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간증을 참 좋아한다. 교회에서 인기 있는 간증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잘나가는 신앙인’을 초청해서 자신이 ‘신앙’을 통해 어떻게 성공하고, 어떻게 부자가 되고, 어떻게 유명해졌는지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한다. 이런 류의 간증에 감동받기 좋아하는 신앙인들의 마음에는 어쩌면 이런 심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신앙을 가지면(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명해지고, 성공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어.
모든 간증을 그런 심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성공하고 유명한 이들의 간증을 소비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독교인의 마음속에서 저런 ‘욕망’을 읽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신앙’이 추구하는 ‘희생과 이타적 사랑’의 방향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런 간증을 들으며 고생스럽게 살지 않아도 ‘편하고 그럴듯하게’ 신앙적으로 인정받는 ‘다른 방법’이 있음에 안도한다. 다시 말해 신앙을 가졌다고 꼭 가난하게, 꼭 희생적으로, 꼭 정의롭게, 꼭 고통받는 이웃을 챙기며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 당신이 만약 비신앙인이라면 어떤 사람을 통해 신의 존재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올까?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성공의 원인이자 목적으로’ 하나님을 간증하는 능력 있는 사람과 비록 잘난 것이 없고 부족해도 그늘진 고통의 길을 동행하며 친구가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통해 더 신의 사랑과 존재를 느낄까?
아마도 내가 비신앙인이라면 그늘지고 고통받는 곳에서 함께하며 기도하는 사람들, 희망을 볼 수 없는 곳에서 위로를 주고 서슬 퍼런 분노와 슬픔의 현장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을 통해 ‘신의 임재와 존재’를 느낄 것이다.
나는 대학 때 신앙을 갖게 된 후 꽤 오랫동안 하나님께 인생을 온전히 헌신한 사람들과 함께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큐티하며, 전도도 열심히 하고, 밤늦게 믿음의 형제들과 기도하는 가운데 종교적 열심과 헌신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냈다. 누구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경건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니 그건 커다란 나의 오만과 착각이었다.
내 신앙에는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있었는데, 이 사회의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으며 타인의 비명에 귀를 닫고 좁은 신앙의 영역에 갇혀 교회 밖 세상의 고통받는 이웃의 문제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교회 안의 부조리를 알게 되고, 사회의 불의와 모순에 눈을 뜨게 되자 그제야 고통받던 이웃들의 삶이 ‘잠재적 전도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사랑하고 관심 가져야 할 ‘이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외면했던 이 땅의 어두운 그늘로 찾아가 마음 아프고 억울한 이들이 세상의 부조리와 잔인함에 희생당하며 맞서고 있는 현장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연대했다. 그곳에서 그 어떤 종교적 헌신을 통해서도 체험하지 못했던 뜨거운 신의 임재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년 전 교회 후배들과 함께 6년이 넘게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조직적으로 해고하고 탄압하고 있는 교육 기업 앞에서 그분들을 위한 촛불 기도회에 참석했다. 기도회가 끝나고 노조 대표가 나오셔서 눈가에 눈물이 가득한 채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기도회에 나온 누군가가 저들을 부당 해고하고 탄압한 회사의 회장도 교회 다닌다는 말을 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봤더니 그는 개신교인이라면 알 만한 유명한 신앙 서적을 쓴 저자였다. 그의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나 서울00교회에서 보낸 1년 동안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홈페이지의 글을 읽다가, 성도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 듣다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 양병무, <감자탕 교회 이야기>(포이에마) 중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날 거리 기도회에서 그로 인해 6년이 넘게 고통받고 있던 분들의 고단한 마음과 비통한 눈물을 보았다. 그에게 그들의 눈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걸까? 교회 안에서는 감동과 은혜의 눈물을 흘리는 교인들이 사회 속에서 냉혹한 지옥을 만들어 가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부 기독교인의 잘못, 일부 교회의 잘못이라기엔 너무나 광범위하게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개신교의 현실이다. 이는 결국 가난하고 고생스런 예수의 길을 따르기보다 화려한 세상의 열매로 자신의 신앙을 합리화하는 길을 따른 한국교회가 거둔 열매일 것이다.
예수의 발자취를 좇는 것은 쉽지 않다. 그 길은 화려한 예배당, 압도적인 영광, 감동적인 간증, 수많은 추종자의 박수와는 거리가 먼 길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나를 따라오려고? 아마 쉽지 않을거야. 그 길은 고생스럽고 좁아터진 가시밭길이거든. 너에게 주어진 꽤나 무거운 십자가도 지고 따라와야 한단다. (마태복음 7:14, 누가복음 9:23)
풍요와 번영에 취해 권력을 가진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지금도 줄기차게 삽질을 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이 시대에, 어쩌면 하나님은 예수처럼 사람들이 외면하는 ‘세상의 그늘과 좁은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사랑과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시편 23편의 말씀이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시편 23:4 새번역)
하나님은 죽음의 그늘 골짜기에서조차 나와 함께하시며, 나에게 힘을 주시고, 보살펴 주신다고 다윗은 노래했다. 결국, 하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시편 23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너희에게 그러했듯 너희들이 걸어가야 할 곳은 화려한 도시의 성전이 아니라 죽음의 그늘 골짜기란다.
이 시대 죽음과 절망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한국교회는 얼마나 그들을 향해 다가가고 보살피고 있을까?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이자 성공회 사제이기도 한 존 폴킹혼은 신앙과 고통 가득한 세상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통과 하나님의 관련성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저 높은 곳에서 고통 가득한 이 ‘이상한’ 세상을 내려다보며 동정하는 관찰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이 땅의 고난에 동참하는 하나님, 인간과 함께 고통당하는 참된 친구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지만 분명 제가 믿는 진리입니다. 이런 층위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가진 종교적 신념의 가능성 또한 이 층위에 근거합니다.
– 존 폴킹혼 외 공저, <도시의 소크라테스>(새물결플러스) 중
고통 가득한 이 세상을 외면한 채 자기 교회의 안위와 번영만을 추구했던 한국교회는 도시마다 수많은 붉은 네온의 십자가로 채웠지만 사회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은 철저히 실패했다.
이제라도 돌이켜 세상의 그늘과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 걸어가는 교회와 신앙인들이 더 많이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그들의 헌신으로 이 세상은 더디지만 살 만한 곳이 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살아 계심과 세상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원문: 뉴스앤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