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이후, 탄핵 심판의 결정을 인용해달라는 사람들과 탄핵은 무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세 대결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특히 탄핵 심판의 무효를 주장하는 측 사람들은 북한 정권의 사주와 언론 미디어의 조작에 의한 탄핵임을 주장하고, 체제 전복을 위한 날조라고 이야기 하면서 SNS상에 국가 체제 전복을 위한 시나리오라고 말하는 이야기들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접하고 종북 척결을 내세우는 탄핵 반대파의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바로 그 이야기 속에 섞여 있는 남베트남의 패망에 대한 주장이었다. 남베트남의 패망 뒤에는 사회의 안정을 뒤흔든 북베트남 정부와 그들의 지원을 받은 베트콩의 날조된 여론, 그리고 날조와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속아 넘어간 남베트남 지식층의 동조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남북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남베트남의 지식층이 어떻게 숙청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이야기도 따라 온다.
1975년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숙청의 진실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못한다. 해외 유학 시절 많은 베트남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과의 대화에서 베트남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었다.(대부분의 친구들이 자유로운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영어 실력을 갖추지는 못해서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면서 베트남의 패망의 원인을 미군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분석을 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남베트남 국민의 측면에서 바라본 적은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들이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는 깊게 알아보아야 했다. 남베트남의 패망 이후 엄청나게 증가했던 ‘보트피플’의 슬픈 이야기부터 베트남 패망 시 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성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영화와 책을 통해서 접해 본지라, 정말 정부와 사회의 불안이 공산당의 날조와 여론 조작에 의거한 것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베트남은 왜 패망하였는가?
남베트남의 패망에 대한 조사를 거치다 보니, 국내 자료들과 해외 자료들 간의 차이점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특히 미국의 군사적인 관점에서 베트남 패망을 바라본 자료들이나 북베트남의 관점에서 바라본 남베트남의 패망의 원인, 한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베트남 패망의 원인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국내 자료들의 경우 베트남 패망의 원인으로 북베트남의 역할과 메트민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지리적·전술적인 이격성을 지적하는 자료들이 많았다.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상에 북베트남의 공산화 전술에 의해 사회·정치적인 불만이 확장되어 멸망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패망에 관하여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단순히 북베트남 또는 공산당의 책동으로 인하여 남베트남이 무너질 수 있었느냐?’는 질문이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 공산당과 북베트남의 선전이 남베트남 국민에게 유효하게 먹혔느냐?’는 질문이며, 이에 대한 답변으로 ‘공산당의 치밀한 계획과 실행’이라고 말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일 북베트남과 공산당의 전략이 유효했다고 가정해 보자. 왜 그런 전략이 미국이나 서방국가들의 공산화에서는 효력을 바루히하지 못했는가? 6~70년대 미국의 반전 운동이나 흑인 인권 운동을 보면, 그런 운동들을 조정해서 공산화를 시도하는 방안도 가능하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는 남베트남의 멸망에 단순히 공산당의 책동만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은 일치된 국민 여론이나 강요된 단결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프랑스의 패전으로 귀결된 이후, 제네바 협약을 통해 프랑스와 베트남 정부가 휴전을 체결하기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의 비시 정부가 몰락하는 상황을 틈타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전역을 장악하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 아래의 허수아비 왕이었던 바오다이(Hoàng đế Bảo Đại)를 옹립한다. 명목상 ‘독립 베트남 왕국’의 수립이라고 했지만, 실지로는 일본의 위성국가였던 ‘만주국’의 부이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위치였다. 바오다이는 이후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할 때까지 독립 베트남 왕국의 황제로 있다가 1944~45년에 베트남에 닥친 대기근을 거치며 세력을 확장한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이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베트남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자 보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호치민은 1941년 오랜 기간의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베트남에 돌아와 베트민을 결성했다. 그가 베트남 무장 투쟁을 시작한 이래 1945년 8월의 무장 혁명은 베트남 독립의 주춧돌이 되었다.
한편 1945년 7월에 독일 포츠담에서 연합군 간에 회담이 열렸다. 연합국은 인도차이나의 위도 16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맡도록 하고, 프랑스의 식민지 수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합의한다. 이 아래에서 영국군으로 구성된 인도차이나 상륙군이 8월 중순에 인도차이나 지역에 진군하여 일본군의 무장 해제 및 연합군 포로의 지원 작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연합군의 태평양 지역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제지하면서 전체적인 일정이 뒤로 밀리게 된다. 맥아더는 8월 28일로 예정되어 있는 일본 정부와의 항복문서 서명 이전까지는 어떠한 군사적 작전의 수행도 불가하다고 주장했고, 항복 문서 서명식이 태풍으로 인해 9월 2일로 연기되기까지 했다. 이러면서 8월 한 달간 베트남은 이미 항복을 한 일본군과 8월 혁명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하고 있던 베트민이 동시에 장악을 하고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와 같은 권력·군사력의 공백기를 틈타, 호치민과 그의 추종 세력은 하노이와 사이공을 중심으로 재빨리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특히 치안과 군사력의 공백기를 틈타 자신들과 정치적인 경쟁 관계에 있는 세력들을 암살하거나 숙청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정치적·사회적 입지를 장악해 나갔다.
한편 맥아더의 반대로 군사 작전 진행을 방해받고 있던 영국군은 맥아더가 일본 정부에게 정식 항복 문서를 받은 3일 뒤인 9월 5일, 의료 및 지원 부대인 11대대를 낙하산으로 투입했다. 이후 9월 13일 영국군 본대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상륙군이 인도차이나 지역의 일본군으로부터 정식 항복을 받게 되는데, 이 항복을 받은 인도차이나 상륙군의 사령관 더글라스 그레이시는 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그레이시는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있던 프랑스 식민지 군을 급한 대로 무장시켜 사이공 지역을 중심으로 치안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 베트민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 시설과 관공서를 일부 무력을 사용하여 되찾는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움직임은 베트민을 비롯한 베트남 주민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사이공을 중심으로 영국군·프랑스군·일본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베트민과 그 추종세력, 그리고 연합세력들로 구성된 민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1964년 프랑스 식민지 군이 다시 투입되어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전까지, 호치민과 베트민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과 끊임없이 작은 규모의 게릴라 전투를 진행한다. 동시에 베트남 내부에 남아 있던 우파 국가주의자들의 지도자들과 추종 세력들에 대한 숙청 작업도 진행한다. (※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를 ‘위대한 숙청(Great Purge)’으로 부른다)
1946년 12월 19일, 베트민 민병대의 총사령관인 보구엔 지압 휘하 30,000명의 베트민 민병대가 하노이의 지배권을 두고 대규모로 충돌하게 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 속에서 프랑스는 하노이를 중심으로 북쪽의 지배력을 확산하고 있던 호치민에 대항하여 사이공에 새로운 왕을 올린다. 이 왕이 일전에 자신들이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던 바오다이이다. 바오다이는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통해 남부 베트남 왕국을 프랑스 연합의 일원으로 두겠다는 서약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는 이로 인해 북쪽에서 프랑스군과 지속적으로 게릴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베트민 및 베트남 인민 공화국,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후 1950년, 북쪽에 위치한 베트남 인민 공화국은 소련과 중국 모택동 정부로부터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사이공에 위치한 바오다이의 베트남 왕국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정식 정부로 인정받았다. 이러면서 상호 간의 경쟁은 내전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미국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 전역에 대한 개입을 주장했지만, 2차 세계 대전 당시 5성 장군으로 역임하며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정보당국의 보고에 따라 프랑스군이 베트남을 다시 실효적으로 지배하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다시 한번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전쟁에 휘말릴 경우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개입은 거부한다.
이런 가운데, 소련과 중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호치민과 베트민은 보구엔 지압의 지휘 아래 프랑스 식민지군 주력을 라오스와 베트남 인접 지역인 디엔비엔푸에서 고립시켰고, 이를 통해 항복을 받아냈다. 프랑스의 ‘베트남 완전 철수’를 얻어낸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와 북베트남 정부는 16도선을 경계로 하여 300일 동안의 기한을 가지고 주민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협상했다. 또한 이 기간이 끝나면 베트남 정부 구성을 위한 자유 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북베트남에서는 소수였던 카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약 100만 명이 남베트남으로 이주하였고, 남베트남에서는 5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가운데 3년 동안 북베트남 정부는 토지 지대를 혁신적으로 낮추는 토지 개혁을 중심으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지역 농부들에게 분배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공식 기록으로 1만 4천 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남부 베트남 왕국은 프랑스 정부의 허수아비 왕이었던 바오 다이가 우파 정치인이자 유능한 관료 출신인 응오 딘지엠을 총리로 임명하여 북베트남과의 정책 대결에 돌입했다. 응오 딘지엠은 학창 시절부터 유명한 수재였으며, 프랑스 치하의 바오 다이 왕정에서 돋보이는 업무 능력과 청렴함으로 많은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외에도 응오 딘지엠은 베트남의 자주적 결정권을 넓혀 나가는 노력을 했고, 3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독립 운동가와 정치 세력들을 만나 관여하기도 했다. 심지어 북베트남의 지도자인 호치민이 처음으로 그에게 정부 요직을 제안하기도 했을 정도로 유명한 능력자였다.
하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응오 딘지엠은 정치적으로 융합될 수 없는 북베트남 정부 대신 바오 다이 치하 남베트남의 총리로 취임하기로 결정하였고, 프랑스 망명에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그가 처한 남베트남의 상황 역시 쉽지는 않았다. 허수아비 왕인 바오 다이는 권좌만 가졌을 뿐 실권은 가지지 못했고, 남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부역자들과 대형 군부 간의 경쟁, 그리고 당대 최대 범죄 조직이 경찰을 운영하고 있는 혼란의 무정부 상태였다.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여 나라를 운영하게 된 응오 딘지엠은 자신의 친인척과 주변 친구들을 중심으로 국가 운영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이런 환경에서 북베트남에서 이주한 100만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은 딘지엠의 정치적 지지층을 넓혀주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딘지엠은 자신을 공격하던 군부를 비롯한 우파 정치 세력을 공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강화하였다.
정치적 혼란의 상황에서 프랑스와 북베트남 정부, 그리고 남베트남 정부 간 협의된 제네바 조약에 따른 통일 총선이 다가오자 양측의 긴장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 통일 총선이 UN의 감시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총선의 관리감독을 지역 책임자가 진행한다는 조약 속 내용을 부정하는 내용이 되어 긴장의 수위를 높였다. 특히, 자유 총선이 실시될 경우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국가의 수장으로 뽑힐 것이며 바오 다이가 권좌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공포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퍼져 나갔다. 이는 베트남 전역과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막을 수 없다는 우려에 빠진 미국이 남베트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결국 1955년 10월 23일 남베트남에서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딘지엠은 자신의 동생을 통해 선거에 개입하는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 이를 통해 전체 투표수의 98.5%에 달하는 찬성을 얻어 정권을 장악, 자유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미국의 정보 관계자와 정권 조언자들은 60~70%의 지지를 얻는 것이 훨씬 보기에 자연스럽다고 조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딘지엠은 지지율이 권력의 권위를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 지지율을 높였다. 북베트남 역시 조작된 투표 속에 99%의 찬성을 얻어 북베트남 정권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투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딘지엠은 남베트남 일반 국민의 폭넓은 지지는 얻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점이었다.
당시 베트남 국민의 대부분이 불교 신자였던 반면 일부 지배층과 지식층은 천주교 신자였다. 이와 같은 종교적인 차이는 정치적인 분열로 이어졌고, 공산주의자 척결을 내세운 딘지엠 치하에서 천주교를 제외한 종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는 곧 남베트남의 국민적인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딘지엠이 1955년에서 57년 기간 동안 처형한 정치범이 1만 2천여 명인데, 1958년에는 수감된 정치범의 숫자가 4만여 명을 넘어서는 공포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절대 권력을 지니 딘지엠의 측근인 동생과 친인척들이 정부 주요 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부분에서 각종 부정부패를 일으켰다. 종합적으로 딘지엠에 대한 국민적 평가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군부 역시 최악의 무능을 보이면서 군기 문란 행위를 지속하다 절대적인 전력 우위의 전투에서 베트콩에게 패배하는 말도 안 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딘지엠은 자신의 철권통치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59년 ’10호 법안’을 발표한다. 모든 정치적 혼란 행위에 대해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법안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딘지엠에 대항하는 저항 세력인 National Liberation front (NFL – 베트콩)이 결성되었고,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산하게 된다.
딘지엠의 정책 중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토지 정책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돌려준 것이다. 그렇게 토지를 돌려받은 지주들은 농부들에게 자신들이 수 년 동안 받지 못한 토지 이용료를 강제로 받아내려 하였고, 정부는 심지어 이를 돕도록 군대를 동원해 주었다. 이는 지대를 낮추고 빚을 탕감해주는 북베트남의 정책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군부는 능력이 아닌 정치적 세력에 의해 승진이 결정되었다. 지주들과 결탁하여 무리한 지대를 강제하는 행위로 크게 민심을 잃은 정부는, 그에 따라 군인들이 각종 무기와 장비를 베트콩 및 북베트남에 매각하기 시작하면서 군사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미국은 딘지엠 정권이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고 판단한다. 베트남 군부에게 쿠데타를 통한 딘지엠의 퇴출을 승인하자,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기 시작한다.
1963년 군부는 딘지엠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다. 하지만 이에 끝나지 않고 상대 군부를 몰아내기 위한 크고 작은 쿠데타가 2년간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정국은 내전이 반복되며 통일된 정권의 운영 아래 정책적으로 개발하거나 집행하는 것이 부족한 상황이 장기간 지속된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 상태는 미국의 대대적 개입이 있었던 1965년 이후 공군 참모총장인 응유엔 카오키와 응유엔 반 티에유가 각각 총리와 국가 위원회 수장으로 임명되면서 최고치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들의 정책 역시 딘지엠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지식과 사상에 대한 검열의 강화, 시민 자유의 억압을 통한 공산당 척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1967년 반 티에유는 자신들의 정적을 몰아내고 미군이 강요한 총선을 조작하여 34%의 지지율을 얻어냈고, 이로 대통령에 임명된다. 하지만 그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다를 게 없다. 미국은 사회 각계각층의 반전여론이 거세졌다.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던 닉슨은 워터 게이트로 사임했다. 이후 미국이 베트남에서 손을 떼면서 북베트남에 의한 남베트남의 패망은 가속화된다. 1975년 봄 공세(호치민 캠페인)시에는 남베트남군의 수뇌부와 정부의 무능으로 제대로 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 것 또한 이에 박차를 가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이 아니다, 민심의 이반이다
역사적인 기록들과 사실들을 두고 확인해 보면, 남베트남의 패망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나 여론조작에 의해 일어난 간사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베트남의 기득권 세력과 정부 인사들, 군부의 부정부패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사유라 본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나라도 내부 단결 없이 외부의 침략을 이겨낸 경우는 없다. 작고 힘없는 나라라 할지라도 지도층이 각성함에 따라 백성들이 화합하게 되면 큰 나라도 쉽게 나라를 공격하거나 침략할 수 없다. 하지만 지도층이 부패하고 무능하여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면 그 틈을 타고 국민들의 불만이 올라오게 되고, 그 불만들을 이용한 다른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거나 외세의 침략을 받는 듯 혼란이 계속되게 된다.
남베트남의 정권을 잡았던 딘지엠은 독립운동가로서의 배경과 유능한 관료라는 후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남베트남을 북베트남과 경쟁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 기회가 있었다. 비록 허상뿐이었던 바오 다이 황제 아래 총리로서 기회를 잡은 것이었지만, 공산당과의 대결이라는 중대한 명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이라는 든든한 우방까지 지원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기득권의 권익과 이해관계를 보살피지 않고 개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권력을 가진 딘지엠은 분에 넘치는 권력을 가진 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망쳐 놓은 남베트남의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그 뒤를 이은 어떤 정권도 해결하지 못하는 병이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바오 다이 황제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한 황제라는 오명과 향락에 빠져 살아 국민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때 권력자로서 국민적인 지지를 얻어 남베트남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혹자들은 당시 남베트남에서 활동한 북베트남 간첩들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만약 딘지엠 정권이 국민적인 지지를 얻었다면,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행하면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였다면, 비판을 수용하면서 건전한 토론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이루어냈다면-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부패하지 않고 무능하지 않았다면 간첩의 준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나라가 흥망성쇠의 길을 걷는 데 있어서 지도자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조선 시대의 대학자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外侵)이 아니라, 공직자의 부정부패에 의한 민심의 이반(離反)이다.
만일 이 나라가 정말로 종북 세력에 의해 여론이 호도되고 조작되어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면, 정부와 기득권의 부정부패에 눈감고 ‘그럴 수 있다’ 말하기보다는 나서서 사회의 악을 척결하여 민심의 이반을 다스린 후 그런 주장을 펴야 하지 않을까?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들의 의미를 폄하하고 다수결에 의한 소수의 탄압이라 주장하기 전에, 민심이 자신들을 떠나게 된 이유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반성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하는 세상이 되길 기대해 본다. 우린 적어도 그런 정치인을 가질 자격은 갖춘 국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문 : 로빈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