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글은 피해자 관점을 부정하기 위해서 쓰인 글이 아니다. 2차 피해 문제의 심각성을 흐릿하게 만들거나 가해 중심 관점을 옹호하는 목적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에 등장하는 2차 가해의 남용, 피해자중심주의의 오용 등과 같은 문제는 윤리적 기준과 기대가 매우 높고 성원들의 공동체 의식을 요구할 수 있는 시민사회와 인권단체, 노동조합 및 정당, 학생회와 동아리, 페미니스트 내부 그룹 등에 한정되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들은 여전히 피해자의 말을 무시하고, 사건을 은폐하며, 가해자는 어떤 타격도 받지 않고 끝난다. 이 글은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사회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닌, 윤리적 기준과 젠더 감수성을 가지려 노력해온 사람과 집단 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의 폐해에 한정해서 작성되었다. 이 점을 반드시 유념하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그런 제한적인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이 글을 쓴 이유는, 한발 더 나아간 곳에서 2차 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개념의 오용 혹은 오해로 인해 사건의 해결이 요원해지고, 그 결과 모두가 문제해결능력을 더더욱 잃어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는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문제 해결과 변화를 견인해냈던 힘센 개념이다. 하지만 잘못 휘두르면 다른 부수적인 피해가 남게 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두 개념은 잘못 이해되어온 측면이 있고, 이제는 부수적인 피해 수준을 넘어 해악을 끼치는 측면이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1. 2차 가해라는 개념이 오용되는 문제에 대하여
우선 성폭력 ‘2차 피해’라는 개념부터 살펴보자. 이 개념은 성폭력 사건 발생 이후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즉, 1차 피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사재판과정을 비롯한 일련의 문제들을 2차 피해라고 부른다. 2차 피해는 1차 피해를 해결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지속시키므로 결과적으로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어렵게 한다.
이는 ‘사회적 강간(social rape)’이라고 불리는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는데, 형사사법 절차 과정에서 경찰이 피해자의 말을 성 통념에 의거해 불신하거나 피해자가 가족 등의 조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소외나 배제를 경험하는 일, 법정에서 판사가 가해자의 미래를 걱정하고 피해자의 행실을 비난하는 일 같은 것이 대표적인 2차 피해일 것이다. 이는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이 외에 피해자가 의료 조치를 받지 못하거나 적절한 배려와 설명을 듣지 못하는 것, 언론이 사건을 잘못 재현해서 피해자가 꽃뱀 취급을 받게 하거나 선정적인 표현으로 사건 자체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것 역시 2차 피해에 해당한다.
‘2차 피해’라는 용어는 피해자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 이후에도 성폭력을 용인하고 지속하도록 하는 ‘강간 문화(rape culture)’에서 받게 되는 고통을 드러낸다. 이와 구분되어서 사용되는 ‘2차 가해’라는 용어는 불특정 다수가 아무 문제의식 없이 향유하는 강간 문화의 문제를 구체적인 행위자에 의해서 실행되는 문제로 특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강간 문화가 문제야”라고 할 때보다, “네가 바로 문제야”라고 하는 것은 확실한 규제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렇게 ‘2차 가해’라는 말은 강력한 제재가 가능해진다는 장점이 있으므로 ‘2차 피해’와 함께 많이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장점에도 ‘2차 가해’나 ‘2차 성폭력’ 같은 용어의 사용은 가능한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들로 인해 1차 피해에 대한 조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있고, 문제가 전도되어 버려 정작 가해자는 사라지고 결국 피해자는 고립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정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즉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사가 반드시 필요한데 ‘2차 가해’라는 개념이 조사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이후의 논의를 막는 데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참고로 경찰이나 의료인들이 수사과정과 치료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성희롱하는 일이 생겼다면 그것은 ‘2차’ 가해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해결해야 할 성범죄다. 이는 별건으로 따로 고소를 진행하고 처벌해야 할 사안이다. 2차 가해라는 용어는 피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문화 속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문제 제기보다는 그런 문화와 관련된 모두를 가해자라고 지목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의 가장 큰 문제는 이 개념 때문에 1차 피해에 대한 조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정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피해자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2차 가해라는 개념이 문제를 전도시켜 1차 가해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 첫 번째 문제라면, 두 번째 문제는 대다수의 피해자가 가장 괴로운 문제라고 얘기하는 2차 피해인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 소문을 2차 가해라는 말로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경은 박사 논문 「성폭력 2차 피해를 통해 본 피해자 권리」(2012)에서 2차 피해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 피해자 비난, 화간 의심: 72회
- 무시, 무성의, 불친절, 부정적 견해: 54회
- 합의 강요: 47회
- 사생활 침해, 신변 위협: 24회
- 절차고지 안내 부족: 23회
- 반복진술, 신뢰관계인 동석거부, 무고 위협: 19회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피해자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것은 1번과 2번, 통상적으로 말하자면 비난과 뒷담화다. 그러나 반성폭력 운동가들과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제도화를 통해 금지를 요구한 것들은 3-6번 조항이다. 그 결과 완전하진 않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현재 최소한의 제도적 절차들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에게 가장 심각한 고통을 초래하는 비난과 뒷담화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수수방관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법적 금지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뒷담화를 금지하다고 해도 모두 뒷담화를 한다. 강간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캠페인과 교육을 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뒷담화를 하는 사람들을 줄줄이 성폭력 공범으로 모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그렇게 했을 때 무엇이 왜 문제인지 토론조차 불가능해지면서 성폭력을 사회적이고 공적인 문제로 제기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문화는 전혀 바뀌지 않은 채 공포와 혐오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페미니스트 정치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게 아닐까.
조리돌림과 입막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쉬워 보이지만 가장 무능해지는 접근이다.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강력한 강간 문화가 현존하고 있고 이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통념 자체가 아예 드러나지도 않는다면 부딪혀서 변화가 만들어질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이 ‘갈등’을 모두 가해/피해라는 범주로 넣을 필요는 없다.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키워지지 않으면 문제는 그냥 반복될 뿐이다.
2.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하여: 맥락적 지식을 고민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이 용어는 2000년 운동권 내 성차별과 성폭력을 문제 삼는 과정에서 만연했던 ‘가해자 중심주의’에 대응하며 사용된, ‘맥락’적 지식’의 결과였다(이 맥락에 대해서는 『페미니스트 모먼트』에 실린 전희경의 글을 참조하라).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피해자 중심주의는
- 피해자에게 사건에 대한 판단 기준 전체를 위임하는 것이 아니고
- 처벌의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피해자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도 아니며
- 경험에 대한 독점적 해석을 주장하는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자주 오해되어온지라 2005년부터 한국에서 성폭력 문제를 고민하는 일선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이를 ‘피해자 관점’으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되었다. 그럼에도 한 번 만들어진 말이 사라지지 않은 채 통용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피해자 관점’에 대한 판단 기준에 대한 논의는 ‘합리적 여성(reasonable woman)’ 개념 논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논쟁의 요지는 ‘합리적 사람’ 대신 ‘합리적 여성’을 성희롱 사건의 판단 기준으로 삼자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합리적 사람은 대체로 남성으로 상상했으며 상식이나 관습이라는 이유로 성차별주의가 상식이나 관습의 이유로 승인되어오곤 했다를 승인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한국에서는 1995년 박용상 판사가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을 무죄로 판결하면서 “일반상식의 기준”을 들먹여서 이것이 단지 우려가 아님을 증명한 바 있다.
여성학자 조순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합리적 여성의 관점으로 생각하자는 말은 “인식에 있어서의 적극적 조치”를 뜻한다. 예를 들면 직장 내 성희롱의 경우 직장에서 여성들이 겪는 경험과 관점에 기초하여 판단 기준을 세우자는 것이다. 물론 이는 대단히 ‘맥락적’일 수밖에 없다.
피해자 말이 무조건 옳다거나 어쨌든 여자편 들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합리적’이라는 제약을 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합리적 여성’ 관점이 최초로 적용된 앨리슨 대 브래디 판결(1991)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피해자 관점은 성별에 따라서 특정 행동에 대한 관점 차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 합리적 여성이라면 충분히 심각하다고 생각할 만한 행동인가라는 기준으로 판단이 이루어진다.
- 또한 유별나게 예민한 피고용인의 특이성을 배려할 필요는 없으며
- 합리적 여성의 기준은 기대와 맥락에 따라 가변적이다.
그런데 합리적 여성이라는 말 자체에는 여성을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동질적 집단으로 상상하게 하는 오류가 있다. 그래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 누가 그 입장에 있더라도”라는, ‘피해자 관점’의 원칙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중요한 지점이다. 이 모든 논의는 결국 성폭력을 ‘사회 정의’와 관련된 ‘상식’의 문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관련된 ‘협의의 당사자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폭력은 다시 개인적인 문제이자 고통과 불행이 될 뿐이니 말이다. 성폭력을 둘러싼 투쟁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그런 행동은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가기 위한 싸움이어야 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은 피해자의 주관적 느낌은 가해자 중심 사회에서 판단을 할 때 “중요한 참조이자 증거”로 사용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험의 독점적 해석과 무조건적인 지지는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손을 들고 피해자라고 얘기하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불가능해지고 결국은 아무도 얘기를 듣지 않게 되니 말이다. 이뿐 아니라 대응의 미숙 혹은 지연 등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는지는 살피지 않고 모든 것을 ‘편들기의 정치’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반지성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질문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대답하지 않을 자유를 보장하면서 다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을 우리의 새로운 원칙으로 만들자는 얘기를 하고 싶다. 심지어 요즘은 상황과 해석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행동이나 ‘재빨리’ 지지를 표명하지 않는 행동까지 모두 2차 가해로 지목하는 일마저 벌어진다. 지금의 현실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이와 관련해서는 《문학과 사회》 2016년 겨울호에 수록된 김주희의 「속도의 페미니즘과 관성의 정치」가 좋은 참조가 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성폭력뿐 아니라 많은 문제 제기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고통받은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당사자의 요구사항에 빠르게 공개적으로 응답하라.”
“판단과 해석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는다. 그것은 논점을 흐리는 것이며 2차 가해다.”
하지만 고통이란, 대부분 개인이 직접 몸으로 삶으로 겪는 일이고 그것 자체에 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고통이 진정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내가 이 고통과 씨름해가면서 힘들게 깨달은 점은, 고통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피해자와 연대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지속되지 않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약속과 실천이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개인이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때론 피해자가 열심히 도운 주변인들에게 “니가 내 고통을 알아?”라는 날 선 말을 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 피해자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죄책감과 혼란에 주변인들이 괴로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 고통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반성폭력 운동의 시작이었고 여전히 그 고통의 무게를 우리는 함께 짊어지기 위해 고민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고통에 연대하는 방식을, 지금부터 함께 다시 논의해보자고 이 글에서 제안하고 싶다. 고통은 연대의 약속과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매개일 뿐이다. 고통 자체에 연대하라고 하면, 남는 건 서로 경쟁적으로 ‘상처받았다’고 하는 말들뿐일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고통 없는 사회가 아니라 고통 자체에 다른 의미가 쓰이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성폭력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새로운 사회적 질서와 상식이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