자 고민을 하게 될 때, 피해갈 수 없는 질문들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서 인스턴트 해답으로 건너뛴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와 같은 지침들을 내려주는 ‘스승들’에게로.
하지만 그래 봤자 그렇게 얄팍한 해답을 찾는 자기 자신은 달라지지 않고, 그래서 그 해답들은 실패하기 쉽다.
철학은 곧 삶의 기술이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극 중 유덕화(육성재 役)의 입을 빌려 신이 이렇게 말한다.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고, 답은 그대들이 찾으라.”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위한 생각의 도구들이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삶의 기술에 대한 철학적 지혜를 모아서 잘 정리한 책이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이다.
진지함과 가벼움 사이에서 어떻게 중도를 지켜야 하는지, 내가 날 잘 모른다면 어떻게 자신을 발견하고 강화할 수 있는지, 그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철학이 어떤 지혜를 축적했는지 직접 얘기해주는 책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삶의 적절한 시점에서 이 책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보석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나를 위한 성숙을 도와주는 철학서
어떤 분께서 멈춰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고 했다. 그냥 대책 없이 멈춰 서지 말고 제대로 경치를 보려면 도구, 바로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삶을 잘 돌아보기 위해 필요한 쌍안경 같은 도구가 바로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파묻혀 있는 ‘단어’들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규정하고 변화시키니까.
이 단어들을 아주 조금, 지적 교양이라는 거름종이에 걸러서 정제를 하면 삶의 철학을 위한 개념적 도구들이 된다. 나(주체), 자율성과 타율성, 세계, 연관성, 염려와 배려, 시간, 이상과 현실 등등.
이 정제된 단어들의 연관을 통해 삶이라는 커다란 풍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금 느긋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문장들은 현학적이지는 않지만 밀도가 있다. 한 줄 한 줄 차분하게 읽어 내려갈 때 비로소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우리 삶의 단면이 모두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비애는 완벽을 추구하려 애쓰는 자를 엄습한다.” 이상이란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고통받아본 사람들만이, 혹은 그러한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런 문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이지 않은 부모님, 혹은 자신 때문에 우울해 본 경험이 누가 없겠나.
저 밀도 높은 문장을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내는 게 성찰적인 실용적 독서의 방법이다. 그러한 성찰적 독서를 통해 우리는 비애라는 감정(멜랑콜리)이 어떻게 보다 성숙한 삶의 태도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이 책의 내용을 자신의 삶의 지침이자 안내서로 써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간단 요약
- 이 책의 장점: 철학이 삶이 되고 삶이 철학이 되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맛볼 수도 있다.
- 이 책의 단점: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보장하지는 못한다. 배경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밀도 때문이다. 차분하게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갈, 여유에의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