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에서 탐사보도의 대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주로 한 사람이 떠오르죠. <시사인>의 주진우 기자. 그렇다면 주진우 기자가 청소년이었고, 밥벌이를 하지 않던 시절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그 때는 한국 언론계가 암흑기였으니 (지금도 그렇지만 말입니다.) 아예 없지 않았을까 싶으시겠지만, 분명 있었습니다. 젊은 날의 그를 본 사람들은 굉장한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죠. 젊은 날의 그 기자는 현재의 주진우조차도 보고 배워야 할 부분들이 많다고 말예요.
바로 조갑제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는 수많은 변절자들이 등장했었습니다. 워낙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의외로 변절자들이 원래 몸 담았던 진영에서 딱히 ‘그 사람 저쪽으로 가서 아깝다’ 라는 말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딱 두 사람 빼고말이죠. 6~70년대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직 참모로 활약했던 엄창록과 기자 조갑제 였습니다. 물론 변절이라는 건 처음 그들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당사자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여하튼 대립하고 있는 진영으로 넘어갔으면 버려야 마땅할텐데, 과거 그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아까워 했을 정도였다니까…
조갑제의 저작물들은, 혹은 인간 그 자체가 흔히 90년대를 기점으로 갈립니다. 정확히는 1987년 이후라고도 하더군요. 90년대 이후로는 현재 저희에게 흔히 알려진 그런 이미지로 정착됐다고 하죠. 반면 기자로서 처음 활약하기 시작한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정상적이라는 개념을 넘어, 그냥 진짜 저널리스트의 책을 찾으신다면 ‘닥치고 봐야하는’ 르포르타주 걸작들을 여럿 써냈습니다.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다루면서도 완성도를 고루 갖추는 경우는 드물죠. 조갑제는 중금속 오염, 석유 비리 탐사, 사형제도와 인권,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정권, 친일파, 고문 기술자, 마약 범죄 등 다양한 한국 역사의 어둠을 들춰내 왔습니다. 미8군, CIA, 북한에서 조갑제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결국 치켜세울 수 밖에 없었다고 하죠.
그러나 현재의 갑제 옹은 다 때려치우고 박정희와 북한 독재자, 북한 인권에만 몰두하고 계십니다. 글솜씨나 세상을 보는 시선 모두가 달라지셨지요. 과거의 걸작들마저도 재판시키지 않고 있고요. (예외적으로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는 재판됐습니다. 아마 조갑제의 현재 포지션에서 피해를 입히지 않을만한 문제라서 그런가 봅니다. 재판을 읽어보지 않았기에 내용이 초판과 달라졌는지는 알지 못하지만요.)
하지만 전자파가 가득한 정보화 시대인지라, 이미 많은 네티즌들이 그 절판된 저작물들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대학생이시라면 학교 도서관 검색해 보셔도 과거 책들이 대부분 지하서고에 보관되어 있고, 당사자가 만든 웹 사이트인 조갑제닷컴에 들어가셔도 글을 읽어보실 수가 있습니다. 다만 갑제 옹이 과거에 쓴 글을 난잡하게 정리해 놓은 탓에 저 같은 경우에는 출판된 책을 구해보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한 달 전 쯤에 갑제 옹이 생산한 걸작 들 중에서 일부를 구매했습니다. 두 권으로 구성된 <유고!> 와 까치출판사에서 출간된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이 그것입니다. 세 권 합쳐 만 원에 샀습니다.
참고로 <유고!>의 경우에는 아직 놔두기만 하고, 다 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에 나온 조갑제의 책이기 때문에 보지 않아도 퀄리티를 믿습니다.
예전에 70년대 유신시절, 박정희 정부가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 라고 발표해서 당시 국민들을 들뜨게 만든 적이 있었죠.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그 양이 터무니없이 적고 실용성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조갑제 기자가 당시에 이걸 취재하여 사실을 밝혀낸 뒤에 <석유사정 좀 훤히 압시다>, <7광구의 대도박> 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이걸로 박정희 정부에게 미움을 삽니다. 결국 당시 몸 담고 있었던 부산 국제신문에서 쫓겨나게 되죠. 그러다 1년 뒤에 복직해서 부산, 마산 항쟁 등을 현장에서 취재하고, 이 내용까지 포함시켜 1987년에 박정희 정권의 부패와 종말을 다루고 있는 <유고!>를 출판합니다. 조금밖에 못 읽었지만 역시 흥미롭더군요.
그럼 제가 다 읽은 책은 무엇이냐. 바로 1992년에 발표한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 입니다. 이 책은 한국 현대사에 대해 깊은 조예를 갖고 계시는 분께 추천 받은 것인데, 처음엔 믿지 못했지요. 왜냐면 조갑제는 2001년 경에 조선일보사에서 8권짜리 박정희 전기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발간한 적이 있으니까요. 이것은 2010년대를 넘어서면서 조갑제닷컴의 이름으로 그냥 <박정희> 라는 이름으로 개정되어 나옵니다. 재출간될수록 권수가 더 늘었습니다. 13권으로 나왔죠. <박정희 전기> 라고 불립니다.
학자들은 주로 <유고!>를 기점으로 조갑제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로 그런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박정희에 관한 많은 사실들은 대부분 조갑제 기자가 발굴한 자료들이죠.
<월간조선>에서 1987년에 박정희에 관한 전기를 연재하면서 평소보다 더 많은 일차적 증거자료들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때 연재는 얼마 못 가 끝났고, 그걸 포함해 훨씬 많은 분량을 찾아다 덧붙여 낸 책이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이라더군요. 조갑제는 이 때 처음 박정희 전기를 기획하게 됩니다. 처음엔 총 다섯권으로 완결할 계획으로 첫 권을 출간했습니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1권만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1권의 내용은 감질나게시리 박정희가 군인 시절에 5.16 쿠데타를 실행하기 직전에서 끝나죠.
음… 이게 만약 개정판으로 나온 <박정희 전기> 의 초안이라면 조갑제는 그 때부터 이미 ‘박정희교 제사장’ 이 됐다는 얘기 아닌가?그 분이 왜 이걸 추천하셨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유고!>야 굳이 추천 없이도 제가 사려고 했던 책이었지만 말이죠. 근데 그 분 평이 이렇더군요.
“조갑제가 박정희교 제사장이 되어서 발간한 전기는 2001년에 조선일보 사에서 출간된 8권짜리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와 2010년대의 개정판인 <박정희 전기> 입니다.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은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아’ 가 남아있을 때 쓴 것이죠. 그러니까 사실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만 보셔도 되고, 이후의 내용은 그냥 다른 저자가 쓴 박정희 정부 관련 서적을 읽으시는 게 더 좋습니다.”
문득 궁금해 졌어요. 생각해보니 저는 2000년대에 출간된 버전의 박정희 전기를 읽은 적이 없거든요. 그 악명을 이미 많이 들었던지라 굳이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므로 도서관에서 13권으로 출간된 <박정희 전기> 1권을 꺼내어 시험삼아 읽어봤습니다. 정말 추천해 주신 분 말씀대로 다르긴 달랐습니다.
갑제 옹이 쓴 책들의 특징은 ‘성실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다’ 는 것입니다. 예, 재미가 없어요. 정말 철저하고 냉철하게 사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구나 싶을 정도에요. 근데 그게 읽다 보면 재미로 승화됩니다. ‘현대사가 곧 판타지’ 이기 때문일 거에요. 까치출판사 판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에는 박정희교의 제사장 감투를 쓰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저널리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뭔가 애널을 더 빨아줄 법도 한데 덜 빨고, 군더더기를 더 추가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습니다.
13권짜리 <박정희 전기>는 정 반대입니다. 까치출판사에서 출간됐던 책에서 더 많은 내용과 증언 인터뷰를 포함하고 있는데, 거기에 독자들의 정서를 움직일 법한 묘사나 사건들을 삽입하는 식이죠. 2014년 판을 읽으면서 놀란 건 조갑제가 ‘소설’ 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영진이 지은 <실록 소설: 청년 박정희>의 한 대목을 가져온 부분이 있더군요.
물론 조갑제의 책을 다 읽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글의 세계를 논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의 르포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자 매력은 기계 같다 싶을 정도의 냉정함인데, 여기에 문학 작품을 인용하는 모습은 처음 본 거죠. 까치 출판사 발매본에서는 못 봤거든요. 때문에 훗날 조갑제닷컴에서 개정한 버전을 읽게 되면 ‘갑제 옹 책인데 재미가 있잖아!’ 라는 충격적인 감정과 마주하게 됩니다. 아. 이게 ‘저널리스트’ 와 ‘박정희 교 제사장’ 의 차이구나 하는 걸 그 때 깨닫게 되기도 하고요.
조갑제가 쓴 박정희 전기의 두 버전에서 발견되는 차이를 예시 삼아 하나 가져와 봤습니다. 1946년 10월 1일에 일어났던 대구 항쟁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대구 항쟁은 사건 발생 이후 계속 ‘대구 10월 폭동’ 으로 불려왔다가, 2000년이 되어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통해 ‘대구 10월 사건’ 으로 불리게 됐죠. 후에 유족들의 건의로 ‘대구 10월 항쟁’이 됩니다.
여튼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 에서는 최소한 당시 이 데모의 시작을 ‘파업’ 으로 규정해주고 있고, 거의 기사를 읽는 듯한 건조한 인상이죠. 반면 아래의 <박정희 전기 1 : 군인의 길> 에서는 거의 문학을 읽는 듯한 표현 방식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파업이 아니라 ‘폭력시위’ 로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살육의 제전’, ‘가족까지 때려 죽이고 찔러 죽이고 찢어 죽이고 찢어 죽였다'(찢어 죽였다 두 번!) 라는 식의 격정적인 표현들이 많이 가미되었습니다.
읽으시면 조갑제 기자의 글쓰기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대충 짐작이 가지요. 전체적으로 1992년판과 2010년대 판본 간에는 이런 차이가 있더군요.
말하자면,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은 조갑제의 ‘마지막 걸작’ 인 셈입니다. 마지막 걸작인 만큼 초반부터 총기를 잃는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유고!>의 서문은 굉장히 서슬퍼런데,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의 서문에서는 뭔가 기분 나쁘게 따뜻해져가는 갑제 옹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근데 읽으면서, 뭐랄까요. 막 갑제 옹의 내면의 전쟁이 연상되고 그럽니다. 박정희교 제사장으로 변해가려 할 때 ‘으아아! 나는 저널리스트 조갑제다! 나는 개인적인 감정보다 사실을 우선한다!’ 외치면서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는 모습이 연상된다고나 할까요. 훗날 나온 개정판 전기를 읽고 이 1992년판을 보시면 더 그렇습니다. 최소한 이 때의 조갑제는 박정희라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모순적이기만 한 인간과 그가 살던 시대를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 지 그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었지요. 그걸 위해 방대한 자료들을 조사하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대기자 조갑제’ 는 끝내 ‘아이고 갑제야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는 갑제’ 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것 참…
p.s. 조갑제는 변해버렸지만 최소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왜곡도 하지 않는다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실제로 ‘당시 광주에 내려가 상황을 지켜보며 진실을 알리려 애썼던 몇 안 되는 경상도 사람’ 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계신 분이지만 뭐, 요즘은 그냥 자기한테 불리하거나 유리해지는 상황에 과거의 명성에 기대고자 5.18을 꺼내오는 것 같더군요. (역시 변절했던) 김문수와 얘기 나눌 때는 5.18에 대한 과거 자신의 주장을 너무 쉽게 뒤엎어 버리시더라구요. 모순투성이 인간들을 고발해 오시던 분이 갑자기 ‘완전체 모순투성이’가 됐다고나 할까요. 여튼 한 대기자의 이런 변화가 그저 씁쓸할 뿐입니다.
원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