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결국 물질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과 물질의 차이는 물론이고 인간과 ‘짐승’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이니 정신이니 마음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상부구조’는 물질의 반영인 허상일 뿐이다. 일종의 물질 환원론이다. 대략 유물론(materialism)의 인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런 인문학 위에서 서 있는 경제학자들은 재화(goods)와 서비스(service: 용역이라는 내게도 낯선 용어로 번역되기도 하지만)를 조달하되, 그 가운데서도 ‘재화’를 조달하는 것에 방점을 둔다. 그것도 가능한 한 많이! 요즘 한창 비난 받는 ‘물질만능주의’의 인문학적, 경제학적 기반이다. 이런 생각은 미시적으로는 ‘극대화 원리’, 거시적으로는 ‘성장’, 역사적으로는 ‘생산력주의’라는 키워드로 집약된다.
경제학자들은 왜 이런 생각에 몰두하는가? 실제로 물질만능주의자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사람들의 행동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 관심은 애정으로 발전하는 수가 많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창시절에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일본의 80명 과학자들이 성경의 허구성을 밝히려 연구하다 모두 독실한 신자로 되어버렸다’는 일화가 바로 관심과 애정의 관계에 대한 사례가 될 것이다.
유물론적 경제학자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물질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 아니면, 물질이 지극히 ‘필요한 사람들’일 게다. 전자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을 생활원칙으로 삼는 수전노, 고리대금업자, 착취와 수탈을 일삼는 욕망의 전사들이다. ‘아무리 가져도 여전히 배고픈’ 사람들이다. 현대적 언어로 번역하면 가장 일반적으로는 ‘기업’, 좀 더 구체적으로는 금융업자, 대기업, 재벌 정도일 것이다. 신고전학파 혹은 신자유주의 주류경제학자들이 애정을 느끼는 ‘호모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들이다.
똑같이 물질에 목매는 사람들이 있는데, 목을 매는 이유가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물질이 지극히 부족하기에 유물론자가 된다. 결핍은 집착을 유발한다. 누군가? 일반적으로는 ‘노동자’이지만 더 구체적으론 서민과 빈곤층인데, 이들은 ‘못 가져서’ 물질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호모에코노미쿠스다. 입만 열면 돈이다.’ 돈이 되어야지, 돈 되는 건 뭐냐? ‘ 그런데 앞의 ‘자발적 물질만능주의자’와 달라 이들은 ‘비자발적 물질만능주의자’다.
전자에 대해선 한 대 패주고 싶지만, 후자에 대해선 마음이 아픈 건 나만의 생각일까? 이런 아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이다. 내가 간간이 마르크스경제학에 메스를 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생각에 마저 손을 댄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마르크스경제학에 대한 나의 메스는 다른 부위를 향할 뿐 이 부위는 절대 손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참에 반드시 알리고 싶다.
자주 오는 이웃과 페친 중 내가 주류경제학자가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진화적) 제도경제학자’라고 자주 말하는데, 이들의 인문학은 무엇인지 이제 궁금해지실 게다.
과학은 관념론을 배격한다. 제도경제학도 과학이다. 그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물질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물질 없이 살 수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며, 등이 따습고 배가 불러야 다른 걸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짐승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건 짐승이든 인류든 모든 ‘동물’의 일반적 성격일 뿐 호모사피엔스의 특성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물질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할 수 있고, 물질로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문화적 존재(Homo culturalis)’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물질과 문화로 산다.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적 존재(human being)이다. 제도경제학자들은 인간의 ‘좋은 삶’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에는 물질과 같은 토대(Basis)는 물론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Überbau)도 포함되며, 양자는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 좋은 삶은 어떻게 달성되는가? 물질과 문화가 ‘함께’ 그리고 ‘적절히’ 조달될 때 가능하다.
몇몇 욕망의 전사를 제외한 대다수 인간은 ‘좋은 삶’을 꿈꾼다. 앞에서 언급한 ‘비자발적 유물론자’ 역시 그렇다. 가진 게 너무 없으면, 게걸스럽고 염치없이 행동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어 충분히 이해되고 남는다. 이들은 아무리 가져도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다. 적절한 양의 물질로 대부분 만족하고, 그 대신 더 가치 있는 문화적 삶을 지향한다. ‘인간다운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에서 ‘누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자. 상위 1% ‘슈퍼리치’들의 삶은 물질로 차고 넘친다. 그들에게 물질은 공기만큼 흔하다. 많은 것들이 쓰레기처럼 버려야 할 정도다. 그래서 과시와 낭비로 내다 버린다. 즐길 문화도 너무 많아 식상하다. 독주, 스와핑섹스, 마약, 도박, 남 괴롭히기로 넘어가야 즐겁다!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위 10%의 고소득자는? 이들은 ‘좋은 삶’을 적절히 누리고 있다. 교육과 여행, 영화 한 프로는 기본이고, 예술회관에서 베토벤과 쇼팽을 듣고, 피카소를 감상한다. 아, 인생은 아름다워라! 안락한 삶에 취해 옆도 돌아보기 싫다. 이들 주위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정신이 잔잔히 흐른다.
상위 20~30%에 해당하는 중상위계층은 그보다는 못해도 크게 아쉽지 않다. 엄청 비싼 연주회나 공연에는 못 가도 집 안에서 CD나 MP3로 고전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인문고전과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성찰할 여유도 없지 않다. 먹고살 만하니 시민 정신을 고취하는 일과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도 참여해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다. 동병상련이라고, 나보다 못한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친다.
하지만 그 이하 중하위계층의 삶은 그런 삶과 상당히 멀다. 물질은 항상 빠듯하고 문화는 잡힐 듯 말 듯 저만치 서 있다. 무리하면 영화 한 편 정도는 볼 수 있고, 피서철 가족캠핑 정도는 가능하다. 그걸 통해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해소되지만, 비정규직이 가하는 결핍과 불안은 나를 항상 위협한다. 정의? 알고 있지만 내겐 경황이 없다. 얼굴색은 밝지 못하고 눈은 아래로 감긴다. XX, 내 인생은 평생 이 모양 이 꼬락서니인가?
하위 20%의 저소득층과 빈곤층에게 물질은 상시 부족하다. 삶이 고통이다. 허덕이는 삶이다. 문화적 삶에 대해선 들어 본 적도 없고 내 일이 아니다. 정의? 잘난 체하는 먹물 새끼들의 몽상적 언어일 뿐이다. 씨도 안 먹힌다. 실로 짐승의 삶이다. 중하위계층과 서민 빈곤층은 우울, 불안 그리고 불만의 연속이다. 분노로 인해 폭발 직전이다. 잘못 건드렸다간 화를 당하니 할 수 있는 한 피해야 한다. 그러니 점점 고립된다.
이들의 삶은 왜 이리 나쁠까? 상위 1%가 물질과 문화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곤층의 나쁜 삶에 대한 근원이다. 하위 20%는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흥부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욕망의 전사와 그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시장과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그들은 흥부를 벗어날 수 없다. 인생이 점점 꼬여만 간다.
악을 써도 안 되니 악이 받칠 수밖에! 복수하고 싶으나 방법이 별로 없다. 못 배웠으니 말을 잘할 수도 없고 글로 쓸 수도 없다. 그러니 말끝마다 욕이다. 힘이 없으니 싸울 수 없다. 상위 1%의 큰놈과 맞붙자니 얻어맞아 죽을 게 뻔하다. 게다가 그놈들은 항상 저 멀리 그리고 저 높은 곳에 있다.
결국 끓어오르는 분노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약한 자에게 향한다. 왕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누굴까? 중하위층에겐 빈곤층이 약자고, 후자에겐 가난한 나라에서 와 ‘국민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외국인이 약자다. 게다가 내 일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이니 월급은 자꾸 내려간다. 택도 아닌 놈이 내 나라에 침입해 와 나를 못살게 굴고 있다. 요놈들은 쫓아내야 한다. 국민국가의 명확한 구획정리가 필요하고, 민족의식, 애국심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나의 문화는 민족주의(nationalism)와 애국주의(patriotism)다! 트럼프의 노동자들이다.
CNN 출구 조사에 의하면 실제로 트럼프는 중하위층과 저소득층에 속한 저학력 백인 남성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들을 감동시킨 문화는 외국인 혐오주의와 미국우선주의, 곧 민족주의와 테러리즘의 위협이다.
하지만 외국인은 미국 사회의 하위계층에만 ‘침입’하지 않는다. 미국의 첨단산업 분야는 외국인 없이 존립하기 힘들다. 대학도 그렇다. 대학의 교수와 연구소는 다수의 외국인 지식인으로 채워져 있다. 대학의 학생 중 거의 30%가 외국인이다. 이들은 미국의 저소득층 일자리와 경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자리를 창출한다. 외국인은 미국경제의 결과를 도둑질해가는 존재가 아니라 미국경제와 사회의 버팀목이다.
하위계층의 영역으로 들어가 보자. 외국 이주민들이 취업하는 곳은 청소, 서빙, 잡일, 일용직, 비숙련 부분 등 대부분 허드레 일자리다. 내국인들이 애초부터 거들떠보지도 않던 분야다. 서로 마주치지 않으니 내국인들이 이 분야에서 외국인노동자와 경합해 본 적이 없다.
미국 사회에서 외국인들은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가? 답은 이렇다. 중저소득 저학력 백인 남성들이 진입할 수 없는 곳과 그들은 처음부터 가고 싶지 않았던 곳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삶은 왜 이다지도 팍팍한가? 노력의 결과를 누군가로부터 착취당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상위 1% 탐욕의 전사들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고액의 임금을 받아 안락에 취해 있는 상위 10%의 고소득층 ‘노동자’들이다.
진짜로 싸워야 할 대상은 외면하고, 애먼 사람 잡고 난리다. 왜 그런가? 첫째,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지하니 상위 1%가 조작해 놓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와 같은 헛된 감성에 쉽게 자신을 팔아버린다. 그리곤 엉뚱하게 그들의 호위무사로 돌변한다. 완장 차고 성조기 흔들며 자기보다 조금 사정이 나은 중상층 이웃을 비난한다. ‘진보적 지식인’과 ‘깨어 있는 시민’들을 조롱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즐긴다’. 둘째, 항시적 패배로 인한 좌절감 때문이다. 열패감을 이겨내는 방법은 누군가를 이겨보는 것이다. 강자와 상대하면 항상 패하니, 외국인을 가장 약한 자로 선택해 테러를 가하며 짓밟는 것이다.
최강자에 대한 굴종, 이웃에 대한 질투, 지성에 대한 조롱, 약자에 대한 복수! 인간적인 삶과 좋은 삶과 거리가 너무 멀다. 짐승의 삶과 나쁜 삶이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는가? 그들 스스로는 이를 이겨낼 수 없다. 결국 ‘진보적 지식인’과 ‘깨어 있는 시민’이 져야 할 짐이다.
어떻게 짐을 져야 하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경계하면서 ‘우리 안’의 상위 1%와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동시에 상위 10%의 성찰을 촉구해야 한다. 그리고 40~50%의 중하위층과 연대하며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나아가 하위 20%에 대해서는 제도를 통해 물질에 대한 분배정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욕을 들어먹더라도 그들을 문화적으로 ‘계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생에 뭔 죄를 졌다고 이런 짐을 져야하는가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로 결단한 이상 스스로에게 책임져야 한다.
외국인 배척과 반테러법보다 ‘우리 안’의 것에 대한 정치적 참여, 문화적 활동을 통해 70%에게 좋은 삶이 부여될 수 있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사기꾼 트럼프의 굴레를 벗어나 좋은 삶에 이르는 방법이기도 하다. 입만 열면 ‘종북좌빨’을 되뇌는 우리 안의 일베와 태극기세력에도 하고 싶은 말이다. 일베와 태극기주의자들은 트럼프의 노동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물론적 경제학자’들도 함께 생각해 보시길.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