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게임중독법과 관련된 다양한 토론과 논의를 지켜보며 곰TV에서 근무하는 e스포츠 업계 종사자로 평소의 생각을 적어 봤습니다. 게임 개발사의 사정에 밝거나 심리학(?)에 조예가 깊지도 않지만 게임 좋아하는 37세 아저씨의 쓸데 없는 오지랖 정도로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부 거친 표현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1. 게임 중독은 학부모의 이해를 악용하고 있다
현재 게임 중독법에서의 ‘중독’ 이라는 단어는 질병으로서 관리되어야 하는 중독을 의미한다. 게임은 그 정도로 치명적인 과몰입 상태를 유발하기에 (마약,알코올,도박과 같이) 국가에서 중독자들을 관리하고 치료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모든 정책이나 법률은 당연히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해야 진행될 수 있다. 특히 지금처럼 논란이 계속 된다면 당연히 명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특히 게임중독법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들에게 ‘중독’이란 단어는 ‘질병으로서의 중독’이 아닌, 그냥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컴퓨터부터 켜는 ‘생활에서의 중독’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게임 중독법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공부 안하고 틈만 나면 컴퓨터 켜는 우리 아들을 그러지 못하게 나라님이 뭔가 해주나?” 정도의 느낌이며, 청소년을 자녀로 둔 학부모라면 솔직히 누구나 찬성할만한 내용이다.
당장 게임중독법을 찬성하고 있는 학부모들에게 “당신의 아들이 게임중독이라는 질병이 있으니 특정 시설로 데려가서 치료해야 합니다.” (알코올이나 마약중독처럼) 라고 해보면 어떤 부모도 우리 아들 게임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고 그냥 좀 많이 즐기는 정도다. 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 중독이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 차이다.
따라서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게임 중독법에 대해 단어 자체의 선정을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질병으로서의 중독과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생각나는 정도의’ 중독을 같은 단어로 사용하기에 이 논의는 시작부터 게임 업계에게 불리하고 불공정한 싸움이다.
질병으로서의 중독을 다른 새로운 단어로 대체하던지 일상 생활에서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중독성 있는 정도’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던 새로운 단어 정의가 필요하다.
2. 셧다운제는 무시하는 게 나은 수준이다
청소년이 10시 이후에 게임을 할 수 없도록 시스템으로 막아버리는 셧다운제. 이 제도에 대해 많은 게임인들은 부모님 주민번호로 하면 되네, 형 걸로 하면 되니까 유명무실한 제도네 , 소규모 게임개발사는 주민등록번호를 모아서 관리할 능력이 안되네 등등 말이 많지만 솔직히 난 그런 대응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셧다운제의 실제 시행에 있어 허점이 많고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일단 셧다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올바르게 정책이 시행되기 위해 대안을 찾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정책 자체가 잘못 된 정책이기에 당연히 이런 저런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러이러해서 빠져나갈 구멍이 많은 제도다! 라는 것을 논할 가치도 없다. 의미 없는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 왜 실무에서 애쓰는가? 애초에 정책 자체가 잘못됐으면 시행하지 말아야지, 어떻게 올바르게 시행할지 고민하는 것이 시간 낭비다. 이 제도의 본질은 부모로서 자신이 직접 대화하고 가르쳐야 하는 자식들에 대한 관리 자체를 게임 업계의 시스템으로 막아달라는 뻔뻔한 요구다.
청소년들의 올바른 생활 패턴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떠나 백 번 양보해서 청소년들의 생활 패턴 상 밤 10시 이후에는 잠을 자거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도 자신의 아들 딸들에게 그런 패턴을 교육시키고 설득시키고 공감시키는 것은 당연히 부모의 의무 아닌가? 그 책임을 왜 게임 업계로 돌리며 업계에서 시스템으로 원천 차단해주길 바라는가?
물론 이 작업이 현대 사회의 부모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된 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 세대에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맞벌이가 강제되고 아이들은 사교육 열풍에 학원을 뺑뺑이 돌듯 돌고 집에 오니 일에 지친 부모와 공부에 지친 아이 사이에 원만한 대화와 공감대 형성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이것이 원인이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핏 봐도 개연성이 없다.
셧다운제를 시행해서 게임을 못하게 한들 그 아이가 공부를 하거나 잠을 자게 하는 것은 또 어떻게 설득할 셈인가? 결국 셧다운과 관계 없이 부모의 관리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이건 가정 내에서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반드시 맞벌이를 해야 그나마 빚더미를 끼고 집 한 채 겨우 장만하는 사회와 자신의 그런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교육열을 올려 일류 대학에 진학시키고 의사, 판검사를 만들려는 사회 분위기가 정말로 게임탓인가?
아마도 그들은 우리보다 게임 업계를 더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대단하게 봐주시면 감사하지만 아쉽게 내가 보기에 아직 그럴 능력까진 없다.
3. 사실 중독은 일종의 영예로운 칭호다
중독이라는 단어는 (현실 생활에서 자꾸만 하고 싶은 상태) 사실상 영예로운 칭호다. 게임이라는 것이 현대 청소년들에게 그만큼 영향력이 있으며 파괴력이 있기에 중독이라는 화두에 올라왔으니,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게임에게 있어 이 얼마나 영예로운 타이틀인가? 취미 생활 영역의 세계 챔피언이란 타이틀이다.
공부 중독! 들어봤는가? 이런 중독이 있었으면 중독법 만들자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낚시 중독, 당구 중독, 독서 중독! 당연히 있다. 청소년 중에서도 있을 거다. 하지만 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가? 그들은 소수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적인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게임 중독법이란 것이 옳든 그르든 사회에서 논의되는 것 자체가 게임은 현 시대에 최고의 파괴력을 지닌 매개체기 때문이다. 과거 만화 중독 ,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상물 중독 , TV 중독 등으로 문제시되었던 것들이 이제 게임중독이 된 것이다. 자랑스러워하자. 게임은 만화나 TV, 영화보다 이제 훨씬 청소년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매개체가 됐고 여러분들은 그 산업의 종사자다.
우린 이제 메인 스트림으로 들어왔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자. 하지만 명심하자. 아직 맞벌이를 강제하는 사회를 만들거나 바꿔줄 힘은 없다. 중독법과 같은 일종의 새로운 산업에 대한 기존 체제의 거부감(?)이 표출되는 현상은 헌터X헌터에서 곤과 키르아가 천공 투기장 200층에 처음 들어갔을 때 히소카가 선물하려 한 ‘넨 세례’라고 생각한다.
4. 게임업계는 게임이 가진 영향력과 그 책임을 인지해야 한다
아니라고?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당연히 유저들이 계속 자신의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이용하여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중독 요소를 의도적으로 집어 넣는다. (아니라고?) 그리고 청소년들이 일상 생활에서 가장 많이 즐기는 취미가 게임이라면 당연히 그들에게 좋든 싫든 영향을 끼치게 된다.
따라서, 게임 업계도 (지금 그러고 있진 않지만) 게임은 중독성이 전혀 없다!!라던가 왜 우리한테만 그러냐! 등의 자세는 버려야 한다. 게임이 청소년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놀이라면 당연히 그에 따른 적어도 ‘사회적인 책임’ 은 가져가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책임의 범위와 방법에 대해서는 천천히 머리를 모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게임 업계에 대한 규제완화와 게임 중독법에 대한 반대를 위해 게임인재단이나 게임개발자연대가 만들어졌다고 생각진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 게임 중독법을 해결하고 당연히 그 다음에는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다. (저보다 똑똑하고 뛰어난 분들이니 이미 하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5. 게임 업계전체가 힘을 모아 캠페인을 진행하고 홍보해야 한다
이 부분은 업계의 사정이나 사회 분위기 상 불가능한 제안일 수도 있다. 하지만 행복한 상상을 해보면 게임을 즐기는 청소년을 위해 게임 업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이대로 게임 중독법이 통과되어 매출의 X%를 징수당하고 그것이 중독관리법이나, 청소년 관리프로그램이나 하는 수상한 이름으로 어디에 누가 제대로 어떻게 쓰는지 알 수도 없게 소모되는 것을 바라보지 말자. (실제로 올바르게 사용되겠지요??? 당연히..)
적어도 X%를 징수당하기 전에 게임업계가 나서서 스스로 청소년들의 게임 생활에 대한 캠페인 제작이나 학부모들이 좋아할 사업을 벌여보는 것도 좋다. 실제로 이미 게임 업계에서는 여러 사회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사회공헌 활동을 개별 게임사가 아닌 게임 업계 또는 게임 연대의 이름으로 통합한다면 활동의 규모 자체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학부모들의 비위를 맞춰주고자 헛돈을 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이 가진 파괴력을 온전히 우리가 인정한다면 사회적인 책임이 있어야 한다. 게임 업계가 매출의 (혹은 수익의) 일정 금액을 청소년들의 교육이나 무상 급식 , 학교 환경 개선, 장학 재단 설립을 통한 장학금 기부 , 대학생 학자금 대출 지원 등에 사용한다면 게임 업계의 인식 개선과 학부모들의 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매년 일정 금액을 반드시 사용할 필요도 없다. 분기별로 이익이 크게 났을 때 가끔이라도 최소한 게임 업계가 청소년들을 위해 실제 도움이 되는 정책이나 사업을 ‘스스로’ 진행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의식은 정말 크게 개선될 것이라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내가 결제하는 이 만원짜리 강화 아이템이 누군가의 더 좋은 급식에 도움이 되거나 미래의 나의 학자금 대출에 도움이 된다면 부모님에게 조금 더 떳떳하게 “이건 나의 아이템이 아닌 우리 사회 나아가 나의 미래를 건강하게 강화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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