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late의 「In the Name of Love」를 번역한 글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해라.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해라.”
이 말은 액자에 넣어져 “잘 큐레이팅 됐다”는 말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거실의 한 켠에 놓였다. 이 방의 사진은 유명한 디자인 블로그에 처음 올라왔고, 핀터레스트, 텀블러, 페이스북에 수천 번 공유됐다. 비록 이 방이 노동을 여가의 영역으로 가져왔지만,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거실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곳이 됐다.
오늘날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비공식적인 우리 시대의 직업 신조가 되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우리를) 구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대부분의 노동자를 비인간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격려가 되는 조언이다. 이 조언은 우리가 가장 즐겨 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왜 우리의 즐거움이 돈벌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이들은 누구인가?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특권층과 엘리트주의를 고귀한 자기향상으로 위장한 세계관이 비밀스럽게 건네는 악수다. 이 방식의 생각에 따르면 노동은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가 된다. 만약 금전적 이익이 바로 따라오지 않으면 그건 노동자의 열정과 결단력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이 말이 실제로 해낸 일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을 시장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한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격언은 보통 수많은 기원을 갖고, 여러 가지 이야기에서 재탄생된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의 기원은 이 말의 정확한 특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옥스포드 레퍼런스는 이 말을 특히 마티나 나브라틸로바(Martina Navratilova),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와 연관 짓는다. 인터넷은 종종 이 말이 과거 동양에서 공자가 한 얘기라고도 한다.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와 몇몇 긍정주의자는 이 개념을 그들의 레퍼토리에 수십 년째 포함 시키기도 했다. 심지어는 금융계조차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CNBC에서 사모 펀드 회사인 칼라일 그룹(Carlyle Group)의 공동 CEO는 “만약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면, 그건 더 이상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이 말의 가장 중요한 에반젤리스트는 전 애플 CEO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다. 2005년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 연설에서 잡스는 이 개념을 넣어 애플을 만든 이야기를 했다. 다음 네 문장에서 “당신”과 “당신의”라는 말은 여덟 번 나온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으십시오. 당신이 연인을 찾을 때에도 그렇듯이 당신의 일에서도 이 말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일은 당신 삶의 커다란 부분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위대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집중된 이 말을 잡스가 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잡스는 그 스스로에게 직업인으로서 특유의 이미지를 덧씌운 사람이다. 영감을 주고, 캐쥬얼하고, 열정적인 이미지 말이다. 이 모든 이미지는 이상적이고 로맨틱한 사랑과 잘 맞는다. 잡스는 그런 열정적인 직업인 이미지를 그의 회사와 매우 효과적으로 잘 융합시켰고, 그의 검은 터틀넥과 청바지는 애플과 애플의 직원들을 상징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애플을 그의 개인적 사랑의 노동으로 포장하면서, 잡스는 지구 반대편에 숨겨진 애플의 공장에 있는 수천 명의 노동자를 생략해버렸다. 잡스가 그의 사랑을 실현시킬 수 있게 해준 바로 그 노동자들 말이다.
이러한 생략은 드러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개념이 해롭지 않고, 소중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스스로 나르시즘에 초점을 맞춘 것일 뿐이다. 잡스의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공식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노동에 대한 유토피아적 시각에 반한 우울한 안티테제다. 소로는 『원칙 없는 삶(Life Without Principle)』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마을이 노동자들에게 보수를 후하게 준 덕에 그들이 오직 생계 때문에 하급의 것들이 아닌, 과학적이고 도덕적인 것들을 위해 일한다고 느낀다면, 이는 좋은 경제라 할 만하다.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을 고용하지 말고, 일을 사랑해서 하는 사람을 고용해라.
인정하자면 소로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어떤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다(누군가 “과학적이고, 심지어는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며” 기저귀 빨래를 한다는 상상을 하긴 힘들다, 그가 얼마나 돈을 받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가 일정 부분 노동에 대해 잘 보상해줘야 하고, 노동이 의미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유지했다.
대조적으로 21세기에 잡스 추종자들의 관점은 우리에게 시선을 내부로 돌리라고 요구한다. 그건 우리를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어떤 의무나 인식으로부터 면제해준다. 이와 같이 개념을 분리하면서 발생하는 한 가지 결과는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계층에 따라 구분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일은 두 가지 상반된 계급으로 나뉜다. 사랑할 만한 일(창의적이고, 지적이며, 사회적으로 유망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반복적이고 다른 직업과 뚜렷한 구분이 없는 단순노동)로 말이다. 사랑할 만한 일을 하는 쪽에 있는 사람은 노동인구에서 소수를 차지하면서도 부나 사회적인 위치, 교육, 사회적 인종 편견,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 더 특권계급에 속한다.
사랑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 사람들에게 이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신조 아래 동기에서 벗어나서 행해지거나, 사랑 이외의 것들이 필요한 노동(사실은 대부분의 노동이 그렇다)은 잊힌다. 잡스의 스탠포드 연설에서 그랬듯이, 사랑할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들은 우리의 의식에서 추방된다.
잡스를 하루라도 CEO에 있게 해줄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일에 관해 생각해보자. 그가 먹는 음식은 농장에서 수확되어 아주 먼 곳으로부터 배송된다. 그의 회사 제품들은 조립되고, 포장되고, 배송된다. 애플의 광고 대본이 작성되고, 배역이 정해지고, 영상이 찍힌다. 사무실 휴지통이 비워지고, 잉크 카트리지가 채워진다. 일자리는 양쪽 모두에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일 때문에 바쁜 엘리트들에게 노동자의 상당수가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면,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무거운 중압감이 – 쥐꼬리만한 봉급, 엄청난 보육 비용 등등 – 지배 계층의 진보적 당파 사이에서조차 정치적인 이슈로 거의 등록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놀랄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일을 무시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머지를 재분류하면서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가장 우아한 반-노동적인 이데올로기가 될 것이다. 만약 일과 같은 것이 없다면 도대체 왜 노동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계층적 이익을 주장해야 하는가?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직업을 개인적인 보상을 보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게 특권이고, 동시에 이것이 사회경제적인 계층의 표시라는 사실을 속인다. 심지어 프리랜서 일을 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조차도 예술학교의 등록금을 내주고 멋진 브루클린 아파트를 임대해 줄 수 있는 부모가 있다면 그와 같은 성공을 바라는 이들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고 커리어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우리가 만약 실리콘 밸리 기업가나 박물관의 홍보 담당자, 혹은 두뇌 집단의 일원으로 일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는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믿는다면, 호텔 방을 청소하고 커다란 박스 가게에서 선반을 채워 넣는 사람들의 소망과 내면의 삶에 대해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답은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힘들고 낮은 봉급을 받는 일들을 그 어느 때보다 미국인들이 많이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미국 노동부의 통계에 따르면, 2020년까지 가장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직업은 “사람을 돌보는 직업(personal care aide)”과 “가사도우미(home care aide)”다. 각각 평균연봉이 19,640달러(한화 약 2090만 원)와 20,560달러(한화 약 2190만 원)인 직업들이다.
특정 종류의 전문적 직업들을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직업으로 격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매력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낮게 평가하게 된다. 매력이 없는 이 일(특히 사람을 돌보는 직업은 더욱 그렇다)들이 사회가 기능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도 말이다.
만약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궂은) 노동의 상당한 부분을 격하시키거나 안 보이도록 만든다면 전문적인 직업에게도 커다란 피해를 줄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은 그 어떤 곳보다도 대학에서 더욱 파괴적이다. 평균적인 2000년대 중반 박사 과정 학생들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고대 스칸디나비아 신화와 아프로-쿠바 음악의 역사에 대한 열정을 쫓기 위해 금융계와 법조계(지금은 좀 덜 쉽다)의 벌기 쉬운 돈들을 포기했다.
고상한 소명에 답한 보상은 대학 고용 시장에서 미국 학부 교수단의 41%가 겸임 교수라는 사실로 돌아왔다. 이런 시간 강사들은 보통 더 낮은 봉급을 받고, 아무런 추가수당을 받지 못하며, 사무실도 없고, 직업 보장도 안 된다. 또한 그들이 일하는 학교에서 장기적인 지원을 받지도 못한다.
박사들이 그렇게 낮은 봉급에 매우 숙련된 노동을 제공하는 데는 많은 요인이 있다. 경로 의존성이라든가 박사를 따는 데 들었던 매몰비용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 말이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은 대학내에 깊숙히 파고들어 있는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신조다. 몇 가지 직업은 근로자 개인의 정체성을 직업을 통해 만들어낸 것들과 매우 친밀하게 융합한다.
학술적인 연구는 순수한 사랑에 의해서 수행되기 때문에, 실제 노동의 상태와 보상에 대해선 뒤늦게 생각하게 된다. 노동의 상태와 보상이 고려된다면 말이다. 「학문적 노동, 경영의 미학, 자율적 사업의 약속(Academic Labor, the Aesthetics of Management, and the Promise of Autonomous Work)」에서 사라 브루일레(Sarah Brouillette)는 대학 학부 교수단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우리의 일이 비물질적인 보상을 제공하고, 동시에 우리의 일의 우리의 정체성에 ‘보통의’ 직업보다 더 필수불가결하다는 믿음은 관리의 목적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가치를 뽑아내는 것일 때, 우리를 이상적인 직원으로 만들어준다.
많은 대학 교수가 기업의 근로 환경과 그로 인한 부수적인 가치들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마르크 부스케(Marc Bousquet)는 그의 에세이 「위 워크(We Work)」에서 대학이 기업에게 실제로 관리 모델을 제공해야 한다고 적었다.
어떻게 대학에서의 근무공간에 맞먹으면서, 똑똑하고 감성적인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강도로 50~60시간씩 바텐더의 봉급보다 적게 받으면서 일하게 할 수 있을까? 직원들이 엄청난 업무량과 적은 봉급을 보고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해”라고 중얼거리며 책상 위에서 기절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우리가 근로자들을 대학의 교수단들과 같이 만들고 그들이 일을 하는게 아니라고 부정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우리 기업의 문화를 캠퍼스 문화와 비슷하게 만들어서, 모든 근로자가 그들의 일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도 즐길 수 있는 일이 적어져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일도 여전히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인정한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그게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걸 거부하면, 착취를 향한 문을 열고 노동자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사랑할만한 직종을 가진 근로자에게조차 착취를 강화한다. 그 직업들에서 근로 시간을 지키지 않고, 정해진 봉급보다 적게 받으며, 무급으로 일하는 것들이 새로운 모범(norm)이 되면서 말이다. 리포터들은 임시 휴직한 사진가들의 일을 하라고 요구 받고, 홍보 담당자에게 주말에도 트윗이나 핀터레스트를 하길 기대 받는다. 전체 근로자의 46%가 몸이 안 좋아 쉬는 날에도 업무 이메일을 확인해야 한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시켜 주는 것만큼 착취를 쉽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자기만족으로 행복한 근로자들의 나라를 정교하게 만드는 대신, “사랑하는 일을 하라”의 시대는 겸임 교수들과 무급 인턴의 증가를 보여줬다. 사람들은 아주 싼 값이나 무료로, 혹은 재산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일을 하기를 재촉했다. 이러한 케이스들은 대학에서의 학점을 위한 인턴이나 경매에 부쳐지는 패션-하우스 인턴십 같은 모든 것들에서 볼 수 있다(발렌티노와 발렌시아가가 한 달간 계속되는 인턴십을 경매에 부친다, 물론 자선 목적이라면서 말이다). 진행 중인 ProPublica의 탐사보도가 밝힌 것처럼 무급 인턴은 미국의 전체 노동인구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존재하고 있다.
무급 인턴이 패션, 미디어, 예술 같이 크게 사회적으로 선망되는 분야에 많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산업들은 근로자들이 실제 임금 대신에 사랑의 이름 안에서 사회적인 통화를 위해 기꺼이 일한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왔다. 이런 기회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은 물론 전체 인구의 압도적인 대다수다. 임금을 위해 일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배제는 경제적, 직업적인 부동성을 더욱 경화시킬 뿐 아니라, 이러한 산업들을 사회가 제공하는 다양한 목소리들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리고 매들린 슈왈츠(Madeleine Schwartz)가 디센트(Dissent)에 썼듯 패션, 미디어, 예술 등 인턴에게 많이 의존하는 이러한 산업들이 여성화 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의 또 다른 해로운 결과는 이것이 아무런 대가 없이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무자비하게 쓰인다는 것이다. 여성은 낮은 봉급이나 무급 노동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한다.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 겸임 교수, 무급 인턴에서 여성은 남성의 수를 넘어선다.
고졸이 하든 박사가 하든 상관없이 이 모든 일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데 임금이 우선적인 동기가 되어선 안 된다는 믿음이다. 여성들은 그들이 선천적인 양육자이고, 남을 기쁘게 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간주한다. 무엇보다도 여성들은 무보수로 아이들과 노인들을 돌보며, 아주 먼 옛날부터 가사 일을 해왔다. 그리고 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어찌 됐든 여성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 당신은 인생에서 하루도 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약속의 따뜻함에 들떠서 굴복하기 전에, 딴지를 걸어보자. 일을 마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서 정확히 누가 이득을 보는 건가? 왜 일하는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도 일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야 하는가? 그 말이 힘을 실어주는 노동의 착취 메커니즘을 숨기는 동안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사실 자본주의의 가장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됐다.
만약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가 일로 인정할 수 있다면 이 말의 적절한 한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한 보상,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 여가를 즐길 인간적인 근무시간을 요구하면서 말이다. 그걸 해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진정 사랑하는 것을 할 시간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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