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무지개’ 커뮤니티
소수 속의 또 소수
게이다가 작동하지 않을 때
안녕하세요, 미디어피쉬입니다.
그간 퀴어라이프에 대한 우려와 질책의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스포일러를 안 하는 선에서 사죄드리다려다 보니 해명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 본 편을 기회로 다시 해명 및 사과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글이 퀴어라이프를 향한 모든 비난에 대한 해명은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저희가 받았던 질문과 질책들은 최대한 포함하고자 성실히 쓰려고 합니다.
또한 본 해명문에 저희의 제작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며, 이 점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보통의 사과문에서 ‘가해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니 사과하지 않겠다’는 태도일 때 특히 지적되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저희의 제작 의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저희가 어느 부분에서 판단을 잘못했는지 과정 전체를 솔직히 알려 드리기 위한 목적이 전부이며, 사과를 피하려고 하거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님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바이섹슈얼에 대한 편견
20화의 내용 중, ‘스스로 바이라고 소개하는 젊은 게이를 만난 뒤, 등장 인물들이 우리도 그렇게 말하곤 했다며 웃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저희가 의도했던 내용은 이렇습니다.
타인의 입장을 취해서라도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경험이 있는 등장인물들이, ‘어떤 계기’로 인해 자신들의 과거가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이제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게이라는 정체성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고 편안해진 것이다.
주류 사회가 인정하는 최소한의, 소위 ‘정상성(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여자를 좋아한다)’을 포기하기가 어려워, 바이라는 정체성을 빌려 자신과 타협했던 경험을 공유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저희는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 ‘어떤 계기’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즉, ‘스스로 바이라고 선언하는 젊은 남성’을 과거를 떠올리는 계기가 되는 ‘장치’로 사용한 것입니다.
사람을 장치로 대상화할 때는 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스스로 바이라고 선언하는 남성을, 그 캐릭터가 대변하는 분들의 실제 입장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소비했습니다.
스스로 바이라고 정체화 하는 분들께, 1)바이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고, 2)한 인물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가볍게 여기며, 지레 짐작하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연출로 인해, 같은 성소수자 내에서 하는 커밍아웃에 벽을 만들었습니다. 바이섹슈얼로서는 듣는 이가 비웃지 않을까, 조롱하지 않을까, ‘나도 옛날에 그랬다’며 아는 척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공개 전에는 등장인물들이 바이섹슈얼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캐릭터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들었습니다만, (저희 나름대로는) 바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내용은 아니었고, 또한 다음 주면 수민이 바이섹슈얼 친구를 만나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것이라고 안일하게 판단했습니다.
또한 수민이 소위 관심법을 휘두르는 꼰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했었습니다만, 수민의 캐릭터가 백발백중 게이다(게이를 감지하는 레이다. 직관)를 가졌다는 캐릭터 특징으로 풀어나가는 차후의 에피소드가 있기에, 이 역시 차차 해결될 거라고 무책임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작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그 바이라고 선언하던 그 남성 캐릭터를 ‘실제로 완벽한 게이’라고 설정했다는 사실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선언하는 순간’입니다. 어떤 캐릭터든 스스로의 정체성을 선언했다면, 저희는 그것을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도록 표현해야 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추억을 떠올리는 계기로는 정체성을 선언하는 사람 대신, 더 적절한 장치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이 부분의 작법에 대해서 저희가 실수한 것이 사실이며, 많은 분들께 상처를 드렸습니다.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세련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연출을 고민없이 내놓았습니다. 이런 저희의 실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게 사과 드립니다.
2. 왜 반성하는 내용까지 한 편에 다루지 않았나?
보시다시피 21화는 동성애 커뮤니티를 공통 분모로 하여, 차후 또 등장할 레즈비언 캐릭터와 바이섹슈얼 캐릭터인 선호를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선호의 입을 통해서,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바이섹슈얼의 소수자적 입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동시에 ‘바이’라는 키워드로 박민준이라는 캐릭터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추가적으로 탈이반 이슈도 동성애 커뮤니티 내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지 풍경으로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20화 내에 한 번에 다 다루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큰 고민없이 끊었습니다. 이 또한 안일한 판단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불쾌한 낚시가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올바르고 당연한 문제 제기를 한 분들을 놀린 셈이 되었습니다. 다음 화에 이어진다는 내용의 약간의 복선만으로도 이런 사태를 예방하고도 남았던 것인만큼, 저희의 게으름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에 지적해주신 많은 분들께 사죄를 드립니다.
3. 불륜 및 위장 결혼 옹호
저희의 입장을 말하자면 위장 결혼을 옹호하지 않으며, 위장 결혼을 했다고 그려지는 박민준이란 캐릭터는 악역이고, 또한 당연히 악역으로 그리고자 합니다. 아직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까지 위장 결혼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면 그 또한 저희의 실력 부족이고 저희의 책임입니다.
또한 과거 수민과 민준과의 관계는 박민준의 결혼 전에 있었던 일이며, 앞으로 민준과 수민이 어떤 관계가 될지는 남은 이야기에서 풀고자 합니다. 다만 불륜을 애틋하게 그리거나 위장 결혼한 게이도 사회의 피해자라거나 하는 식의 방향은 아니란 점만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여성혐오적 표현
등장 인물들이 일반 사회 속에서는 여성스럽게 보이는 걸 두려워하는 모습이나 ‘여편네’와 같은 단어 사용, 전근대적 클리쉐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전체적으로 여성혐오적이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등장 인물들은 일반 사회 속에서는 여성스럽게 보이는 걸 두려워하지만, 커밍아웃한 커뮤니티 속에서는 마음껏 표출하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는 것이므로, 여성성 비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환경적 맥락, 사회적 맥락 및 시대상이 반영된 캐릭터의 특징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각자의 한계가 있는 캐릭터들의 태도를 무조건 옹호하거나 동조하는 느낌으로 연출되지 않도록 더 많은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여편네’와 같은 대사를 등장 인물이 그대로 옮기거나,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구도를 따르는 여성 캐릭터들이 나오거나, 여성이 남자에 비해 무지하거나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여성성을 희화화해서 취급하는 연출들이 모두 조금씩 전근대적이고 시대 착오적이며 여성 혐오적일 수 있다는 지적에도 공감합니다. 성소수자를 다루는 작품인만큼 조금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과 연출, 캐릭터를 연구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거기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현대 일상을 사는 어느 성소수자들의 모습을 그리려는 시도를 위해, 여성성을 구태의연하게 이용하고 말았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했던 안일한 태도가 더욱 부끄럽습니다. 설령 다른 작품들에서 허용되는 표현이었다 할지라도, 저희는 더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매 표현을 적당히 타협해 온 판단들이, 이번 일로 모두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게을렀고, 제작을 얕봤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앞으로는 여성 및 기타 약자를 좀 더 공정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5. 일부만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굳이 소재로 삼는 이유
저희 작가님께서 ‘소수의 경험이라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도 모두 다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저 스스로 게이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절대로 ‘바이는 게이의 중간 과정이다’라는 편협한 주장을 하겠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최초에 작가님께서는 사람이 백이면 백 다 다르고, 게이 역시 그만큼 다양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소수의 등장인물들의 경험을 위주로 진행되는 퀴어라이프를 기획하셨습니다.
그렇게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취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섹슈얼에 대해서만은 배제한 듯한 연출을 했기 때문에 더욱 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퀴어라이프 연재가 끝나면 작가님께서 직접 지면을 빌려 정리하고자 합니다.
6. 끝으로
많은 질책과 비난, 모두 감사드리고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잘못은 제대로 필터링하지 못했던 회사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 드리며, 다만 작가님의 개인 신변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은 자제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본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작가님과 작가님 주변의 경험들이 녹아 있지만, 캐릭터화 되어 있으며 모든 대사가 작가님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님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대사들도 캐릭터성 때문에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오해하게 한 건 순전히 저희의 작법 미숙이며,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 신경써서 고쳐 나가겠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