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8일부터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됐다. 나같이 언론 매체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 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 나는 이 법의 취지에 동감하고 기자 입장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저녁이 있는 삶으로의 변화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기자실 문화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물론 자발적이지는 않다). 기자실 중 지정석을 유지했던 곳 중 자유석으로 전환한 곳들이 있다. 특정 매체에 대한 특혜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기자에게 주어졌던 정기 주차권도 회수한다. 나는 차가 없지만 주차권 금액이 꽤 크다고 한다. 내가 담당하는 곳은 주차를 하려면 홍보실 직원의 도장을 받아야 해서 기존처럼 기자라고 명함 내밀고 프리패스하지는 못하게 됐다.
어느 곳은 소문을 들어보니 과자나 간식 등을 다 치우고 물만 제공한다. 식권도 안 주는 추세다. 이것도 기자실에 따라 다른데 직원이 동행해서 가는 경우도 있고 아예 기자들에게 줬던 식권을 없애는 곳도 있다. 기자실 운영 비용은 각 매체의 회비로 마련되는데 경우에 따라 이 회비가 오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요즘 기자와 홍보실 관계자 모두에게 듣는 공통적인 말은 “10월부터 저녁 약속이 없다”는 것이다. 다들 몸을 사리고 있다. 나부터도 최소한 ‘김영란법 위반 1호’가 돼서 흑역사로 남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녁 약속이 사라지면서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는 듯하다.
홍보팀 직원 중에서는 건강이 좋지 않은 분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매일 홍보 업무를 위해 저녁 회식 자리가 있고 과음하는 분위기다 보니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회사 업무, 회사를 위한 희생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저녁 회식 자리엔 굉장히 낭비적인 요소가 많다. 간단하게 저녁 식사만 해도 될 것 같은데 ‘관행’이라는 미명 하에 고가의 코스 요리가 나오고 폭탄주도 엄청나게 마시니 말이다. 주니어 기자들은 고참 기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술 회식 선호도가 낮다.
한 홍보 직원과 점심 약속을 잡았다가 두 번 정도 취소된 적이 있다. 그분이 너무 아파서 휴가 내고 병원에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내가 아는 또 다른 홍보 직원을 만났다고 한다. 그분도 아파서 병원에 간 것이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이분을 만나서 “건강을 회복할 계기가 아닐까요?”라고 했다.
확실한 건 예전보다 이런 관행으로 인한 낭비가 줄어들고, 저녁이 있는 삶, 자기 계발의 삶, 건강해지는 삶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분명히 긍정적인 요소다.
약속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심화
한 홍보팀 부장님이 나한테 제안했다.
“10월부터 저녁 약속도 없는데 편하실 때 한 번 연락 주시죠?”
“김영란법 때문에 당분간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끼리 법 테두리 안에서 가볍게 한잔하면 돼요. 요즘 약속 없어서 시간 잡기도 편한데.”
좀 더 얘기해보니까 기자와 홍보팀 직원들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라면 김영란법 이후 오히려 약속 잡기가 쉬워졌다는 생각, 나아가 약속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에는 홍보팀 관계자들의 저녁 스케줄은 꽉 차 있었다. 그러나 김영란법 시행 이후 최소한 올해까지는 조심하면서 상황을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사회생활, 조직생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시범케이스, 시범타에 걸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몇몇 홍보 직원과는 소주 1병에 간단한 안주를 시키는 가벼운 형태의 저녁 약속을 하자는 대화를 나누었다. 방식은 더치페이며, 혹시나 모르니 2명이 총액 3만 원을 넘지 않는 메뉴로 제안할 생각이다. 농담으로 소맥 폭탄주를 마시면 3만 원 넘어갈 가능성이 있으니까 안전하게 소주만 마시기로 결론이 나고 있다.
이제 기자나 홍보팀 직원 모두 자신의 비용과 시간을 들여 저녁 자리를 갖게 된다. 그리고 내 비용과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기자 입장에서는 업계에 발이 넓어 인맥과 정보가 풍부한 홍보 관계자를 만나고 싶어 할 것이다. 홍보팀 입장에서는 매체력이나 브랜드파워가 크고 공신력 있는 기자들이 만남 1순위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저녁 약속이 싹 사라진 지금 상황에서 아주 편안하게 약속을 잡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찾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이 수많은 옵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반면 매체력이 낮거나 갑질을 일삼는 기자들, 정보력이나 인맥이 부족한 홍보 직원들은 이 경쟁에서 아주 불리할 것이다. ‘김영란법’이라는 명분도 있어 거절하기도 쉬워졌다. 이게 결정적일 수 있다. 실제로 홍보 관계자들과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눈 결과 홍보 신입직원의 경우 앞으로 굉장히 고생할 수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었다. 신입직원이 기자들에게 줄 수 있는 가치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서서히 기자-홍보 모두 상대방에게 ‘만남의 가치’가 있어야 약속이 이뤄지는 트렌드가 보다 강해질 것 같다.
갑질 양아치 기자들의 입지 축소
김영란법 시행 전후로 동료 기자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이 법의 시행으로 상당한 타격(!)이 예상되는 기자였다. 다들 지목하는 대상들이 거의 일치했는데, 이들의 특징은 홍보팀 상대로 지나친 ‘갑질’과 ‘양아치 짓’을 하는 부류라는 것이었다. 일단 누구나 예상하듯 골프 좋아하는 기자들은 큰 타격이 있을 것이다.
광화문에 위치한 모 중국음식점에서 간장 종지로 벌어진 ‘간장 두 종지’ 칼럼은 기자 갑질의 전형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전 직장에도 갑질의 사례로 들 만한 선배 기자 A가 있었다. 한 번은 점심시간쯤 전화가 와서 누구하고 밥 먹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업무가 많아서 혼자 빨리 먹고 마감하겠다고 대답했더니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 들렸다.
“기자가 왜 혼자 밥 먹어, 홍보팀한테 얻어먹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런 것도 안 하고 뭐 하냐? 너 기자 맞어? 홍보팀이 법인카드 쓰지 개인 돈 쓰는 줄 알어?”
A는 취재는 안 하고 보도자료 몇 개 쓰고 놀다가 후배들한테 홍보실과 저녁 약속을 잡으라고 한다. A와의 술자리가 싫었던 이유는 매번 자기 자랑만 하고 후배는 물론이고 홍보팀 직원을 마치 자기 하인처럼 대하기 때문이었다. A는 후배와 홍보팀에게 갑질하는 재미로 기자를 하는 것 같았다. 정말 술자리 가는 게 고역이었고 퇴사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또 업계에 이른바 ‘비지(Business) 기자’라는 말이 있다. 정식 기자는 아니고 광고를 수주해오면 매체와 일정 비율로 수익을 나누는 기자를 의미한다. 보통 정식 직원은 아니고 산업부장, 경제부장 등의 명함을 받아 별동부대처럼 활동한다. 인센티브를 더 많이 받으려면 광고를 따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리한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기업 CEO의 부정적인 기사를 써서 광고와 딜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기사 중간에 큼지막하게 CEO의 사진을 배치한다. 딜을 하자는 사인인 것이다.
과거 회사에서 비지 기자인 B 때문에 홍보팀은 물론 기자들의 원성이 많았다. 꾸준하게 접촉하면서 업체와 신뢰 관계를 쌓고 있는데 B의 기사로 인해 관계에 영향이 가거나 심지어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상종 못 할 매체라는 이미지를 쌓아가는데도 회사는 비지 기자를 통한 광고수익이라는 달콤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편 C기자는 모 은행 홍보팀 직원이 자신에게 점심을 대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트위터에 실명을 거론해가면서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행사장에 가면 사은품을 챙기기로 유명했다. 한 번은 가방에 너무 많이 담다가 내용물이 쏟아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해 빈축을 산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행사 사은품만 전문적(?)으로 챙기는 부류들도 있다. 열거된 이런 갑질 양아치 기자들의 입지는 앞으로 위축될 것이다.
김영란법은 그야말로 법(法)이다. 회사 내부방침이나 권고사항이 아닌 것이다. 법에 의해 처벌받으며 나아가 소속 매체에서 징계를 받을 수 있다. 홍보팀 입장에서는 이들이 엄청난 특종을 터뜨리거나 브랜드 파워가 강해서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일단 CEO를 걸고 넘어지니 조용히 넘어가고 싶을 것이고, 혹시나 예기치 못한 럭키펀치(Lucky Punch)를 맞을 수 있다. 그러나 김영란법 시행으로 홍보팀은 그들의 공세를 방어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생긴 것이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본다. 업체 고위 관계자에 영상통화를 걸어 “홍보팀의 접대가 시원치 않다”며 고강도 접대를 요구하는 인간, 공짜 물건, 공짜 서비스를 대놓고 요구하는 인간, 홍보팀 직원을 폭행하거나 성추행, 성희롱으로 물의를 빚는 인간 등. 이런 부류들은 기자의 자질이 없는, 아니 기자를 해서는 안 되는 인간들이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이런 갑질 양아치 부류의 기자가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기자들도 자성의 계기 삼아야
4년 전 나는 아주 기고만장했다. 한 번은 출입처 관련 큰 행사가 있었는데, 그 분야를 다루는 기자는 거의 없었다. 그 날 행사 쉬는 시간에 내 명함을 받으려고 홍보 담당자들이 줄을 서는 모습이 보였다. 당시 나는 ‘내가 잘 나서’ ‘내 기사가 훌륭해서’ ‘내 영향력이 커서’ 명절 때 각종 선물이 오고, 내 명함을 받으려고 줄을 서는 줄 알았다.
그 생각이 무너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른 부서로 좌천되고 기자라는 직함을 잃으면서 그동안 받았던 대우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내가 잘나서 그런 대우를 받은 게 아니라 내가 소속된 매체와 매체 파워, 기자라는 직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하게 받았던 접대나 선물들이 싹 사라지고, 약속조차 외면당하는 현실을 처음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공백기를 거치고 다시 기자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이 경험은 정말 도움이 됐다.
김영란법과 관련해 접대를 요구하고 갑질을 일삼는 기자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게다가 클릭만을 노린 저질 기사, 홍보용 기사, 업체 쉴드 기사 등으로 기자에 대한 신뢰도도 상당히 낮아졌다. 게다가 ‘세월호 사건’ 당시 보였던 모습은 ‘기레기’라는 단어가 확산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화 ‘베테랑’ ‘내부자들’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등에서도 기자는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기자들이 가입한 블라인드 앱 반응이나 실제 오프라인에서 기자들과 만나면 다들 현재 기자 문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기자를 그만두거나 전직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을까 싶기도 하고, 김영란법이라는 ‘극약 처방’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자정이 불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자인 내가 봐도 김영란법의 취지를 훼손하려는 기사들이 보였다. ‘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이라는 모 매체 1면 기사는 그야말로 실소를 자아냈다. 김영란법 때문에 기자간담회에서 ‘쫄쫄’ 굶었다는 기사도 엄청난 비난을 야기했다. (지금은 ‘확 달라진 기자간담회 풍경’으로 제목이 수정된 듯하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분명한 건 기자들의 반성과 개선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도래했다는 점이다.
원문: marseilleu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