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를 나오고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 멀쩡하게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출된다. 갈 데가 없다. 그런데 미국은 호황이고 일본은 회복 중이다. 그럼 일본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하나? 20-30년 뒤에도 그들이 호황을 즐기리라는 보장이 있나? 또 그 이후에는? 난 시스템 문제까지 고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무엇을 할까’에 답하고자 한다.
언제든 쉽게 대체될 우리
명문대 출신으로 대기업에서 일하면 안전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같이 잘 나갔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버려질까. 그들도 그게 못내 궁금했을 것이다. 왜 나 같은 인재가 버려져야 한다는 말인가? 최근에 내 주변에서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예전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하면서 상당수 인원을 계열사로 보냈다. 계열사로 보내는 기업이 요새 기준으로는 관대해 보이지만 신입으로 입사해서 그런 인사명령을 받으면 엄청 충격적이다. 버려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후배들이 찾아와서 하소연한다.
“왜 내가 가야 하죠? 나보다 더 못한 동료도 있는데, 왜 하필 내가 가야 하죠?”
문제는 바로 대체 가능성(Replaceability)이다. 명문대 상대와 공대를 나온 그 후배들. 인물도 좋고, 성품도 원만하다. 업무 태도도 착실하다. 뭐 하나 뭐라 할 것이 없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버려졌다. 직장은 고용자와 직원의 상호선택 게임이다. 명문대 상경대와 공대는 많은 수의 졸업생을 해마다 토해내고 그들이 몇몇 대기업에 몰려들기 때문에 대기업에서는 명문대 출신을 언제라도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려울 때 일단 버리더라도 필요할 때 인력시장에서 비슷한 사람을 다시 구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명문대 출신 부장 한 명을 내보내면 그 월급으로 그 부장의 과후배 2명을 채용할 수 있다. 잘 나가던 임원을 내보내고 그가 하던 일을 휘하의 부장에게 시켰을 때 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다면 그 임원의 직장수명은 이미 다 방전된 상태다. 그들은 일종의 프로토타입이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결과물이다.
일을 잘 못해서 쫓겨나지 않는다. 옆 사람과 비슷하면 쫓겨난다. 요새 들어오는 질문 중에 “그래서 역시 직장에서는 정치력이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하는 분이 있다. 중요하다. 일요일 아침 TV에서 ‘동물농장’을 보면 동물원에서조차 정치력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정치력 키우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내 분야가 아니다. 답은 바로 대체 불가능성(Irreplaceability)이다.
위에서 문제를 너무 설명해서 답이 쉽게 나온다. 언제라도 직장에서 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문제라면 답은 당연히 나를 대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학교를 나왔든, 전공을 뭘 했든, 심지어 성격이 좀 괴팍할지라도 인사팀이 시장에서 다시 구하기 어려운 독특한 능력을 가졌다면 회사는 당신을 버릴 수 없다.
오히려 당신이 직장을 선택할 수 있으며 직장이 지겨우면 독립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그만큼 당신이 대체불가함을 자타가 공인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나를 대체 불가능하게 만들지? 비결은 역시 전설의 3각역량 모델에 있다.
3각역량 모델로 대체불가를 추구하라
‘개발협력계 취업에 대한 편견을 깨고 민간기업에 가라’는 조언에 많은 분이 반응을 보여왔다. 요새는 어디서 강의를 하건 글을 올리건 분야와 나이에 관계없이 경력개발 얘기에 가장 강렬한 반응이 온다. 이게 개인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시스템도 물린 문제라서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민간기업에 가라고 해놨으니 준비하는 분들에게 뭐라도 A/S를 제공해야 한다, 방향만이라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몰려와서 이 글을 쓴다. 구체적인 방법론은 나중에 하더라도 오늘 다루는 ‘방향’은 한번쯤 깊이 생각해보시길 권한다.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에 답하기 위해 십수 년 전에 만들어서 여태 골백번도 더 우려먹은 3각역량 모델을 오늘 또 한번 우리겠다. 원래 이 모델은 직장에서 해외사업개발 하는 후배들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고민하다 탄생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사원·대리가 대상이었다. 사업개발자에게 요구되는 역량이 뭔지 알아야 키울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미 취업을 해서 한숨 돌린 친구들이 뭘 어떻게 공부해 나갈 것이냐 고민할 때 그 고민을 정의(define)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단계에서 쓰는 모델이다. 그러나, 어차피 해야 할 고민이라면 취업 전부터 미리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 고민에서 취업 준비의 출발점을 찾기를 기대한다.
위 그림에 나오는 세 축은 서로 직각이다. 방 귀퉁이를 생각하면 딱 맞다. 각 방향은 지역, 기능, 품목의 전문성을 표시하고, 원점에서부터의 거리가 그 분야의 역량이다. 멀리 갈수록 역량이 많은 것이다.
- 지역: 특정 국가나 지역에 대한 통찰력을 말한다. 주로 언어에서 시작하며, 역사, 문화, 사람 등등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경험을 포함한다. 대학에서 주로 어학이나 인문학 전공한 분들이 주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 기능: 기획, 영업, 관리, 재무, 법률 등 어떤 조직에서나 필요한 공통의 역량이다. 요건 따로 깊이 있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대학 전공으로 말하자면 상대, 법대 출신들이 주로 해당하며, 공대에서는 경영학과 취급받은 산업공학과 정도가 포함된다.
- 품목: 보통 ‘산업’이라 일컫는 것이고, 우리 개발협력계에서는 ‘섹터’로 불리는 바로 그거다. 교육, 보건, 농업(농촌개발), 에너지 등등 무척 다양하다. 주로 대학 졸업할 때 자격증 받는 공대, 의대, 사범대 등 출신자가 많다.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역량을 이 세 축에 맞춰 평가했을 때 그 세 점을 이은 삼각형의 면적이 (비록 개념적이기 이를 데 없지만서도) 출발점에 선 당신의 역량이다. 좁은 이등변 삼각형이든 넓은 이등변 삼각형이든 정삼각형이든 삼각형의 모양이 역량의 모습이다. 위 그림에선 안쪽 작은 보라색 삼각형으로 표시했다. 시간이 흘러 그 삼각형이 넓어지면 그게 미래에 당신이 가질 역량이다. 바깥쪽 파란색 삼각형이다. 이제 삼각형을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늘려나갈지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고려사항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자기가 기존에 가진 전공과 경험에 너무 얽매이지 말되 그것을 버려서도 안 된다. 뭔 말이냐면, 자기가 경영학과 나왔다고 꼭 경영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공대 나왔다고 평생 엔지니어로 살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다만, 이미 가진 것을 버리고, 숨기지는 마시라. 거기가 출발점인 경우가 많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간호사 출신이 농촌개발 하는 것도 멋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보건교육이나 방역 쪽으로 관심을 넓혀가는 것이 더 호소력이 있다.
둘째, 한 분야만 판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한 분야에서만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분야에서는 문외한이 된다는 얘기다. 다른 분야를 모르면 협력할 수 없는 사람이 될 뿐이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이 있고, 다른 분야도 웬만큼씩은 아는 T자형 인재에서 위쪽 부분이 점점 두터워지는 추세라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영업과 기획을 모르는 엔지니어는 아무리 유능해도 그냥 엔지니어다. 절대 의사결정하는 자리에 들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한 분야만 파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효용이 체감한다. 즉, 대리-과장의 격차보다 차장-부장의 격차가 현격하게 작다. 구조조정의 일차 대상이 된다.
셋째, 그렇다고 모든 분야에서 완벽하려고 생각하지도 말라. 세 축에서 모두 뛰어나기는 대단히 힘들다. 대략 두 축을 장악하는 게 현실적이다. 스페인어를 즐겨 배우는 기계 엔지니어, 농산업에 관심이 많은 경제학도, 중앙아시아에 관심 많은 경리담당자 등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일할 기회가 있다. 인력시장에서 대체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인간성이 다소 나쁜(!) 경우라도 일자리 걱정이 없다. 나머지 한 축 정도는 남들과 협력해나가면서 보완하겠다는 자세만 있으면 된다.
3각역량 모델의 조직적 함의
만들어 놓고 내가 부여한 것이지만 이 3각역량 모델은 조직적으로도 함의가 있다. 조직 구성원의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 쉽게 설명한다. 이 모델에서는 조직의 역량이 모든 구성원의 삼각형을 중첩해서 맨 바깥쪽 삼각형의 면적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조직 구성원이 매우 순수한(?!) 조직은 똑같이 생긴 모양의 삼각형만 쌓아놓은 형국이라 아무리 모여도 면적이 늘지 않는다. 조금만 다른 분야에 일이 생기면 난리가 난다. 단일한 전공, 단일한 학교 출신만 바글바글한 기업(조직)이 있다면 합류를 피하라. 조직도 개인도 발전이 없고, 위기가 오면 다 함께 죽는다.
개발협력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역전문가입네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산업에도 깊이가 없고, 현장 나가면 간단한 계약도 혼자 체결 못하고, 도움이 없으면 사소한 통관도 못 시키는 사람이 허다하다. 남 도우러 가서 남에게 짐 된다. 평가전문가가 평가방법론에만 익숙해서 정작 평가하는 섹터의 지식이 일천한 경우도 있다. 기술만 달랑 아는 엔지니어가 적정기술이 곧장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사회적 기업을 구경만 해본 사람도 사회적 기업을 심사하고 컨설팅한다.
이제 새로 개발협력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분들, 어쩌다 진입은 했지만 갈 길이 막막한 분들, 명심하시라. 두 축을 공략하고 다른 축과 잘 협력하는 인재가 되시길. 위에서 등장한 갑자기 계열사로 떠밀려간 후배는 그걸 계기로 대오각성하고 공부를 했다. 물론, 직장에서 하는 일을 계속 하면서. 명문대 공대를 나와 에너지 관련 일을 하던 그 친구는 미국회계사 자격을 땄다. 역시 공부는 잘한다…
발전사업에서 엔지니어가 재무모델을 직접 만들고 돌릴 수 있다면 그는 대체불가하다. 투자파트너와 컨설턴트가 그를 대하는 자세를 보면서도 그를 자를 수 있는 임원은 없다. 만약 자른다면 그 회사에 재앙이고 경쟁사와 헤드헌터에게는 커다란 축복이다. 자기 분야에서 기본을 갖추되 관련 분야 하나쯤에서는 두각을 보일 수 있는 사람. 너무 어려운가? 쉽지 않으니까 대체불가한 것이다. 안정된 직업생활을 누리고 싶다면, ‘대체불가’를 추구하라.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