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겪은 일이다. 우연한 기회로 베를린의 한 성당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청년 담당 보좌신부를 만났다.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한 그는 젊은 신부이면서 신학대학 박사과정생이었고 카톨릭 공동체 윤리와 인정 개념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논문이 거의 다 완성되었을 때, 그가 주로 참고했던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가 갑작스레 『사회주의의 이념(Die Idee des Sozialismus)』이라는 책(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사회주의 재발명』)을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탈고를 미뤄야 했다고 한다.
카톨릭 신학과 악셀 호네트, 그리고 사회주의.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세 개의 키워드가 하나의 논문에 공존하는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이 묘한 교차의 순간에 느낀 지적 호기심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호네트의 반전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 3세대로 불리는 악셀 호네트가 사회주의에 대한 책을 썼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 ‘인정윤리’로 잘 알려진 호네트와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맑스는 물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선배 학자들이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아직 비판적으로 계승하던 시절, 호네트는 그들 공통의 이론적 전제, 즉 자본주의를 ‘총체성’으로 기술하는 (좌파 헤겔주의적) 관점을 정당화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역사철학적 사변의 잔재로 취급하지 않았던가?
동시에 90년대 호네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인정윤리’로의 전환은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모든 형태의 시도들을 (경제)환원주의로 공격하지 않았던가? 또한 근대 사회에 내재했으나 아직 실현되지 못한 인정 규범의 잠재력을 현 체제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사회주의’의 기표를 여전히 향유하고 있었던 모든 형태의 좌파적 담론진영을 구시대적인 잔재로 냉소하지 않았던가? 호네트 자신은 어떤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가 유행시킨 ‘인정윤리’ 담론은 그러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에게 인식되고 수용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가 ‘사회주의’라는 (수많은 좌파 지성들이 차마 말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품어왔을) 개념을 제목에 넣으며 다시금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냈을 때, 그를 옹호해왔던 사람들(호네트를 사회주의의 대항마로 응원해왔던 사람들)과 그를 비판해왔던 사람들(사회주의를 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온건공동체주의 정도로 치부해버린 좌파 독자들)은 공통의 당혹감을 경험했다. 그가 머리말에서 “사회주의에는 결단코 아직도 살아 있는 불꽃이 도사려 있음”을 증명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 모두를 ‘멘붕’ 시킨 반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사회주의자’ 선언의 배경
이를 의식해서인지 호네트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자신의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가 몇 년 전 펴낸 『자유의 권리(Das Recht der Freiheit)』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제기한 비판, 즉 그가 기존 사회질서의 변혁이라는 비판적 관점을 폐기했다는 공격에 대응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호네트는 이런 비판이 자신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해명하고자 했고, 그가 “제도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회질서”를 수용한다는 점을 보여주며 일종의 방향전환을 꾀하고자 했다.
그의 전작 『자유의 권리』는 ‘민주적 인륜성’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헤겔 법철학을 현대 사회의 민주주의 규범에 맞게 적용하면서, 현대 사회의 규범적 원리에 숨어 있는 사회 정의의 실현 가능성을 전망한다. 이 책에서 호네트는 그가 자신의 대표작 『인정투쟁』에서 전개한 인정윤리 규범을 넘어서는 정치적 제도화와 관련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인정윤리에 대한 논의가 현대 사회의 상호주관적 관계에 관한 도덕 규범 이론은 될 수 있지만 현대 사회나 정치 제도에 관한 거시적 분석과 대안적 담론이 되기에는 미흡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넘어서기 위해, 호네트는 민주주의라는 사회제도의 규범적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에 착수했고 그 귀결이 『자유의 권리』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가 그리는 정의로운 사회의 규범에 대한 모든 전망은 새로운 논의가 아닐뿐더러, 이론적으로도 치밀함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가 제기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롤즈와 하버마스의 규범적 정의론을 넘어서겠다는 과감한 포부를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세우는 민주적 인륜성에 대한 논의들이 롤즈와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정의 규범과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좌파 진영은 호네트의 논의가 기존 사회의 작동원리를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현 체제를 규범적으로 옹호하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가혹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러한 배경에서 호네트가 느꼈을 답답함이 『사회주의 재발명』이라는 도발적인 책을 펴낸 계기로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1960년대부터 꾸준히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관계를 맺어오면서 좌파 정치와 관계를 떼지 않았던 자신의 행보가 좌파 진영으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느끼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책이 출간된 직후인 2011년 미국에서 월가 점령(Occupy Wall Street) 시위가 등장하고 ‘99%대 1%’라는 도발적 문제 제기가 전 세계에 공감을 형성하던 상황에서 그는 이 시위를 옹호하고, 국제적 금융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요구했으며, 나아가 인터뷰마다 자신이 독일 최대 공업지역인 루르 지역에서 10대와 20대를 보내면서 노동자 운동과의 연관성 속에서 성장한 철학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전개된 호네트의 ‘사회주의자’ 선언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책은 사회주의의 개념과 역사, 전망에 대해 기대를 뛰어넘는 예리하고 명확한 진단과 분석을 감행하며, 때로는 매우 논쟁적으로, 때로는 설득력 있는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보기로 한다.
서론에서 호네트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에 대한 대안적 전망과 상상력이 오늘날의 사회 양극화를 향한 분노에 결여돼 있음을 지적하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 기존의 이론가들은 1) 소비에트 현실사회주의의 종말, 2)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거대담론의 영향력 상실 3) 사회적 관계의 복잡화와 물신주의화를 이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호네트는 이 세 요소만으로는 오늘날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고갈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답변을 제시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한다. 오늘날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가질 수 있는 현재성은 이러한 질문의 답변과정에서 제시된다.
사회주의의 탄생 배경과 의미
호네트에 따르면 초기 사회주의는 프랑스 혁명이 낳은 새로운 규범적 요구들의 잠재력 속에서 등장했다. 자유, 평등, 우애(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요구는 자본주의와 사적 이익추구의 보편화라는 경제적 발전과정과 합치되지 못함으로써 현실 사회에서 실현되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시몽과 푸리에, 오웬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부터 맑스에 이르기까지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체제를 상상했다. 프랑스 혁명이 요구했던 연대적 사회체제를 향한 도덕적 동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들은 사회가 달성해야 할 규범적 요구로 사회적 자유를 제시한다. 이는 부르주아 계급이 요구했던, 사적 이익에 기반한 개인적 자유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호네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연대적 공동체를 자유 실현의 담지자로 이해”하는 운동이었다. 즉 사회주의의 출발선은 새로운 형태의 자유에 대한 요구였으며, 이를 우애, 즉 연대를 통해 실현한다는 면에서 사회주의는 곧 ‘사회적 자유’에 대한 이념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회주의의 태생적 한계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 이념은 그 태생적 한계들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첫째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다는 그 목표에도 불구하고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19세기 산업주의의 한계 속에서 사회주의를 사고함으로써, 사회주의를 하나의 경제모델로 환원하였을 뿐 그 정치적 함의와 제도적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말았다.
둘째로 초기 사회주의자들 특히 맑스는 사회주의의 요구를 대항적 피지배계급인 산업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동일시함으로써 특정한 계급에 대한 신화적 표상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노동자계급 전체가 하나의 통일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 이 때문에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필연적일 것이라는 낙관적 가정이 등장한다.
셋째로 이러한 이유로 초기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을 역사적 필연성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증명 불가능한 역사철학적 도그마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 속에서는 ‘생산력의 발전’ 또는 ‘계급투쟁’에 의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으며, 사회주의를 이러한 필연성으로 이해함에 따라서 사회주의가 다양한 시행착오 속에 전개될 것이라는 방식의 실험적 사고를 가질 수 없었다.
즉 사회주의자들은 필연성을 통해 도달할 ‘완성된’ 사회주의에 대한 관념에 의존함으로써, 사회주의가 다양한 사회적 실험들을 거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또 시장에 대한 완벽한 계획이 통제가 가능하다는 그릇된 믿음에 빠졌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관료적 계획경제가 사회주의와 동일시되었다.
호네트가 추구하는 것
바로 이러한 초기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의 태생적 이념을 현대사회의 원리에 맞게 복원하는 것이 호네트가 추구하는 방식이다. 그 핵심으로는 앞서 언급한 ‘사회적 자유’를 사회주의의 핵심적 규범적 원리로 소생시키는 것, 이를 통해 획일적 통제가 아니라 사회의 기능분화를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촉진하면서도 이 자유를 연대적 관계 속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는 ‘민주적 생활양식’으로서 사회주의를 제도화하는 것, 나아가 시장과 자본주의를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시장의 틀 위에서 연대적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 포함된다.
이러한 호네트의 이론적 설명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력적이다. 특히 롤즈의 자유주의적 정의론부터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나아가 보편적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경제적 분배정의’와 사회주의가 어떻게 이념적으로 구분되는가를 논하는 데 이 책의 장점이 있다. 호네트는 사회주의 이념의 규범적 요구의 핵심을 ‘사회적 자유’에서 찾음으로써, 사회주의를 단순한 경제적 재분배 논의로 환원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이 그가 경제적 재분배 요구에 반대한다고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사회주의가 ‘자유’와 맺는 관계를 매우 정밀하게 탐색하려는 시도이며, 이를 통해 호네트는 사회주의가 단지 자본주의를 넘어선 또 다른 형태의 경제체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실현하려는 목적을 갖는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또한 초기 사회주의의 규범적 원동력을 발견하고, 그 좌초지점을 내재적으로 분석하려는 그의 시도 역시 이론적으로 매우 탁월한 관점을 제시한다.
호네트의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네트의 사회주의론에 몇 가지 한계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호네트는 이 책에서 맑스에 대한 매우 폭넓은 지식을 자랑하며 맑스의 사회주의론이 갖는 강점과 한계를 분석한다. 전자는 주로 그의 초기저작들에 나타난 ‘도덕적’ 혹은 ‘인간주의적’ 자본주의 비판과 관련된 것이며, 후자는 특히 후기 저작들에서 나타난 경제환원론, 노동계급 환원론을 집중적으로 겨냥한다.
이러한 호네트의 맑스 이해가 갖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맑스의 이론적 궤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 이 복잡한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지만, 한 가지 지적해둘 점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저작들, 특히 『자본론』과 『그룬트리쎄』는 단순히 경제환원론이라는 비판을 통해 기각될 수 없는 이론적 성과들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그 총체성을 사유하려는 모든 지적 시도를 형이상학의 잔재로 치부하는 호네트의 태도는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시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에 비자본주의적인, 가치 중립적인 시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 역시 경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이 그 자체로 자립화되어 사회적 관계 전반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사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시장과 교환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관계의 핵심적 토대로 기능한다는 설명을 호네트는 거부한다. 반면 그는 비자본주의적 방식의 시장과 교환이 가능하며, 이것이 연대적인 방식의 사회적 분업과 결합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호네트가 ‘통일된 계급 이해관계’라는 맑스의 관념이 19세기 산업주의의 산물이라고 지적하듯(이러한 지적은 물론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다), 이러한 호네트의 시장사회주의의 전망 역시 시장의 관계가 전면화된 21세기 사회의 산물은 아닐까?
이러한 지적들은 물론 부차적인 논점일지도 모른다. 사실 호네트가 맑스를 제대로 이해했는가, 시장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했는가 하는 것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사회주의 이념의 핵심을 ‘사회적 자유’에서 구하는 것이 호네트의 주장이 갖는 핵심내용이라면, 위에 제기된 비판들은 다소 주변적인 논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 가지 점에서 필자는 호네트로부터 결정적인 관점의 차이를 발견한다.
호네트는 ‘사회적 자유’의 실현이라는 사회주의의 이념을 사회적 제도와 관련된 규범으로 이해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사회주의를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이해관계의 충돌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투쟁으로 이해하는 방식과 결정적으로 단절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호네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저항하는 주체 형태들이 아니라 이미 객관적으로 실현된 개혁이, 그리고 집단적 운동이 아니라 제도적 성과물이 사회주의가 근대 사회에 등록한 규범적 요구들의 사회적 담지자로 간주되어야 할 것들이다.
탈정치화된 사회주의
이렇게 사회주의를 제도적 규범으로 축소, 환원하는 호네트의 이해방식은 내 생각으로는 사회주의 이념을 탈정치화할 뿐이다. 물론 호네트는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경제환원론을 비판하면서 명시적으로 사회주의가 정치적 제도로 실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여기서 호네트가 이해하는 ‘정치’라는 용어는 사회적 관계들의 배분과 유지, 개선 등을 수행하는 행정적, 제도적 심급을 총괄하는 의미로, 이는 랑시에르적 용법으로는 ‘치안(police)’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호네트에게 정치는 ‘사회적 규범이 어떻게 제도화되어 구체화되는가’라는 물음과 관련된 것이며, 현실적으로 이는 현존하는 사회 제도들이 그 기능적 자립화에서 벗어나 도덕적 규범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사회적 제도와 그 규범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과 투쟁이라는 집합적 행위를 포괄하지 못한다.
“이제 사회주의의 실현을 보장하는 것은 이를 추구하는 사회운동이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적 방향을 가리키는 제도적 개혁을 야기하고 있는 사회주의의 규범적 능력과 힘이어야 한다.”
정치를 사회적 제도와의 연관 속에서만 사유하는 사고방식은 이러한 정치적 행위들을 오로지 일탈로 간주하거나, 그 요구를 흡수하여 기존 제도를 보수하는 데 동원하는 수단적 의미만을 부여할 뿐이다. 여기에는 ‘치안에 대항하는 정치’에 대한 사유는 빠져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제환원론적 사회주의에 맞서 자유에 대한 도덕적 규범을 정치 영역을 통해 제도화한다는 호네트의 사회주의 표상은 매우 역설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탈정치화’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사회주의를 특정한 방식의, 기존 제도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제도 규범으로 확정하고 그 규범을 모색하려는 시도들은 하나의 난관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그것은 호네트 자신이 초기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지적한 대로 사회주의를 하나의 완성된 체계로 이해하는 경향이다.
사회주의적 대안사회체제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중요성과 별도로, 대안사회의 (완성된) 구체적 규범적 근거들을 모색하려는 시도들은 어쩔 수 없이 현재 사회가 만들어낸 의식의 대전제 속에서 이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사회주의에 대한 표상은 과연 현재의 지배적 의식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일 수 있을까? 산업자본주의를 넘어서려 했던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사회주의상이 역설적으로 19세기 산업주의를 넘어서지 못하였듯이, 현재의 지배적 의식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미래 사회의 제도적 규범을 설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호네트의 의미: 자유의 이름으로 선언된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하나의 달성된 상태가 아니라 부단없는 운동을 통해 현재 상태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방식의 관념만이 이러한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맑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표현된 저 유명한 코뮨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정식, 즉 “코뮨주의는 달성해야 할 상태, 현실적으로 지향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 운동”이라는 정식, 그리고 이는 “기존 사회상태에 대한 더욱 결정적이고 더욱 급진적인 부정”이라는 표현에 담겨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지향하는 원칙으로 이어진다. 즉 미래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 아니라, 현재 상태를 초월하려는 부정의 몸짓만이 진정으로 구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를 대중운동, 그리고 ‘치안’으로서의 정치에 맞선 ‘대항정치’의 출현과 분리시켜 사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몇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호네트의 사회주의자 선언이 매우 고무적인 사건일뿐더러, 이 책이 지닌 예리한 통찰력은 매우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언급해야겠다. 우리는 그동안 ‘사회주의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자는 요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지 않았던가. 그러나 호네트는 사회주의 이념의 근원적인 규범적 요구가 바로 미완으로 그친 ‘자유’의 실현에 있다는 점을 매우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자유는 평등, 우애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등한 자들 사이의 우애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의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개인의 자유만을 유일한 자유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개인주의적 자유 관념으로부터 탈피할 때, 즉 연대적 관계 속에서 각자가 ‘타인을 위해’ 활동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에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현대 사회에서 모든 역사적 정치적 사건들의 근원적 동기였으며, 타인과의 연대 속에서 이룩될 진정한 자유는 탈자본주의의 과정에서 비로소 그 형태를 드러낼 것이다. 자유의 이름으로 선언된 사회주의. 호네트의 사회주의 이념이 갖는 의의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