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에 ‘유리스텐슈타트(JuristenStaat)’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한사전에도 실려있지 않은 단어로 직역하면 ‘법률가의 나라’입니다. 법률 귀족들이 국가를 지배한다는 취지가 아니라, 정당하고 정치(精緻)한 법률에 기반 둔 국민들의 준법정신이 확립되어 있어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Rule of law)가 실현되고 있다는 취지의 표현입니다. 즉 독일에서 법은 통치를 위한 수단이나 장식적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반드시 엄수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정언명령(定言命令)을 생각한 칸트가 나온 게르만 민족의 국민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독일은 의원내각제 국가로 대통령은 있지만 상징적 존재이고, 통치권은 총리에게 있습니다. 현재 독일의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은 2005년 총리로 취임한 이래 햇수로 12년간 연임하고 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두 장군의 집권 기간이 합계 12년이었으니 얼마나 긴 시간일지 짐작이 갑니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 테지요.
이제는 한참 지난 2012년 4월의 일입니다. 메르켈 총리는 이탈리아 남부의 섬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당연히 남편인 훔볼트대학 교수 요아힘 자우어(Joachim Sauer)도 함께 했습니다. 자우어는 양자화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25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36세에 교수가 된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부부의 성(姓)이 다른 이유는 메르켈이 자우어와 재혼한 후에도 전남편의 성을 계속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황스러운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메르켈은 당연히 정부 전용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우어는 전용기에 동승하지 않고, 혼자 저가항공사를 이용해 나폴리로 갔고 현지에서 메르켈과 합류했습니다. 특별히 부부 사이에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무가 아닌 사적 여행의 경우 총리 본인은 상관없지만 동행하는 가족은 약 1, 300유로에 상당하는 비행기 이용료를 별도로 국가에 납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가항공사를 이용하면 예약 시점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100유로 전후로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경제적인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는 굳이 정부 전용기에 동승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 전용기는 좌석이 거의 비어있는 채로 운항하지만 규칙은 규칙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비단 메르켈의 경우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전임 총리인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 시절에도 사적인 목적으로 이동하는 경우 당시 총리 부인 도리스 슈뢰더-쾨프(Doris Schröder-Köpf)는 개인 승용차를 운전해 총리의 전용차를 뒤따랐다고 합니다.
최고 지도자의 가족이 차나 비행기에 동승했다고 해서 별도로 돈을 징수하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상식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가적 비극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문: 최종호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