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Intel)은 수십 년째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회사일 뿐 아니라 CPU와 기타 컴퓨터에 필요한 핵심 부품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IT 회사입니다. 따라서 인텔의 역사는 사실 현대 컴퓨터의 역사와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컴퓨터의 역사가 인텔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반대로 인텔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인텔: 끝나지 않은 도전과 혁신』은 인텔 트리니티 (삼위일체)라는 제목을 출간된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인텔 트리니티는 앤드 그루브, 로버트 (밥) 노이스, 고든 무어 세명으로 인텔을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은 세 사람을 중심으로 인텔의 역사를 설명한 책입니다. 인텔의 긴 궤적과 역사 때문인지 모두 다 합쳐 600페이지가 넘는 상당히 두꺼운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인텔에 몸담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전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자료를 수집했고 인텔의 주요 전현직 임직원과 상세한 인터뷰를 통해서 인텔의 설립 이전부터 실리콘 밸리의 역사를 재구성했기 때문에 내용의 충실도와 정확도 면에서 상당히 신뢰할 만 합니다.
인텔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하면 초창기 실리콘 밸리 기업으로 불리는 페어차일드에서 독립한 과학자들이 (이들을 페어칠드런이라고 불렀음) 1968년 회사를 설립한 것이 기원입니다. Intel이라는 명칭은 Integrated Electronics에서 앞글자를 따서 만들었으며 초기 중요 멤버는 무어의 법칙을 주장한 고든 무어와 IC 회로의 개발자인 밥 노이스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헝가리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앤드 그루브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인텔이 겪었던 초기 역사에 대해서 전례 없이 상세하기 적었을 뿐 아니라 당시 인텔이 겪었던 고난에 대해서도 잘 기술했다는 점입니다. 인텔은 현재 대적할 상대가 없는 독점 기업의 대명사이지만, 당연히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인텔은 여러 차례 회사가 매각되거나 혹은 파산할 위기를 겪었으며, 여러 위기를 극복한 후에야 지배적인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점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텔이 시장 지배적인 기업에 오르기까지 인텔 3인방은 다른 분야에서 서로 기여를 했습니다. 고든 무어와 밥 노이스는 회사 창립의 핵심 멤버일 뿐 아니라 회사의 대표로 통했습니다. 고든 무어는 연구 개발을 담당하고 밥 노이스는 과학자 출신답지 않게 사업 수완을 발휘해서 대외적인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앤디 그루브 (1979년부터 2004년까지 인텔 CEO)는 실제 회사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세 사람의 다른 성격과 업무 담당은 사실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도 해도 상당히 적절한 배치였습니다. 고든 무어는 철두철미한 과학자로 유일한 취미는 광물을 채취하는 것이었으며 그 외에는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계약을 맺는 것은 호인이었던 밥 노이스의 몫이었습니다. 밥 노이스는 다른 기업에서도 인기가 워낙 좋아서 스티브 잡스나 제리 샌더스 (AMD의 창립자)의 대부라고까지 불리던 인물이었습니다. 직원들을 닥달하고 싫은 소리를 하는 역할은 앤디 그루브가 주로 담당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인텔이 겪은 수많은 위기와 각 제품과 기술 뒤에 있었던 숨어 있는 역사를 밝히고 있는데, 흥미로운 사례 가운데 하나는 AMD의 클론 칩에 대한 것입니다.
흔히 AMD의 x86 클론칩의 시작을 1982년 IBM PC 시절로 알고 있고 저도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인텔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클론 칩을 생산한 것은 그보다 더 이전이었습니다. 1976년 제리 샌더스는 인텔의 8086 칩을 역설계 방식으로 생산해서 복제품을 내놓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앤디 그루브는 바로 소송을 걸어 중단시키려 했지만, 여기서 사람 좋은 밥 노이스가 제지합니다.
밥 노이스는 AMD가 작은 회사에 불과해 인텔의 위협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차라리 라이센스를 주어 2차 생산 업체로 만들자고 설득합니다. 앤디 그루브는 어쩔 수 없이 이 지시에 따르긴 했지만, 나중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앤디 그루브의 판단이 옳았던 셈이죠. 동시에 매사를 원만하게 처리하려는 밥 노이스가 인기가 많았던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흥미로운 실리콘 밸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IT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한번 읽어보면 좋을 책입니다. 나름 흥미로운 독서가 된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