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이미 못살게 굴고 있지만, 더 적극적으로 못살게 굴겠다고 말했다는 속보를 접하면서 이 글을 쓴다. 김기덕 변호사의 글에서 시작해보자. 이 글은 현재 도입이 강요되고 있는 임금피크제에 대한 반대 논리를 아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 임금피크제는 무조건 반대해야 하는가?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임금피크제의 이론적 한계
무엇보다 김기덕 변호사의 설명대로, 임금피크제는 전통적인 ‘임금기금(wage fund)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임금기금 이론이 뭐냐면, 노동자에게 돌아갈 임금의 총액은 사회 전체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임금의 전반적 상승은 자본가를 위한 이윤의 전반적 하락이고, 한 집단의 임금상승은 반드시 다른 집단의 임금하락을 수반한다. 이것의 역사는 굉장히 긴데… 마르크스도 틈만 나면 이 이론을 비판했다.
이 이론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것은 인구구조와 경제구조가 꽤 안정적으로 정체돼 있는 농경사회에선 대체로 들어맞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기에 ‘임금’이라는 범주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이를 그냥 ‘보통사람들의 생활비’라고 하면 그 크기는 대체로 주어져 있으리라.
그러나 생산이 자본-임노동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노동자의 임금과 자본가의 이윤이 그 안에서 결정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임금계약을 하기 때문에 임금 크기가 주어져 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계약의 조건과 내용은 양자 간의 힘관계에 따라 언제나 가변적이다.
또한 그러한 임금계약에 입각해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질 텐데, 자본가의 이윤은 ① 생산에서 그가 (주어진 임금수준 하에서) 노동자를 얼마나 쥐어짜내는가, ② 유통과 판매과정에서 시장 상황이 그에게 얼마나 우호적인가 등에 따라 여전히 가변적이다. 즉 이윤이란 임금 크기가 주어지면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변수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상의 사정을 떠올리면, 임금피크제 논의가 기대고 있는 ‘임금기금 이론’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은폐하는 속성이 있다. ① 일정한 이윤율이 위협받는 것은 임금이 높아서가 아니라 경제가 위기에 빠져 자본가들이 원하는 수익률을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고, ② 한 집단의 임금이 낮은 것과 다른 집단의 임금이 높은 것 사이엔 필연적인 관련이 없으며, 양자 간에 일정한 내적 연관이 있더라도 그 사이엔 자본가의 이윤이라는 매우 중요한 매개변수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즉 후자의 경우, “한 집단의 임금을 높이기 위해선 다른 집단의 임금을 낮춰야 한다”라는 논리는 곧 “자본가의 이윤은 적정한 크기를 늘 보장받아야 한다”라는 주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왜 임금피크제 논의가 나왔는지로 돌아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임금피크제를 무조건 반대만 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임금이라는 것도 이윤(잉여가치)만큼이나 철폐해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경제범주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임금피크제가 문제라면, 그렇다면 무조건 임금을 많이 주는 것이 정답인가? 무조건 노동자에게 임금을 많이 주고, 이 임금을 시장에서 마음껏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진보적 대안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것은 임금투쟁의 무용성, 퇴행성 주장이 아니다. 그 한계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은 모든 투쟁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최근 최저임금 투쟁은 좀 더 격렬하게, 그리고 세심하게 밀어붙였어야 했다.)
왜 임금피크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가? 경제가 어렵고, 이 어려운 상황에서 청년들은 고용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는데 장년층은 고임금의 호사를 누리고 있기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그렇다고들 하는 것이다) 때문이다. 김기덕 변호사 말씀대로 청년층과 장년층이 어차피 한 가족인데 한쪽의 임금을 깎아 다른 쪽에 준다는 게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 장년층도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조만간 직장에서 나오게 되면 다시금 이런저런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리거나 자영업 한답시고 안간힘 쓰다가 빚더미에 오를 운명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높은 임금을 받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되는가? 바로 경제가 어렵고 삶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주거불안, 치솟는 교육비, 건강에 대한 걱정, 쌓이는 가계 빚!
이러한 삶의 불안정과 불확실을 줄이기만 해도 우리의 장년층은 꼭 임금피크제가 아니라도 청년을 위해, 어려운 경제를 위해, 임금삭감이든 조기퇴직이든 (또는 정년연장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삶의 불안정/불확실을 어떻게 줄이는가? 이걸 해주는 게 바로 복지국가다. 국민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주거, 보건,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보장!
따라서 문제는 국가다. 일부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는 것, 심지어 전체 노동자의 총임금을 줄이는 것도 좋다. 단, 국민의 삶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좀 더 공적으로 책임지고 관리하고자 하는 국가의 확고한 계획이 추진된다면 말이다.
문제는 임금이 아니라 국가다
청년의 문제도 그렇다. 현재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문제요, 인구 고령화에 따른 구조적 문제다. 청년 고용률의 하락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런 정체된 상황에서 이들을 억지로 취업시키려고 하니 기존에 별일 없이 일하던 사람들을 내쫓거나 임금을 깎거나 하는 것이다. 혹시 현재의 고용구조를 급격히 변화시키기보다는 청년들에게 좀 더 여유 있게 미래를 준비하고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공적으로 배려해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취업만이 청년들을 취업불안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진보진영 일각에서 임금피크제의 대안으로 나오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는 현재 한국의 장시간노동의 현실을 생각하면 바람직한 측면이 있지만, 그것이 청년고용 문제의 근본 해법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시도를 하되, 좀 더 큰 틀에서의 사고도 필요하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언제나 세계 경제는 큰 위기 뒤에 거대한 구조변화를 맞았다. 청년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낡은 일자리 준비에 소진시킬 게 아니라 이러한 변모에 능동적으로 대비하는 데 쓸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배려해주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요컨대 현재 정부가 내놓고 있는 임금피크제란 첫째, 자본가의 이윤을 보호하고 문제의 원인을 일부 노동자의 이기주의로, 노동자 간의 문제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이 사회 지배계급들의 책략이고, 둘째,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교묘히 회피하는 절묘한 방식이다.
이 둘 중 하나에서라도 저들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즉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의 상당 정도를 포기하겠다거나, 국가가 임금축소에 따른 삶의 불안 증가를 불식시킬만한 과감한 복지정책을 시행하겠다고 하지 않는 한(그런데 지금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이 둘은 실은 같은 것이다), 임금피크제는 그냥 노동자들더러 죽으라고, 이 경제위기의 책임을 너희들이 몽땅 뒤집어쓰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임금피크제는 청년고용 문제의 해법도 아니다. 장년층에 대한 임금삭감이 청년고용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참조: “‘임금피크제’ 도입 안한 공공기관 신규 채용률 더 높아“), 현재와 같은 극심한 불황 속에서 자본가들이 이렇게 태평양 같은 마음을 갖길 바라는 것도 너무 순진한 짓이다.
오히려 이러한 불황 속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그간의 OECD 최장시간 노동이라는 오명도 씻고 일자리의 일부가 청년층에게 갈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좀 더 근본적으로는 청년들이 고용에 대한 강박 없이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