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농수산물 도매시장인 서울 가락시장은 밤에 살아난다. 청과직판상인은 새벽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납품업자들은 아침 영업시간 전에 새벽시장을 찾는다. 상인들은 납품업자들보다 먼저 시장에 나가 채소와 과일의 신선도를 살핀다. 그들의 일과는 다음 날 오전 11시쯤에야 끝난다. 집으로 돌아가 잠만 자고 오후에 나와 다시 장사를 준비한다.
지난 9월 29일 아침 9시. 녹색 조끼를 입은 300여 명 가락시장 청과직판상인들이 서울 송파여성문화회관 6층 대강당에 모여들었다.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 상인들 얼굴은 조끼에 노란 글씨로 새겨진 ‘단결’, ‘투쟁’과는 딴 세상 사람들처럼 보였다.
눈빛만은 반짝인다. 가락시장은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다. 그사이 시설이 낡고 유통질서도 복잡해졌다. 2009년 ‘디자인 서울’의 일환으로 현대화사업이 시작됐고, 1단계로 직판상인들이 입주할 가락몰이 지난해 2월 완공됐다.
그러나 농수산식품공사에 따르면, 청과직판상인 전체 661명 중 318명이 가락몰 이전을 거부하고 있다. 상인들은 8월 18일 출범한 다자간 협의체가 5회에 걸쳐 진행한 회의 결과를 듣기 위해 새벽 장사를 중단하고 왔다. 공사와 상인 사이 갈등을 조정하는 협의체가 구성되기까지 서울시의회 김진철 의원과 맹진영 의원의 도움이 컸다. 김 의원은 망원시장 두부 장사를 할 당시 홈플러스와 갈등을 빚은 경험이 있다.
미루다가 더 힘들어진 갈등조정
협의체는 상인들이 가락몰 지하로 이전하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청취하고, 존치 타당성을 논의했다. 상인 측이 제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기존 지상 상권 침해
- 상인 의견 배제한 층별 배치
- 영업 현실 반영 못 한 도소매분리
- 이원화한 상권 문제
- 가락몰의 소매 영업형 구조
- 공사의 귀책사유로 발생한 매몰 비용 미해결
정정식 청과직판협의회 자문위원장은 “상인들은 건설 기본계획을 변경해 존치 또는 대체 부지 확보를 원한다”며 “이 문제는 개설자인 서울시가 직접 나서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조합원이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달라”고 상인들의 요구사항을 전했다.
조정은 당사자 간 의견 합치가 돼야 이뤄질 수 있다. 서울시에서 나온 홍수정 갈등조정과장은 “아무 대책도 없던 공사가 이제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구나 하는 정도로 봐달라”며 ‘공사’란 말 한마디에도 술렁대는 상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공사 측이 내놓은 대안을 소개했다. 공사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제안했다.
- 복잡한 물류문제 해결
- 가락몰 인근 물류작업장 신축
- 전기 삼륜차 구매비용 최대 50% 지원
- 상인 부담의 냉장시설 설치 임대방식으로 전환
- 지상층 잔여시설 입주기회 부여
- 판매처 다양화 및 확대 방안 모색
- 임대료 최대 50% 감면 검토 등
홍 과장은 “오늘 설명회를 마지막으로 협의체 운영은 종결된다”며 “협의체를 통해 서로 마주 보고 대화했던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진철 서울시의원의 말은 다르다.
공사 나름대로 애로사항도 있긴 있습니다. 물론 공사가 처음 현대화사업을 할 때 정신 차리고 잘했으면 이런 문제가 없었겠죠. 어찌 됐거나 그때는 그때 논리대로 위에서 시키는 대로 이분들도 좇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온 거 같아요. 그렇다고 생존권과 관련된 문제를 상인들이 무조건 떠안고 가기에는 너무 부담되는 거죠.
김 의원의 말에 상인들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꾸벅꾸벅 졸던 상인들도 눈을 번쩍 뜬다. 오전 11시, 이전 같으면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쉬어야 할 시간이다. 상인들은 졸다가도 ‘이전’이란 말에 눈빛이 흔들렸고, ‘공사’라는 말에 말도 말라고 불만을 터뜨렸으며, ‘존치’를 주장하는 말에는 박수를 치며 동조했다.
‘공사 < 서울시 < 농림부’의 역학관계
농수산식품공사측은 기본계획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니세 임대관리팀장은 “국가 예산이 들어가는 정책사업의 최종 의사결정자는 농림부”라며 “서울시와 공사가 가락시장 현대화사업 실행계획을 제출해 승인받아놓고 수정·보완이 아니라 대체 부지를 만들거나 존치를 위해 기본계획을 수정해 달라는 건 현대화사업을 안 하겠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공사는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입주를 미루고 있는 조합원에 대해 명도소송을 진행하는 등 강경 대응을 해왔다. 청과직판상의 이전이 무한정 지연되면 현대화사업 2, 3단계 진행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요청을 받은 서울시는 다자간 협의체 운영을 통해 청과직판상 이전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겠다는 방침이다. 송임봉 서울시 도시농업과장은 노량진수산시장과 가락시장 같은 현안들이 겹쳐 고민이 깊다.
어제와 그제는 노량진수산시장에서 밤늦게까지 회의를 했습니다. 오늘도 여기 오니 날마다 갈등의 현장 속에 뛰어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저 자신도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건설 기본계획을 변경해 청과직판을 존치할 가능성을 검토해달라는 것은 노력은 하겠지만 뒤집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서울시가 나서는 정책적 해결 방안을 많이 요청하셨는데, 저는 법 테두리 내에서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이 답변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상인들은 ‘가락몰’에서 죽음을 본다
상인들은 가락몰을 보며 청계천 가든파이브의 몰락을 떠올린다. 약 30년간 도매 중심의 영업을 해온 이들에게 소매 영업구조인 가락몰은 사지나 다름없다. 이들은 공사가 앞자리 상인, 노점상 등 상권 내 불법행위를 정비하고, 직판상인이 중도매인에 비해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는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지적한다.
중도매인은 도매시장 법인에 상장된 물품의 경매에 참여해 농수산물을 구입한다. 이들은 대형유통업체로부터 주문을 받으며 나머지 물량은 소매상에게 판매한다. 한편 직판상인은 시장 내 중도매인으로부터 농수산물을 구입해 소매상과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연근·우엉·마를 직판하는 박제수(68) 씨는 직접 경매에 참여하는 중도매인에 견주어 직판상인의 가격경쟁력은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기 상인들 누구도 거기 가서 장사 잘되겠다고 믿는 사람 없습니다. 가든파이브 어떻게 됐습니까? 청계천에서 장사 잘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먹고 사는 데 아무런 하자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가든파이브에서, 옥상에서 몇 사람이 떨어져 죽었는지 아십니까? 우리 보고 무조건 들어가라? 가든파이브 끝장나는 거. 그걸 우리가 감수해야 한다고요?
박원순 서울시장님이 가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치를 해줘야 합니다. 만약에 2, 3단계 사업을 한다면 어느 한 쪽으로 공간을 확보해서, 가건물 형태라도 좋습니다. 지상에서 비를 맞으면 비를 맞고 장사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장사하면 되는 겁니다. 시원한 에어컨 필요 없습니다. 따뜻한 열풍기 필요 없어요.
지상에서 장사하게 해달라. 거기서 지금처럼 영업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누구를 위한 시설현대화인가
가락몰이 완공된 시점에서 청과직판 상인들이 이전을 거부하는 이유는 뭘까?
새벽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가락몰의 소매영업 형태를 알지 못했다. 청과직판이 지하 1층에 배치됐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청과직판협의회 지상도 부회장은 “재작년 3월에야 알았다”며 “공사하고 박영태 전 조합장하고는 2013년 3월에 층별 배치안에 사인을 해놓고도 조합원들에게는 숨겨왔다”고 말했다. 상인들에게는 “결정된 바가 없다, 반대하면 안 가겠다” 등의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지 부회장은 가락몰로 이전할 자리를 배정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공사는 현대화 사업을 위해 2010년부터 “임대상인 ABC종합평가제”를 만들어 매달 상인에게 점수를 매겨왔다. 점수가 높은 순으로 가락몰 자리를 선정하도록 했다. 상인들은 평가제를 ‘노예제’나 ’노비문서’라 부른다. 가락시장에 대한 기여도 평가가 얼마나 오랜 기간 장사를 해왔는지보다는 부의 수준에 따라서 이뤄진다는 데 따른 불만이다.
그러나 상인들은 계약상 을의 위치에서 따를 수밖에 없다. 공사는 가락몰 이전의 효율성을 위해 평가제로 점포 간 통합을 장려했다.
ABC평가제라고 하는데요. 첫 번째가 규모, 쉽게 말하면 가게가 한 칸이냐 두 칸이냐 세 칸이냐에 따라서 점수를 매겼어요. 두 번째로는 관리비를 체납한 사실이 있는가? 그런 거였고. 세 번째가 고객만족도, 곧 고객에게 어떤 불편을 일으켰거나 민원이 들어왔을 때 어떻게 처리했느냐는 겁니다. 하나씩 따져보면 가락시장이 30년 됐잖아요. 그러면 가락시장에 얼마나 오래 영업을 했느냐부터 따져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한 칸을 가지고 있지만 30년 동안 여기서 장사를 했어요. 어떤 분은 1년도 장사를 안 했지만 가게 10칸을 샀단 말이에요. 돈이 많아서, 장사를 안 하고 있는데. 근데 나는 가게 한 칸이니 1점을 주고, 장사는 안 하지만 가게는 10칸이니 10점을 주고.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거죠.
“법을 통한 배제는 소리 없는 폭력”
서울시가 구성한 협의체의 갈등조정 원칙은 3가지였다. 합법인가? 법에 근거해 약간의 재량권을 발휘한다면 사회가 수용 가능한가? 형평성이 맞는가?
5회에 걸쳐 이뤄진 협의체는 활동이 종료됐다. 송임봉 도시농업과장은 농수산식품공사 유통본부장과 사장 등 결정권자들이 참여하는 ‘끝장토론’을 제안했다. 그러나 상인 측은 공사를 포함한 협의체의 끝장토론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정 위원장은 “송 과장님이 의견 주신 것은 책임 전가, 책임 회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지금 상인들이 식사할 곳이 없어 간이휴게실이라도 만들어달라고 했으나 공사는 감감무소식”이라고 불신을 표했다.
상인들에게 공사는 ‘불통’의 아이콘이다. 공사는 상인들과 대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권한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공적 기관으로서 상인들의 협조를 유도할 수 있지만, 계약상 갑의 위치에서 상인들 요구에 무조건 양보할 필요가 없었다. 상인들에 견주어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강제력까지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미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는 “도시재생의 개념이 이전과 달리 강제 철거 방법은 아니지만, 규범화·표준화해 집행되는 것이 문제”라며 “법이라는 정당성을 통한 배제는 소리 없는 폭력”이라고 지적한다. 가락시장 시설현대화사업에 대해서는 “비효율이 발생하는 유통절차의 간소화라는 목표가 있고, 시장을 투명화하려는 노력”이라면서도 “핵심은 배분구조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는 것인데, 공사가 시장 내 이해관계 조절을 못 해서 가장 약한 고리가 손해를 보고 빠져나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두 개의 거대한 관성이 충돌한다. 30여 년간 한 자리에서 삶의 양식을 쌓아온 상인들. 그보다 더 오랜 기간 일방적 정책 결정을 해온 정부 관료들.
상인들은 지금 자리에서 영업을 계속하게 해달라며 기존시장에 대해 임차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냈지만 지난 1월과 7월 열린 1심과 항소심에서 잇달아 졌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라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가락시장 현대화사업 과정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배제돼왔다. 이들은 수십 년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는 것일 뿐이다.
제가 이 싸움을 재작년부터 준비했어요. 연세 드신 어머니, 아버지한테 말씀을 드렸어요. 자본주의 사회다 보니까 여기서도 경쟁이 있네요. 도태되기도 하고 정리하고 나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다만 현대화사업을 하는 공간 속에서, 배추 몇 포기를 팔고 계시는 분들이 소외되거나 고통받는 게 아니라 상생하고 공존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현대화사업 이후 그분들이 떠나고 안 떠나고는 선택이에요.
최소한 현대화사업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해야 하고 충분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통인을 포함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아우를 수 있는 시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가락시장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물량이 집중되고 분산되는 곳이잖아요.
원문: 단비뉴스 / 작성 : 박희영 기자 / 편집 : 김평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