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인 지원한다면서
세밑에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일을 겪고 있다.
1월 25일 서울시 청년예술단 지원 공고가 떴다는 뉴스를 연극계 선배가 알려주었다. 청년예술단 사업은 예술활동에 뜻이 있으나 돈도 없고 작품을 선보일 기회도 없는, 그리고 한 번도 공공예술지원을 받아보지 못한 청년예술팀에게 1년에 3,500-5,000만 원을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한다. 뭐야, 딱 나를 위한 거 아냐. 공고문을 살펴보았다. 지원을 위한 세부 조건은 이러했다.
- ’17년도 기준 20-35세
- ’17년도 3월 기준 학부생이 아닌 자
- 증빙 가능한 예술활동 경력을 가진 자
- ’17년도 여타 예술 공공지원사업의 수혜를 받지 않는 자
- 예술인 복지재단에 예술인으로 등록돼 있지 않은 자
앞의 네 가지 조건은 납득 가능하고 나에게 부합했다. 그런데 마지막 ‘5. 예술인 복지재단에 예술인으로 등록돼 있지 않은 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예술인 복지재단은 예술인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들의 복지를 지원하기 위해 상시적으로 예술인 자격증명을 받고 있다. 예술인을 일단 많이 증명 시키는 것이 그들의 일인 마냥 대학로 곳곳에서 홍보도 열심히 한다. 실제 자격 조건도 까다롭지 않다. 연극인의 경우 최근 3년 이내 연출을 한 편 하거나, 희곡을 한 편 발표하거나 배우로 세 번 출연하거나, 세 번 기술지원이나 기획인력으로 참여하면 된다. 작품은 지극히 영세해도 상관없다. 3년 안에 조명 오퍼레이터만 3번 해도 예술인 활동증명을 받을 수 있다.
고로 예술인 활동증명은 그 예술인의 경력과 숙련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나도 받지. 나는 작년에 내 사비를 들여 만든 연극을 한 편 연출하고 예술인 활동증명을 받았는데 그건 순전히 예술인 패스 때문이었다. 예술인 활동증명을 받으면 주는 예술인 패스로 국공립 예술기관에서 하는 연극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청년예술인이 이런 이유로 예술인 복지재단에 가입했을 것이다.
오히려 배제된 청년예술인
그런 사유로 국가가 활동 증명한 예술인인 나로서는 5번의 사유에 전혀 납득할 수 없었기에 담당 주무관에게 연락을 취했다. 주무관은 이 지원사업은 대학을 졸업하거나 대학을 다니지 않은 청년들 중에(그러니까 저에요), 지원금을 받지 않았고(그러니까 저요), 예술활동에 뜻이 있지만 형편이 어렵고 기회를 찾기 어려운(그러니까 저에요) 예술가들을 지원하여 사각지대를 해소하는데 이 사업의 취지가 있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이 사업도 예술활동 경력을 요구하고 있는데, 누구나 작은 경력만 있으면 증명받을 수 있는 예술인 활동증명을 받은 예술인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예술인 활동증명을 받았다고 프로도 아니고,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지원조차 못하게 하는 건 불합리하지 않은가. 공감하는 바가 있었는지 주무관은 논의를 해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다.
몇 시간 후에 전화를 준 건 담당 부서의 팀장이었다. 그녀는 계속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제일 답답했다. 내가 여태껏 어떠한 공공지원도 받아본 적 없다고, 음향오퍼레이터만 해도 예술인 활동 증명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도 그녀는 안타깝다고만 했다. 어떤 사업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아니고 불합리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다시 안타깝다고 하며 이 사업의 취지에 예술인 활동증명도 받지 못한 예술인들을 복지재단에 가입시키는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입하지 않은 자들을 가입시키면 될 일이지 이미 가입한 자들을 배제할 이유는 없지 않나. 어려운 사정에 미리 가입한 이들을 칭찬하지 못할망정.
또한 나는 이 사업도 예술활동 경력을 요구하면서 예술인 활동증명 받은 자들을 배제하는 건 모순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지극히 일천한 경력으로도 예술인 증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업 지원자들도 예술인 활동증명 신청만 하면 모두 증명 가능할 거라 했다. 그렇기에 어떠한 지원 사업도 이런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녀 말하길, 선생님(그녀는 나를 선생님으로 불렀다)은 다른 지원 사업도 지원할 수 있지 않으냐고 했다. 나는 예술인 복지재단의 창작준비금도 받아본 적도 없고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도 떨어졌다고 했다. 지원금 받은 걸 거르려면 그럼 과거 지원금 수혜 여부로 심사하면 될 일이다. 그녀는 다시 안타깝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도 안다. 내 꼴이 내 처지가 안타까운 거 아는데, 혹시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를 보셨냐고, 국가에서 예술인 자격증을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더니 시에서는 자격증으로 또 차별한다고, 내가 딱 다니엘 블레이크의 심정이라고 하니 영화는 봤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이쯤 되니 나는 켄 로치의 몰래카메라 속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인 활동 증명받고 다른 지원받은 거 하나도 없고요, 연극 볼 돈이 없어서 할인 몇 번 받은 게 다예요.”
“어쨌든 지원받으려고 예술인 활동 증명 받으신 거잖아요.”
그 답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맺히는 게 분해 죽을 뻔했다. 이 정책을 만든 사람에게 내 모든 마음 모아 저주 내리고 싶다. 자식 낳으면 무조건 꼭 예술 시켜라.
사각지대를 만드는 사각지대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예술 공무원들만 나라를 망치는 게 아니다. 사각지대를 해소한다고 하면서 또 다른 사각지대를 만들고 있는 문화정책. 시민이 불합리를 제기해도 처음 시행하는 사업이니 어쩔 수 없다고 일관하는 공무원들.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현실과는 하나도 맞지 않은 정책으로 폼이나 재고 있는 공무원들이 있는 이런 나라에 무슨 청년이 있고 무슨 예술이 있나.
웬만하면 예술인 패스 받을 수 있다고, 그거면 연극 할인받을 수 있다고, 내가 꼬드긴 덕에 내 동료들은 손가락만 빨게 생겼다. 나 때문에 지원도 못 해보고 우울해 할 그들을 생각하니 원통해 죽겠다.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다. 민원을 넣든 박원순 시장을 찾아가든 되는 데까지 해볼 작정이다.
-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런 불합리한 공공사업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 이 글에 공감하시는 분들은 널리 퍼지도록 공유 부탁드려요. 추후 탄원서에 서명 동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문: 강훈구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