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이소룡의 사망과 [사망적유희]
1973년 7월 20일 리얼리티 액션 영화의 선구자이자 영원한 액션 영화의 아이콘 이소룡(李小龍, Bruce Lee)이 사망했다. 지금은 액션 영화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제이슨 본의 리얼리티 액션도, 아마 이소룡이 없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거라는데 500원을 건다. 그의 사망과 동시에 그가 만들고 있던 궁극의 쿵후 영화인 [사망적유희] 역시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이후 남아있는 필름과 대역을 기용한 재촬영 등을 통해 1978년이 되어야 영화는 어영부영 완성된다. 하지만 [사망적유희]가 아니라 [사망유희]란 제목으로 개봉된 이 영화는 사실상,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를 억지로 의자에 앉혀놓은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20여 년의 시간이 흘러, 모두가 이 영화의 존재를 잊어버렸던 1994년 가을, 기적이 일어난다. 이소룡의 자료들을 검토하던 중 무술 안무를 모두 기록해놓은 자료와 스토리라인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촬영된 분량이 훨씬 많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소룡이 사망한 지 무려 29년이 지난, 2002년 어느 날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난다. 촬영되었던 35밀리 필름 원본이 발견된 것이다! 이후 이 필름은 [Warrior’s Journey(전사를 찾아서)]라는 다큐에 수록되어 공개된다.
B. 노가다 도전
[전사를 찾아서] 버전에 수록된 [사망적유희]는 그 자체로 완벽한 버전에 가깝다. 액션의 구성과 등장인물 간의 합은 더는 완벽할 수가 없다. 그런데, 비록 “코마(혼수상태)” 버전이긴 하지만, 화질과 색감은 [사망유희]의 그것이 훨씬 뛰어나다. 그래서, 이 두 버전을 한곳에 모아보기로 했다. 비록 이 둘은 해상도도 서로 다르고, 심지어 프레임 수도 다르지만, 디지털 세상에서는 모두 극복할 수 있다. 단지, 노가다만 하면 된다. 노.가.다.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두 버전을 모두 펼쳐놓은 뒤에 프레임 그룹을 나누고, 사용할 프레임 그룹을 각 조각별로 지정하면 된다. 그리고, 해당 범위의 프레임율을 변경해서 삽입하면 된다. 프레임율을 변경할 때는 AVISynth의 함수 중 AssumeFPS()와 ChangeFPS()를 사용하는데, 이 방면에선 전지전능한 수준을 보여준다.
별도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생각도 했지만, 액셀 하나만으로 필요한 일을 다 할 수 있어 패스. AVISynth 스크립트엔 [전사를 찾아서] 버전의 밝기를 조절하는 코드를 삽입해서 최대한 비슷하게 바꿔봤다. 그런데, 사실상 별로 안 비슷하다. OTL…
다 모은 결과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완벽에 가까운 액션을 더 나은 화질로 볼 수 있다니! 비록 원본에 따라 화질이 갑작스럽게 변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지만, 뭐 어떤가. 이소룡인데!
C. 기타 작업하며 느낀 단상들
1. 주인공의 이름은 빌리 로가 아니라 타이 티엔. 빌리가 뭐냐? 빌리가? 잦이냐??? 아예 존슨이라고 하지 그랬냐!
2. 탑에 올라가는 건 혼자가 아니라 세 명임. 같이 올라가는 두 명은 동료이자 경쟁자로 굉장히 역동적인 느낌을 주며, 유쾌하기도 하다.
3. 같은 장면을 두 번 찍은 장면이 꽤 많았음. 결국, [사망적유희]와 [사망유희]가 같은 장면이지만, 따로 찍힌 장면은 [사망유희] 버전을 쓸 수 없었다. 즉, 이소룡은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촬영했는데, 그 중 완벽한 버전들이 두 개 이상인 경우도 있다.
4. [사망유희] 버전에선 [사망적유희] 버전을 확대해서 편집한 경우가 종종 있다. 같이 올라간 두 명을 지우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런 장면의 영상은 좀 어색하다.
5. 같이 올라가는 두 명은 적대적 동료 또는 경쟁적 동료 수준인데, 이를 통해 웃긴 장면이 연출된다. 티에 위엔이 뜬금없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장면은 긴장된 액션에서 호흡을 고르게 해주는 개그 씬이다.
6. 그런데, 제임스 티엔이 올라가면서 5번의 장면이 갑자기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부분도 굉장히 훌륭했다. 몇 분 되지 않는 사이에 같은 장면에서 다른 느낌을 준다니.
7. 이 영화의 주옥같은 액션 중에서도 “덩크슛” 씬은 특히 굉장한 느낌이었다. 약점이 없는 완전체는 도망도 허락하지 않았다.
8. [전사를 찾아서]를 보면 영화에 쓰이지 않은 연습 필름을 몇 장면 보여준다. 그런데, 이소룡은 물론이고, 카림 압둘 자바 역시 영화보다 더 빠른 액션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버전을 안 쓴 이유는 “너무 빨라서 관객들이 못 볼 것 같아서”이다. 이소룡 제자들의 움직임이 굉장해졌었다는 평가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9. 한두 부분은 필름을 거꾸로 돌려 편집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프레임을 역순으로 돌리자 원본과 같은 시퀀스가 나오는 부분이 있었다.
10. 언제나 그렇듯이 이소룡 영화에서는 영화배우가 아니라 무술가들이 액션을 찍었다. [사망적유희]에는 두 명의 한국 무술가가 출연할 예정이었다. 황인식 씨와 지한재 사범. 황인식 씨는 1층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촬영되지 못했고, 지한재 사범만 촬영되었다. 황인식 씨는 발차기가 뛰어나 발차기 고수로 나올 예정이었는데, 아마도 태권도 고수라는 컨셉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건 두 분 모두 “합기도” 유단자라는 점.
11. 지한재 사범은 최초에 [사망유희]에서 자신의 출연분량 공개를 반대했다. 합기도의 이름을 떨어뜨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명백한 오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소룡 영화를 보며 특정 무술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소룡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의 훌륭한 무술이라고 생각한다.
12. [전사를 찾아서] 버전 외에 다른 복원 버전을 갖고 있었는데, 찾지를 못하겠다. 이 버전에서는 티에 위엔이 댄 이노산토에게 개차반나게 터지는 장면이 들어있다. 그 장면 역시 압권이다. 정말로 개차반 나게 터지고 채이고 밟힌다.
13. [사망유희] 주제곡은 아카데미 3회 수상에 빛나는, 영원한 제임스 본드 영화의 작곡가 존 배리가 맡았다.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대단히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