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고향 땅 선거에서 굉장히 많이 떨어지셨죠. 떨어진 순간들이 다 기억이 날 텐데, 언제가 제일 기억이 나세요?
변광용(거제시장 후보): 아무래도 2년 전 국회의원 선거 때 제가 730표 차, 0.7% 차로 떨어진 게 제일 안타깝고, 두고두고 아쉽고 그랬죠.
리: 0.7%면 진짜…-_-;; 그날 밤에 기분 어떠셨습니까…
변광용: 근데 오히려 당일 밤에는 오히려 좀 담담하더라고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더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아, 이걸 좀 더 했더라면… 고향이라고 해서 안이하게 생각했다, 한 번이라도 더 가서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뭐 이런 안타까움이 있던 거죠.
리: 어차피 저쪽 후보도 다 같은 고향 아닙니까?
변광용: 면 단위별로 그 면 출신 사람에 대한 몰표 성향이 있어요. 예를 들면 그 당시 김한표 의원 같은 경우는 장목면이 고향이었어요. 장목면에서 그분이 80% 몰표가 나왔어요. 그런데 저는 일운면이 고향인데도 5.5:4.5로 진 거죠. 그래서 고향에서도 졌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어떻게 이길 거냐, 이런 비아냥을 좀 많이 들었어요. 많이 안타까웠죠.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상징성도 있으니, 이번에는 꼭 이겨야죠.
리: 4번 떨어진 게 되게 아픈 기억인데, 그럼에도 계속 남아 있었잖아요. 여기 남아서 정치를 계속해나간 이유는 어떤 게 있을까요?
변광용: 거제가 어려운 지역이에요. 어려운 지역에서 당을 책임지다 보니까, 본인은 나가기 싫어도 지역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좀 있었습니다. 지난 2014년 지방선거 같은 경우도, 저는 나가기 싫었지만 민주당 이름으로 나갈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도의원 후보 구하기 힘들지, 단체장도 돈 많이 들지, 해 봐야 떨어질 사람이지… 그런데 또 위원장이란 책임감을 가지다 보니 후보를 안 넣을 수도 없고.
리: ……
변광용: 그런데 한편 그런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떨어지는 과정에서도, 계속 두드리다 보면 깨지지 않을까? 깨보고 싶다. 이런 오기라면 오기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될 때까지 해 보자, 이런 강한 의지가 저를 지탱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리: 노무현 대통령처럼 멋있게 이야기할 만한 그런 게 없을까요-_-? 지역을 바꾸고 싶었다거나…
변광용: 처음에는 그래 했죠. 2006년에 열린우리당 시장 후보로 나왔었는데 그때 ‘지방권력 교체’란 슬로건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지자체 선거에 무슨 지방권력 이야기를 하느냐, 그런 반응도 있었어요. 하지만 한나라당의 색채가 워낙 강해서 그 색채를 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쭉 출마했어요.
리: 당을 지켰다고 하는데, 왜 이 당에 그렇게 애착을 계속 가졌나요?
변광용: 제가 지역에서 지역 신문을 운영했습니다. 그때 노무현 대통령 대선이 지나가면서 열린우리당이 내가 바라는 정당이구나, 여기서 활동해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 보수색이 짙은 거제에서 한 50명 정도를 조직해서 동반 입당을 했죠.
리: 열린우리당의 뭐가 그렇게 맘에 드셨어요?
변광용: 일단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점. 젊은 사람들에게 비전과 가치를 주는 당이었어요. 노무현 대통령과는 그 분이 변호사였던 시절에 대우조선 노동조합 사태 관련해서 거제로 몇 번 모시곤 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대우조선 현장에서 뵈게 된 게 첫 인연이었고요. 대통령 되신 후 몇 번 뵌 적도 있죠.
위기의 거제, 권력 교체로 반전을
리: 지금 거제시에 문제가 많은데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변광용: 조선업의 불황으로 인해 경제침체가 심하기 때문에 지역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이 가장 큰 관건입니다.
리: 삼성중공업하고 대우조선해양이 있잖아요. 특히 대우조선이 몰락하면서 지역경제에 안 좋은 영향을 줬는데 시에서 이를 극복할 방법이 있을까요?
변광용: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구조조정이 많이 되었죠. 그동안 계속 인구가 유입되었는데 작년부터는 인구가 유출되기 시작했어요. 작년에만 1만 명 정도 인구가 줄었습니다. 인구 유출이 시작되고 나서 시의 경제적 활력이 떨어졌고요. 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야기가 되는 거제 해양플랜트국가산업단지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데, 지금은 실수요조합 방식, 그러니까 업체들이 돈을 내고 조성을 해서 들어오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LH공사가 참여하는, 국가가 주도하는 방식으로 산단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봐요. 국가가 주도해서 이를 해양플랜트 산업의 거점으로 만들고, 인구를 유입시키고, 또 조선업도 활황시키자는 생각을 해요.
또, 김경수 경남도지사 후보가 이야기했듯이 KTX를 거제 확장하는 것. 지금도 계획은 되어 있는데 타당성 부분 때문에 아직 확정이 안 된 상태인데, 이런 부분을 빨리 확정해서 KTX 조기착공을 해서 거제 경제에 대한 기대 효과를 만들고 인구 유입하는 게 자치단체장의 역할이라 봐요.
리: 방금 교통 문제 말씀하셨는데, 거제로 오는 사람들이 관광 위주로 오잖아요. 근데 다녀온 사람들 얘기로는 거제 관광 산업이 너무 한 철 장사라는 얘기가 많아요. 이건 어찌하는 게 좋을까요?
변광용: 제가 공약을 발표한 게 있는데, 이순신 테마파크를 규모 있게 조성하겠다는 거예요.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뉴욕에 관광객이 몰리듯이 옥포, 거제 일대가 이순신 장군의 승전지니까 이를 소재로 한 규모 있는 테마파크를 조성해서 거제 관광의 볼거리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국제구호기구라는 단체가 있는데, 이 단체가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사업을 제안해서 제가 얼마 전에 후보 자격으로 이 기구와 협약을 맺었어요. 이 단체는 세계에 흩어진 한인들과 함께 이런 사업을 진행하는데 거제의 획기적인 랜드마크를 만들 계획을 하고요. 또 모노레일 설치를 통해 더 다양한 관광 인프라를 갖출 생각이고. 거제에 공고지라고 유명한 관광지가 있고 내도라는 섬도 인기 있는데 이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어서 걸어서 섬까지 다녀올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거리가 500미터 정도거든요.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요. 광범위한 관광 인프라를 구축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또 가덕신공항 문제가 있는데, 사실 거제 입장에서 가덕신공항은 큰 기회가 될 수 있겠죠. 그런데 박근혜 정권에서 결정한 상황에 대해서 지금 단체장이 유치하겠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래도 김해공항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문제가 불거진다면 가덕신공항을 유치하고자 하는 희망도 있죠.
리: 원래 시 생활 수준이 높다 보니 관광객들의 물가 불만도 많아요.
변광용: 지속적으로 지도·권고하지만 실제로 시장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으면 물가 잡기가 어렵죠. 저희가 고민 중에 있는 게, 거제가 바다인데 막상 거제 오면 제대로 된 수산물시장, 먹거리 센터 자체가 없어요. 다 통영에 있지. 거제에서도 그런 걸 만들어야, 적어도 관광객들이 하루 정도 거제를 체험하고 먹고 자는 계기가 되는데, 실제 먹거리가 없는 상황이에요.
리: 경제적으로 마이너스 나는 걸 다른 분야에서 채워야 하는 상황이군요?
변광용: 거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관광 산업 얘기가 많이 나오죠. 근데 실제로 보면 현실적으로 말뿐인 얘기에요. 준비된 게 별로 없거든요. 늦었지만, 지금 시장을 맡는 사람이 이 시점부터라도 하나하나 먹고 살 거리를 준비해야죠. 조선업이 10년, 20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거제의 자연조건을 활용한 관광이 조선의 대안사업으로 설 수 있으려면 인프라를 하나하나 준비해야 합니다. 제 공약 중에 4대 위원회를 시장 직속으로 설치하겠다는 게 있어요. 천만관광 거제 위원회, 일자리 위원회, 삶의 질 개선위원회, 시정혁신위원회. 이걸 시장 직속으로 직접 챙기겠다고 공약했는데, 특히 천만관광거제위원회를 통해 관광 로드맵을 만들려고 합니다.
산업도시 거제, 경상남도와 함께 변화를 꾀한다
리: 삶의 질이라는 건 어떤 측면을 말하는 거예요?
변광용: 거제가 갑자기 산업도시로 진화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어요. 문화라든지, 소외 계층 대상 복지라든지, 교육이나 교통이라든지. 조선업이 호황일 때도 수입은 많았지만 전체적인 삶의 질에는 개선점이 많다는 거죠. 복지, 장애인 문제, 교육, 문화, 등등 삶의 질과 관련된 부분을 찾고 개선하고 만드는 역할을 하려고 해요.
리: 교육문제가 선거 표에 굉장히 중요한데, 거제는 예전처럼 어릴 때부터 유학하러 밖으로 빠져나가진 않지만, 교육상태가 좋다고 하긴 어렵죠.
변광용: 중학교에서 우수한 인력들이 외지 학교로 빠지는 경우도 많고. 거제가 전문대로 거제대가 있지만 크게 시민들에게 존재감을 주는 건 아니고요. 지금은 정원 미달 사태도 많이 생기는 상태고. 내년 신입생부터 거제 지역 고교 평준화가 됩니다. 평준화의 역기능도 순기능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평준화에 대한 대비를 시장 입장에서 해야 할 상황이죠. 전체적으로 고교 평준화에 따른 교육환경 변화에 대한 정비를 잘 준비해서 평준화 이후 거제 학생들의 여건을 바꾸려 해요.
거제대의 경우 학교가 좀 도심과 괴리되어있어요. 거제대학을 도심 쪽으로 이전시켜서 대학 문화도 만들고, 대학이 들어오면서 상권이 살아나니까 지역 발전 차원에 고려해 봐야 합니다. 김경수 후보하고도 얘기하는데, 지금 거제대학이 대우조선해양 소유에요. 그래서 대우조선과 논의를 통해서 도립대학으로 만들까 해요. 경남에서 지금 도립대학이 남해, 거창에 있는데, 거제대학도 도립대학으로 만들어서 조선과 관광을 특화시킨 교육기관으로 만들자는 거죠. 그리고 그 인재들이 거제 조선, 관광 부문에 뛰어들 수 있도록 내실 있게 만들자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리: 도랑 같이하는 게 중요한 시기일 것 같은데. 김경수 후보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변광용: 경수하고는 친구로 지내고요, 제가 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절 거제 책임자를 하면서 경남권 소통을 다 하니까, 같이 계속 일했죠. 후보 시절에 경수를 통해서 문재인 후보에게 대우조선 문제 브리핑하기도 했고요. 도립대학 추진, 국가 산단 이런 부분도 도지사와 협의가 잘 되어야 할 부분이죠.
리: 제가 외가가 통영인데, 그때 교통 상황이 애매했는데 사실 거제랑 통영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볼 수 있잖아요? 하나의 권역으로 뭔가 추진할 계획은 있나요?
변광용: 제가 중학교 때 참고서를 사거나 안경을 맞춰도 통영에 갔습니다. 중3 때부터 안경을 썼는데, 시외버스 타고 통영까지 갔고요. 조선소 들어오기 전까진 통영이 중심이었죠. 통영과 거제가 연계해서 할 수 있는 관광 프로그램도 많고요. 섬들을 연계하는 권역화된 관광 발전을 꾀할 수 있겠죠. 또,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협력업체도 김해, 통영, 함안, 녹산공단 등등에 많이 흩어져 있어요. 지자체마다 우리 당 후보들이 많이 당선된다고 하면 권역화된 산업 연계에 속도가 붙지 않을까 싶습니다.
리: 이번에 경남 선거가 대단히 중요한, 도시 차원이 아니라 경남 전체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겠네요
변광용: 그제 TV조선에서 로드 인터뷰를 했는데 몇 가지 질문 중에 도발적인 질문도 있더라고요. 거제가 문재인 대통령 고향인데, 그 부담감은 없느냐. 그래서 제가 부담이 되고 책임감도 크다고 했어요. 문재인 대통령 고향이라서, 제가 떨어졌을 경우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지난 총선에서 고향에서 졌거든요. 그러면서 두고두고 듣던 얘기가 고향에서도 못 이기냐 이러는데. 제가 승리하지 못하면 대통령 고향에서도 시장 당선이 안 되냐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꼭 승리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요.
리: 경남이 새누리 정서가 강했잖아요. 이번에 변한다면 경남이 어떻게 변할까요?
변광용: 이번에 만약 김경수 후보가 지사가 되고, 경남 창원, 거제, 김해, 양산 이런 쪽에서 자치단제장이 배출된다면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묶여있던 구조, 고여있던 분야의 혁신과 변화가 일어나리라 생각해요. 당장 저 자신부터 대중교통체계를 변화시키려고 하고요. 김경수 지사가 되면 문재인 대통령 국정 기반에 따른 대대적 변화가 있으리라 봅니다. 권력이 바뀌니까 경남이 바뀌는구나, 이걸 도민들이 체감할 수 있으리라 봐요.
리: 이번에 민주당 후보들 얘기 보면 개발 정책 대신 환경과 복지가 많아요. 거제에 환경 문제는 어떤가요?
변광용: 거제가 난개발 문제 좀 있어요. 환경단체는 바다 매립에 대해 반대하기도 하고요. 저 자신도 바다 매립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고 봐요. 산림하고 바다는 어지간한 큰 문제가 아니면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이고요. 그런데 산단 문제는 거제의 미래 먹거리 동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문제라고 봐요. 물론 원칙적으로 생태 파괴를 피해야 한다는 입장은 고수해요.
리: 복지에 있어서 조선 산업 잘 나갈 때 문제 안 되다가, 하청업체까지 무너지면서 문제가 등장하죠. 외국인 노동자도 많고. 빈부 격차도 생기고.
변광용: 저는 무엇보다도 어르신들, 노인 복지와 장애인 복지에 대해 생각해요. 장애인 복지관 건립해서 장애인들의 복지 서비스 확충하겠다고 공약 냈고요. 또 70세 이상 어르신들에 대해 시내버스 요금 무료화를 할 거예요. 다른 지자체에서는 지하철 요금 무료화도 하고 그러는데 거제는 아직 그런 게 없거든요. 지금 노인분들이 이야기하시는 게, 산업화 세대 배려한다면서 정작 시에서 한 게 별로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노인분들이 모일 곳을 확충하려 해요. 특히 문제가, 목욕탕이에요. 도시분들은 체감하기 어려운데 여긴 촌이 많고 섬이 많기 때문에 벽지에 계신 분들은 목욕하려면 1시간 이상 걸려서 시내로 나와야 해요. 거제에 18개 면·동이 있는데 이걸 권역 별로 묶어서 어르신들 필요에 따라 편하게 목욕도 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공중목욕탕을 설치하려고 해요.
동네 사람이 다 알던 수재, 거제로 돌아가기까지
리: 어릴 때부터 거제에서 생활하셨나요?
변광용: 제가 고등학교까지 나왔습니다. 대학교를 서울 쪽으로 가서 한 10년 살았지요.
리: 어린 시절의 거제는 어떤 이미지였어요?
변광용: 제가 1966년생입니다. 도로가 저희 동네에 깔리기 시작하던 그런 시점이었죠.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전기가 없이 호롱불을 켜곤 했어요. 그런데 대우조선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거제가 산업도시로 급변하게 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초반부터 3만 명, 3만 5,000명씩 노동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대우조선 있는 장승포 쪽이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곤 했습니다. 주말 휴일만 되면 작업복 입은 노동자들로 거리가 메어질 것 같았어요.
리: 어릴 땐 어떤 학생이셨어요?
변광용: 공부는 잘했죠. 반장선거 같은 것도 이상하게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했고, 중학교 때도 그랬죠. 고등학교 때 제가 학생회장을 맡았죠. 그러다 수업거부를 한 번 주도했어요.
리: 에엥, 왜요?
변광용: 뭐 제가 뭐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입시 위주 수험 공부를 했는데, 그때 축구부가 결승에 올라갔어요. 그런데 학교 측에서 ‘3학년은 공부를 해야 하니까 가면 안 되고, 1~2학년들만 응원을 가자. 대신 학교에 TV를 놔서 자율학습 시간에 중계를 보여주겠다, 이런 식으로 나왔는데… 이게 발단이 되어서 두발 문제까지 나아간 거예요.
리: 에에엥, 어떻게 거기까지;;;
변광용: 학교가 너무 엄격하게 터치한다는 거죠. 그래서 집행부에서 우리 가만있으면 안 된다, 우리가 단체행동을 하자 이러면서 요구사항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왔어요.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 교복 자율화는 이루어졌지만 두발 문제는 남아 있었고, 선생님들의 폭력적인 언행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어요. 그런 부분이 불거지면서 학교 측과 대립하고, 결국에는 수업 거부를 했죠.
리: 며칠동안 수업을 안 했습니까?
변광용: 오전 동안 안 했죠.
리: 뭐죠……
변광용: 수업시간에 수업 안 받겠다 하고 무작정 나왔는데 저희가 별반 경험과 체계가 없다 보니까 통제가 안 되더라고요. 집에 가자, 하면서 교문 밖으로 나가는 친구들도 있고… 그렇게 오전 동안 운동장에 있었는데 어떤 식으로 끌어가야 할지 모르다 보니까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 후유증도 상당히 컸어요. 학생회 간부들을 징계한다 어쩐다 하면서 선생님들이 그걸 핑계로 감정 실은 체벌도 하고 그러셨죠. 이 새끼들 저것도 제대로 못 한다면서…
리: 패배의 추억을 안고 서울대에 간 거네요. 85학번이면 그땐 운동이 다시 피어오를 때인데 어땠나요?
변광용: 촌에서 올라가서 대학 생활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 3학년, 1987년에 고향인 거제에 내려갔어요. 그때가 대우조선 노동자 투쟁이 한참 진행될 땝니다. 마침 고향이니까 지역에서 아는 선배들이 노조 설립을 위해 노력하고 계셨어요. 그때 노동운동을 하던 지역 출신 핵심 몇 명이 내려와서 대우조선 노조 설립을 도왔죠.
리: 노조 설립 이후에는…
변광용: 잠시 고향을 떠나서 대학원을 갔어요. 공부도 하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고시 준비를 좀 했죠. 근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내려왔죠. 쉽게 생각하고 내려왔는데, 고향이어도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리: 만만치가 않다는 게?
변광용: 어찌 보면 제가 거제라는 도시를 만만하게 봤는데, 한참 후에 돌아온 거제는 이미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커지고 다양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고향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뭐 하나 해나가기 상당히 힘들었어요. 우선은 거제에서 경실련 사무국장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급여가 없다 보니 밥벌이에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역신문에 기자로 들어갔죠.
정치에 입문한 계기, 첫 선거운동과 김기춘의 권력
리: 당시에 서울대 출신이면 꽤 엘리트인데 취업하려고 해도, 운동을 하더라도 서울에서, 중앙에서 할 수 있었잖아요? 그때는 중앙지 기자도 무지막지한 권력이었고요. 왜 거제로 내려오셨나요?
변광용: 지역에서 정치를 한 번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거죠. 내려가서 시작하면 금방 될 것 같았어요.
리: 그렇게 당선 실패 20년이 지났습니다…-_-;
변광용: 그쵸, 현실은 아시다시피… 여기 거제는 한나라당 깃발만 꽂으면 먹는 그런 동네였어요. 모든 게 제 생각하고 그리 맞아떨어지지 않은 거죠. 제가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보니 생계 문제도 해결해야 했어요. 그렇게 흘러가 버린 거죠. 선배 중에서도 지역에서 시작한 분들이 계세요. 대우조선 노조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하신 분들도 있고…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대로 뜻을 이룬 사람들이 없어요.
리: 경실련, 지역신문… 다 시민운동에 가까운데, 어떻게 이렇게 정치를 계속하게 되었나요?
변광용: 아픈 추억인데, 김기춘 당시 법무장관 출신이 2000년 총선에 나와요. 그때 맞붙은 사람이 경찰서장 출신 김한표 국회의원이에요.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이 사람이 경찰서장 하면서 나름 인지도 좋은 분이셨어요. 그래서 지역신문 하던 저에게 선거 좀 도와달라고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선거를 돕는 과정에서 제가 집행유예를 받게 됩니다.
리: 뭘 어쩌셔가지고?
변광용: 언론 보도자료, 연설문, 기업 관련 업무를 제가 맡았는데 선거 끝나고 김기춘 쪽에서 보도자료를 문제를 삼은 거예요, 허위사실이라고… 저는 실무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선대위원장이 오더 내린 대로 낸 것밖에 없는데 조사를 받았어요. 저는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 되는 게 후보자라든지 선대본부장이라든지, 오더 내린 사람은 안 건드리고 오더에 따라서 작성해가지고 낸 사람을 왜 건드렸나 싶어요.
리: 그때 윗사람들은 뭐래요?
변광용: 발뺌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재판받을 때 증언 좀 해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증인도 안 서주려고 하더라고. 그다음에는 아예 변호사 없이 재판을 했어요. 국선 변호사 있는데,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다툴 겁니까? 다투려면 변호사 사시고, 변호사 안 살 것 같으면 그냥 다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이소. 그러는 거죠.
리: 억울하셨겠군요…
변광용: 어쨌든 저는 스스로가 선택을 한 일이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서 원망해 본 적은 없어요. 그래서 보도자료 하나 냈다고 검찰에서 징역 2년을 때리더라고요. 그때 검사가 이명박 다스를 덮었다는 의혹을 받는 그 사람이었어요. 실명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만…
리: 괜찮습니다, 김기춘부터 이미 각종 실명이 많이 나왔습니다(…)
변광용: 돌아보면 김기춘 당시 당선자의 위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죠. 그 당시 검찰 쪽에서는 김기춘 전 법무장관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조사도 상당히 강압적으로 진행됐어요. 정치 보복이었던 거죠.
리: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이 뭔가 맺히면서 달라지는 게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요?
변광용: 그런 걸 느끼게 되는 거죠. 아 이게 진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구나, 하고… 모든 건 내가 선택하고 그래서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고도 생각하는데, 그 사건 이후로 어디 출마한다 그러면 두고두고 전과로 따라다니는 겁니다… 당에서 공심위 결정할 때도 꼭 이게 뭐냐 물어보더라고요. 선거 나올 때마다 소명해야 하고…
리: 정말 힘드시겠네요…
변광용: 근데 김기춘 씨 이름 들어가면 우리 당 사람들은 대번에 아, 어떤 얘긴지 알겠다 하면서 끝납니다(…)
전형적인 ‘갱상도 싸나이’의 사랑
리: 그나저나… 많은 후보의 와이프가 고생 중인데…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변광용: 1995년에 했어요. 아내는 그때 어린이집을 했죠. 저는 경실련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못 받고 있었을 때요.
리: 사모님 돈으로 버틴 건가요?
변광용: 모든 가정 경제는 저희 집사람이 끌어온 셈이죠. 제가 항상 반백수 생활을 했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더라고요. 어린이집이 돈이 안 되니까 아내가 학습지 교사도 했어요. 그게 실적제더라고요? 열심히 하는 만큼 페이가 많아지는. 그래서 힘이 드는데도 늦게까지 하더라고요. 집사람이 노력을 많이 하면서 그럭저럭 생계를 꾸릴 수 있던 거죠. 주변에서 각시 고생 조금만 시키라고 말해요.
리: 미안하지 않으셨습니까?
변광용: 많이 미안하죠.
리: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때 뭐 해주십니까?
변광용: 저도 경상도 촌놈이라 그런지 그런 표현이 익숙지를 못해요. 작년 생일인가 결혼기념일에 제가 처음으로 꽃을 한 번 보내줬어요.
리: 반응이 어떻던가요?
변광용: 네, 그런데 집사람이 그걸 또 카톡에다 올리고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아예 포기하고 있었다고. 좀 짠했어요. 제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표현하는 게 영 익숙지를 못해서…
리: 사모님은 언제 만나셨어요?
변광용: 집사람이 고등학교 동기예요.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까지 했어요. 제가 졸업할 때 지방자치에 대한 대학원 논문을 쓸 일이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지역에 설문을 좀 해야 될 일이 있었는데, 진짜 막막하더라고요. 동기들은 졸업해서 떠나있고… 그때 우연히 집사람을 만나게 돼서, 설문 받는 데 많이 도와줍니다. 집사람은 여기에서 어린이집을 계속했다 보니 아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고마워서 서울 올라가서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리: 후보님, 나름 지역에선 굉장히 유명했을 거 아니에요? 쟤 수재다 이러면서.
변광용: 현수막도 붙고 그러긴 했죠.
리: 하지만 이렇게 허당일 줄이야…-_-; 장인어른께서 정말 분개하셨겠군요.
변광용: 그런 푸념을 듣긴 했죠. 저희 장인어르신이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제가 선거할 때마다 진짜 열정적으로 하셨어요. 저보다도 열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막 지역구를 돌아다니셨죠. 그분이 좀 지역 유지에 속하는 분이셨어요. 경제적으로는 조금 어려워도 워낙 퍼 주는 분이셨죠. 그러다 저에게 서운한 게 있으면 집사람에게 토로하시기도 하고… 그런 얘기를 전해 듣기도 하고 그랬죠. 살아계실 때 당선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참 많이 죄송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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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후보님에게 있어서 거제에서의 정치란 어떤 느낌일까요?
변광용: 거제는 완전히 촌이 아니다 보니 경남권 내에서도 진보계열 세력이 득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전형적인 시골 군 단위의 정치 지형과는 조금 달라요.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정치문화와 선거지형 같은 것들이 도시와 비슷하게 발전되어 왔다고 봅니다. 지난 선거만 보더라도 지역색에 의한 가름 같은 것들은 여전히 존재했어요. 이번 기회에 그런 부분들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더 좋아졌고요.
리: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가는데, 개인적으로 바라본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변광용: 문재인 대통령 선거 거제 책임을 2번을 맡으면서 자주 뵈었죠. 후보 시절 거제 일정을 제가 거의 다 짰고, 내려오면 수행도 했어요. 거제에 꼭 방문해 주십사 하는 일정이 있어서 저희가 후보 측에 요청하면 웬만하면 다 해주셨어요. 대표적인 게 대우조선 일정이죠. 정식 후보 되기 전 고향 방문해달라 진언할 때, 거제 생가만 달랑 갔다 올 수는 없으니 생가 가고 산업 현장인 대우조선, 협력업체 방문하는 걸로 일정을 짜서 올렸어요.
리: 어떤 영향이 있었나요?
변광용: 대우조선 지연 문제가 논란됐을 때 경선 기간이었어요. 이미 ‘문재인 대선’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재인 입에서 나간 메시지가 시장에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는 사람들 인식이 있었어요. 금융권, 국회, 자유한국당 친구들이 대우조선 지원방향을 막 떠들 참이었는데, 대우조선 쪽에서 문 후보 입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발해 줬으면 하더라고요. 그러면 금융권이든 채권단이든 분명히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요. 저는 그 요구를 후보 측에 전달했죠. 그런데 우리가 전달한 것보다 더 센 메시지가 내려온 거예요.
리: 후보 입장에서도 굉장히 리스키했을 것 같은데요;;;
변광용: 그 이후 대우조선 공적 지원이 순조롭게 풀려갔어요. 그래서 대우조선 쪽에서 저한테 고마워하죠. 지난번에는 여름이었는데, 문재인 대통령 생가 근처에 재래시장이 있습니다. 생가 온 김에 재래시장 쪽을 돌았는데, 9월달이었지만 굉장히 더웠어요. 온 와이셔츠가 땀으로 다 젖는 날씨인데도 크게 내색하지 않으시고, 말씀이 많지 않지만 경청하려는 자세가 돋보였어요. 상당히 진중한 분이에요. 지역위원장들 잠시 만나다 보면 저녁도 같이 먹고 티타임도 같이하게 되는데, 이럴 때 말을 자른다든가 하는 일 없이 무조건 경청하는 자세가 열려 있어요. 위압적이다, 권위적이다 하는 느낌도 없고요.
리: “총선을 4년 동안 제대로 준비하겠다, 그래서 지방선거는 출마를 안 하겠다”라고 얘기해 왔습니다. 그게 갈등을 많이 낳았죠.
변광용: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죠. 제가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조금 있으면 결과가 드러나겠지만. 저 혼자만의 욕심이라기보다는 거제의 현실, 어떻게든 지방 권력을 교체해야 하는 상황 등이 제가 시장에 출마하도록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줬던 것 같아요. 자기 욕심 때문에 나왔다,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제가 욕심 차리려면 지방 선거 나오면 안 돼요. 시장을 세워서, 그 시장을 통해 총선으로 가는 게 훨씬 편한 길일 수 있죠. 하여간 그래서 이게 실패하면 더 이상 정치 현장에 서는 게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시장 출마라는 선택이 극적이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리: 경선 과정에서 이래저래 공격에 시달렸는데도 압도적으로 승리한 이유가 어떤 게 있을까요?
변광용: 굉장히 안타깝고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정략적 차원이다 싶다가도, 서로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된 부분이 안타깝게 느껴지고 그래요.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경선 끝난 이후에도 그걸 꿍하게 간직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크게 포용하고, 안고 가고 싶죠. 결국 시민들은 저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동안 지역에서 고생 마이 했다, 하는… 그 안타까움이 선거 과정 내에 좀 깔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희들이 세 차례 여론조사를 쭉 해보니까 크게 변화 없이 경선 초에 나온 수치가 그대로 유지돼요. 저변에 깔린 시민들의 신뢰가 흔들리지 않고 계속 저를 지켜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리: 50년 넘는 인생에 굴곡이 계속 있었던 것 같은데, 만약 ‘변광용답다’란 걸 설명한다면 어떤 식으로.
변광용: 욕이 될지 긍정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람은 좋다, 순수하다’라는 평가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지 계산 못하고 지 거 챙길 때 못 챙기고 지 사람 심어서 세력화 못 하고, 어찌 보면 정치인으로서 좀 무력해 보일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