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 괄호 밖으로 나오다’ 이후
가겨찻집에 첫 번째 ‘알파벳, 괄호 밖으로 나오다’를 쓴 게 2013년 10월이다. 주로 은행 등 금융기관 쪽의 회사 이름을 영자로 표기하기 시작한 현상에 관해서 썼다. 국민은행이 ‘KB(케이비)’라고 쓰기 시작한 이래 계속된 현상은 마침내 ‘NH(농협)’와 ‘MG(새마을금고)’에까지 이르렀다.
워낙 글로벌 시대라 하니 기업체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쓰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표기하면서 한글 없이 영자로만 쓰는 건 다른 문제라는 게 내 문제의식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런 상표는 괄호 속에서 온전히 벗어나 민얼굴로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이제 ‘KT(케이티)’ ‘SK(에스케이)’ ‘POSCO(포스코)’ 같은 표기를 보면서 그 옛 이름이 각각 ‘한국통신’ ‘선경’ ‘포항제철’이었다는 걸 새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회사 이름이나 상표를 영자로 표기하는 건 ‘지구촌 시대’니 굳이 용납하지 못할 일은 없겠다. 지구촌 시대의 압박은 아직도 기사를 쓰면서 고집스럽게 영자를 괄호 속에 집어넣는 ‘한겨레’에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겨레’에서 매주 목요일에 발행하는 ‘ESC(이에스시)’가 그것이다.
‘ESC(이에스시)’는 키보드 맨 왼쪽 위에 있는 글쇠인데 ‘탈출’이라 번역할 수도 대체할 우리말도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게다. 한동안 ‘한겨레’가 고집스럽게 지키던 ‘표지 이야기’는 이제 ‘커버스토리’가 되었다. 아예 영자로 ‘cover story(커버스토리)’로 쓰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목요판 각 면의 주제인 ‘에세이’ ‘요리’ ‘여행’이 ‘Essay’ ‘Cooking’ ‘Travel’로 쓰이는 날을 상상하는 기분은 섬뜩하기조차 하다.
2014년에 쓴 ‘‘생음악’과 ‘라이브’‘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로마자를 자의식 없이 쓰는 현상을 지적한 글이었다. 뉴스를 ‘news’로, 날씨를 ‘weather’라 쓰는 등 영자를 무심히 쓰는 경향은 공중파보단 케이블 쪽이 심하다. 예전 같으면 ‘곧이어’라고 썼을 프로그램 예고 화면에 ‘넥스트(next)’를 쓰는 추세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때 ‘넥스트’ 화면의 압권은 ‘제이티비시(JTBC)’에서 여성의 목소리로 ‘넥스트’라고 유창하게 뇌까리는 것이었다. 최근 이 음성 안내는 없어진 듯하다. 그게 듣기 거북했던 사람이 많았던 걸까.
케이블 방송이 일반화되고 종합편성채널까지 가세하면서 케이블 쪽에서 훨씬 자유롭게 영자를 쓰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이는 공중파에 비해 여러 가지 규제가 덜하기 때문일 테고, 한편으로는 좀 자유분방하게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 때문일 터이다.
‘제이티비시(JTBC)’ 뉴스의 불편
종편 가운데서 유일하게 보는 채널이 ‘제이티비시(JTBC)’다. 특히 지난해 국정농단 사태 이후엔 오후 5시대에 시작하는 ‘정치부 회의’(17:10-18:30)로 시작해 한 시간쯤 쉰 뒤 다시 ‘뉴스룸( 20:00-21:40)’을 시청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오락이나 드라마를 볼 시간에 온 식구가 뉴스에 빠진 것이다. 가끔 최순실-박근혜 덕분에 평균적인 시민의 정치적 각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라고 농을 하곤 한다.
‘TV 수신료를 ‘제이티비시’로 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뉴스룸의 보도가 망가진 공중파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날마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도 불편해질 때가 있다.
‘뉴스룸’ 말미에 ‘BEHIND NEWS(비하인드 뉴스)’라고 해 뉴스의 이면을 다루는 꼭지가 있다. 그런데 이 꼭지의 타이틀은 한글 없이 영자로만 되어 있다. 앞 꼭지인 ‘팩트체크’는 한글을 쓰면서도 이 꼭지는 왜 영자로만 표기하는지 모르겠다. ‘비하인드’는 영어로 써도 시청자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인가? 그만큼 일반적인 어휘라고 판단한 걸까. 아니면 영자로 써야만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낱말이라고 본 것일까.
‘뉴스룸’은 진행자가 인사말을 하고 나면 선곡한 노래 한 곡이 흐르면서 끝난다. 가끔 한국 가요도 있지만 대체로 외국 가요 중심이다. 이 노래의 제목과 연주자 이름이 화면 왼쪽 상단에 뜨는데 이걸 보면 가슴이 좀 답답해진다.
외국 가요는 굳이 우리말로 제목을 바꾸지 않는 이상 원제를 우리말로만 표기하는 건 별 의미가 없긴 하다. 갈무리 화면에 나오는 ‘Flying Home’은 ‘플라잉 홈’이라 표기하더라도 괄호 속에 원제를 병기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아래에 ‘영화 ‘설리-허드슨 강의 기적’ 테마곡’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으니 영자 읽는 게 불편한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법하다.
그러나 두 번째 갈무리의 ‘Somewhere Only We Know’와 ‘Lily Allen’을 바라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걸 부른 가수 이름은 좀 다르지 않은가. ‘Christian Jacob’은 ‘크리스찬 제이콥’이라 쓰는 게 옳다는 얘기다.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라 쓰지 굳이 ‘Donald Trump’라고 굳이 쓰지 않으니 말이다. 영자를 읽는 것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는 나도 한참 들여다보고서야 읽었으니 알파벳이 낯선 이들에게 이 표기는 정말 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괄호 밖으로 나온 영자’가 뜻하는 것
괄호 속에 묶여 있는 것으로 외국어(문자)임을 확인받았던 영자가 밖으로 풀려나오는 것의 의미는 꽤 무거워 보인다. 그것은 풀려도 괜찮을 정도로 영자가 일상에 녹아들었다는 뜻이면서 그런 현상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나 저항이 없으리라는 판단이 포함될 터이니 말이다.
글쎄 그러지 않아야 하겠지만 뉴스룸을 ‘News room’으로, 여행을 ‘Travel’로 쓰는 것이 일상인 날이 조만간 올 수도 있겠다는 예감은 씁쓸하고 우울하다. ‘조리법’과 ‘전설’이 스스럼없이 ‘레시피’와 ‘레전드’로 쓰이는 이상 그게 ‘recipe’와 ‘legend’로 쓰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르니 말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