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존 로크는 “인간은 필요에 의해 주권을 국가에 일부 양도했다”고 주장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대리인인 국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헌법이 없으면 국가는 통제 불능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몰린 것도 헌법을 농단했기 때문이다. 즉 국가의 기둥이요, 법의 아버지다. 기둥이 무너지면 국가란 집에서 사는 국민이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축구에도 규칙이 있다. 오프사이드는 없어서는 안 될 규칙 중 하나다. 최근 오프사이드 폐지에 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축구 전술의 퇴보를 불러올 것이다.
지난 150여 년간 축구 전술은 발전을 거듭했다. 공은 그저 슈팅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잉글랜드식 믿음은 오프사이드 규칙이 보편화함에 따라 점점 옅어져만 갔다. 오프사이드 폐지는 패스 축구의 실종과 극단적인 킥앤러시 축구를 불러온다. 현행 규정은 골대와 킥을 한 아군 선수 사이에 두 명 이상의 상대 선수(골키퍼 포함)가 존재하면 온사이드가 성립된다.
이러한 규정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오프사이드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에 키 큰 선수 여러 명을 골대 근처에 배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굳이 수고를 들여 아기자기한 패스 플레이를 펼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롱볼 한 방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축구가 유행하게 된다.
킥앤러시 일변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오프사이드의 폐지는 극단적인 수비축구의 유행을 낳는다. 수비진 입장에선 거구의 공격수들이 아군의 골대 주변에 서성이는 게 부담스러울 게다. 수비진을 보강하지 않으면 롱볼을 노리는 맹수들을 따돌릴 수 없다. 따라서 감독으로선 중원과 공격진에 있는 아군의 일부를 수비진으로 내리는 전략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반 바스텐 FIFA 기술분과 위원장은 “오프사이드 폐지로 인해 연일 화끈한 골 잔치가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비진이 점점 비대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을 반 위원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오프사이드가 없었을 땐 지금보다 두 배 이상 골이 터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는 수비 전술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을 때다. 1850년대 이야기다.
극단적인 수비 일변도의 축구는 ‘상대 진영에서의 압박’ 전술의 퇴조를 의미한다. 높은 위치에서 오프사이드 트랩을 형성해 상대 공격진을 무력화하는 전략은 이제 리누스 미헬스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많은 팀이 이를 기본 전술로 삼고 있다. 이를 잘 사용하는 팀은 상대에게 공격권을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높은 위치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이득을 얻는다. 즉 빌드업 하는 거리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오프사이드가 폐지되면 당연히 오프사이드 트랩 전술도 사라진다. 수비라인을 높게 유지할 명분이 없어지는 셈이다. 앞서 말한 대로 키 큰 상대 공격수에게 위기를 허용할 수 있다. 빠른 공수 전환의 재미가 사라지는 건 덤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결합해 살아간다. 혼자선 살아남을 수 없다.”
소련의 저명한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의 말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혼자 하는 축구를 좋아할 축구 팬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정교한 패스 플레이와 상대 진영에서의 조직적인 압박을 보고 싶어 한다. 오프사이드 폐지는 조직 축구의 재미를 앗아간다. 바글바글하던 경기장은 적막이 감돌 것이다. 규칙 하나가 사람 마음을 좌지우지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가 없을 때 국가가 어떻게 돌아갈지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원문: 시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