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얘기와 듣고 싶은 얘기
개인 촛불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 된다. 하지만 운동권의 대표나 임원 또는 간부들, 즉 조직 촛불은 자기가 하고픈 얘기보다 상대방이 듣고픈 얘기를 해주면 제발 좀 좋겠다. 운동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조직 내부에서 소화해 주면 좋겠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일까? 2016년 12월 어느 토요일 창원광장에서 열린 촛불대회에서 젊은 여성 한 명이 하는 발언을 들었다. 자기 소감을 얘기했는데 아주 짧았다. 조금 더듬거리고 목소리도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애타는 마음은 짠하게 울려왔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엄마 아빠가 이혼했는데 어떤 이유로 서류상 그냥 부부로 남아 있다, 때문에 동생이랑 셋이서 어렵게 사는데도 나라로부터 생계비를 못 받는다. 삼성이 박근혜-최순실한테 준 뇌물 200억 원의 0.001%만 있어도 오순도순 살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촛불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렇다. 대한민국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한 달 살림에 몇십만 원도 아쉬운 실정이다. 그런데 삼성이 200억 원, 300억 원, 400억 원 되는 돈을 박근혜 일당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뇌물로 주었으니까 열이 나고 꼭지가 돈다. 이런 절실한 마음이 모여 촛불집회가 되었고 촛불광장을 이루었다. 나는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대부분이 마찬가지라고 본다.
개인들은 어떤 숭고한 이상이나 이념을 실현하자는 이야기보다는 꽉 막힌 현실과 버거운 세상에서 비롯된 갑갑함과 답답함을 해결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래서 개인 촛불들은 하고픈 얘기나 생각을 진솔하게 소박하게 풀어놓으면 된다. 다른 촛불 개인들도 심정이 같으니까 바로 마음에 와 닿고 이해가 된다.
개인 촛불과 조직 촛불
하지만 운동권=조직은 자기가 하고픈 얘기나 생각을 적어도 촛불광장에서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촛불을 꺼뜨리는 못난 짓이고 광장으로 향하는 민심을 멀리 내쫓는 나쁜 짓이다.
1월 21일 창원광장 촛불집회에서 벌어진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2017 민중총궐기 투쟁 선포식’이 바로 그러했다. 말투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용은 허술한 추상명사를 늘어놓고 자화자찬까지 덧붙였다. 박근혜와 일당들의 패악과 민주노총의 투쟁 과제는 입체감 없이 평면적으로 그냥 나열되었다. 결과적으로 재미도 없으면서 시간만 잡아먹었다.
민주노총 경남본부 민중총궐기 투쟁선언문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위대한 항쟁을 일궈낸 자랑스러운 민중이여, 중단 없는 투쟁으로 항쟁을 완수합시다! 박근혜 정권 잔당과 적폐를 끝장내고 민주·민생·평화·통일의 새 세상으로 전진합시다!”
그런데 진짜 새 세상으로 전진하고 싶다면 민주노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뒤로 미루거나 조직 안에서만 공유하고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한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지역 노동계에도 얘깃거리는 많다는 것이다. 지금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S&T중공업과 한국산연 노동자들의 사연을 알려주는 것부터 하면 된다. 일본 산켄 자본이 어떤 심보인지 얘기하고 최평규 S&T 회장이 얼마나 골때리는 캐릭터인지 말해주면 된다.
아니면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의 삐뚤어진 행태를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가며 비판해도 좋겠다. 창원고용노동지청 근로감독관들이 지역 기업체들로부터 접대를 받았음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나는 재미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왜 민중 총궐기 투쟁이지? 민주노총은 민중조직총연맹이 아니고 노동조합총연맹이잖아? 민주노총은 이름에 걸맞게 노동자 투쟁이나 잘하면 되는 것 아니야?’
민주노총은 노동자 총궐기 투쟁 선포식이 알맞다. 민중 총궐기 투쟁은 민주노총이 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민중 총궐기 투쟁은 민중이 알아서 하거나 말거나 하면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좀 우습지 않은가? 민중 총궐기 투쟁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나? 민주노총이 선포만 하면 총궐기하여 투쟁 전선으로 달려 나오는 것이 민중인가?
나는 언론노조에 소속되어 있고 언론노조는 민주노총 산하조직이다. 그렇지만 나는 2017년 민중 총궐기 투쟁과 관련한 논의나 결정을 제대로 모른다. 민주노총 조직 노동자들도 잘 모르는 게 민중 총궐기 투쟁이다.
촛불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았으면
예컨대 이런 얘기는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석기 통합진보당 얘기는 여태까지 한 것만 해도 지나치게 많다. 한상균 위원장 석방은 지금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큰일을 할 때는 자기 조직 얘기는 최대한 꺼내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면 마치 사심이 있는 것처럼 비치기 쉬우니까. 촛불집회가 잘 진행되고 확산되면 한상균 위원장의 석방은 당연히 빨라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지금 민주노총은 한상균 위원장 석방 구호를 외치는 대신 촛불광장과 민심을 키우는 데 더욱 힘써야 마땅하다. 민주노총이 할 일이 이것이다.
민주노총 경남본부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얘기도 했다. 이석기 관련 구호는 촛불 대중한테 가장 불편하다. 나는 이석기와 통합진보당이 실정법과 관련해서는 분명 무죄라고 생각한다.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과 이석기 구속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석기와 통합진보당이 실정법상으로는 무죄라 해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 마음에는 유죄다. 이를테면 ‘국민정서법’ 위반이다. 북한을 이상 사회로 여기는 언행, 공공연한 또는 은밀한 북한 추종,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RO 타령 따위가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정서에 반한다는 얘기다.
‘국민정서법’은 정당이나 정치인은 절대 위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용서를 받고 사면을 받기가 가장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정당과 정치인은 민심의 바다에 배를 띄우는 것이다. 이석기 석방은 이석기가 몸담은 조직이나 통합진보당 세력이 주장하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나는 민주노총이 촛불 공격 빌미를 주지 않으면 좋겠다. 다 같이 둘러앉은 밥상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반찬이라고 남한테까지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주노총 경남본부의 속셈이 광장 촛불을 꺼뜨리는 데 있다면 이석기 석방 구호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겠지만.
이날 집회에 참여했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민주노총이 발언할 때 내내 불편했다. 박근혜 퇴진 하나만 해도 힘든데 무슨 한상균·이석기 타령까지 듣고 있어야 하나. 날씨도 추운데 이런 얘기나 들으려고 나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이렇게 한 마디 덧붙였다.
“쎄빠지게 해서 어렵게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촛불을 반대하거나 관망하는 사람들한테 촛불을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빌미를 줄 수 있는 게 이석기 석방 운운이다.”
이게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