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캠 소비하는 종편
지난 2일 채널 A의 프로그램 <풍문으로 들었쇼’가 민감한 소재 하나를 다루었다. 지난 12월 몇몇 남성 연예인의, 소위 ‘몸캠’(알몸 노출 동영상)이 유출되었던 사건이다. 따지자면,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노출된 사건이니만큼 가급적 거론 자체를 하지 않는 게 맞다. 그러나 소수 연예정보지(?)는 물론 종편이라는 전파까지 탄 이상 한마디 말을 보탤 수밖에.
가십을 다루는, 그것도 종편의, 심지어 채널 A의 프로그램이 얼마나 정의로울 수 있겠냐 싶지만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패널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위로하고 재발 방지를 주문하기보다 이를 단순한 가십으로 소모하는 데 그쳤다.
성범죄 피해자가 “피해자이길 자초했다”는 페미니스트
가장 큰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칼럼니스트 곽정은 씨의 발언이다. 그는 피해자를 이해해줄 필요가 없으며, (녹화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해도 피해자가 될 상황을 자초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이 유독 문제가 된 것은 아마 그의 이중성 때문일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 비슷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는 평소 여성주의적인 입장에서 여성혐오 문제를 다루어왔고, 자유롭게 성행위에 대한 칼럼을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인물이다. 그랬던 인물이 엄연한 성범죄에 대해 기존의 성윤리에 반하는 성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조심하지 않았다”고 힐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곽정은 씨는 보통 이런 범죄의 피해자는 여성들이었으며, 남성들이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가 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추정한다. 맞는 말도 있고 가능성이 있는 추정이기도 하지만, 그 또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힐난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라면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연인을 위해 찍은 노출 사진, 동영상, 혹 성관계 동영상이 누군가의 악의로 유출된다 해도, 이 또한 피해자가 몸가짐을 잘못한 탓일 것이다. 심지어 곽정은 씨의 논리에 따르면, 영상이 녹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해도 어쨌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자초한 것이므로, 몰래카메라의 피해자들도 이해해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를 인터넷 너머 정체도 알 수 없는 상대와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여길 순 없다. 설령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라 할지라도, 역시 랜선 너머의 관계와는 다른 무게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건, 그들이 설령 ‘몸캠’을 찍었다 해도 그건 사적인 성관계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연인이든, 처음 만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화면 너머의 상대에게만 보여주고자 찍은 내밀한 사생활이라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를 우리가 돌려보고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느니, 피해자가 되기를 자초했다느니 하며 윤리적으로 힐난할 수 있을까?
그보다 한결 더 저열한 발언들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을 한 건 곽정은 한 사람뿐만은 아니었다. MC 이상민은 처음부터 애당초 이런 영상을 찍는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며 피해자를 힐난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편 기자 강일홍 씨는 피해자를 “변태성욕자”란 원색적인 표현으로 비난하기까지 했다. 또한 MC 이상민 씨는 “잘 보이기 위한 각도” 같은 말로 피해자를 웃음거리로 만들며 모욕했다.
대체 누가 변태성욕자일까? 어떤 한 사람을 위해 영상을 찍은 사람일까? 타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동영상을 보고 “잘 보이기 위한 각도” “변태성욕자” “피해자가 되기를 자초” 같은 말을 내뱉은 사람일까?
그나마 김가연 씨나 정영진 씨 등 몇몇 패널이 이것이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이며 피해자를 함부로 비난할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했지만, 선정적인 프로그램 편집 때문인지 지나가는 얘기처럼 묻혀버렸다.
무엇이 진짜 부도덕한 행위인가
콜린 워드는 『아나키 인 액션』이란 책에서 성적 금기가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를 설명하며 이런 예를 들었다. (쌍방이 성인임을 전제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남성 간의 항문성교가 불법인 반면 남녀 간의 항문성교는 합법이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는 남녀 간의 항문성교가 불법인 반면 남성 간의 항문성교가 합법이다. 수십 개의 주로 구성된 미국으로 넘어가면 이런 문제는 해변에 깔린 모래만큼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상식적인 젊은이라면 즉시 이해하고 받아들일 원칙 대신 순결이라는 말도 안 되는 규범을 강요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성행위에서 신중함과 배려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장 익숙하지 않은 양상이라 해서 ‘저 변태’ 같은 일차원적인 반응을 내뱉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몸캠’은 변태적인 행위인가? 그렇다면 처음 만나는 남녀가 성행위를 갖는 건 어떤가? 심지어 많은 종교는 부부가 아닌 이들의 성관계를 용서받지 못할 죄악으로 여기는데, 그렇다면 사랑하는 연인 간의 성관계 또한 변태적인 행위이며 용서받지 못할 죄악인가?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물론 기술의 발전으로 성을 포함한 삶의 양태가 급속히 변해가는 현실에서 과거의 인습에 얽매인 채 변태니 자초니 하는 말을 하는 게 우습다.
몸캠 범죄자들은 피해자들을 대놓고 “자살하게 만들어 주겠다”며 협박하고 있다. 정말 자살한 사람도 있다. 이건 가십으로 소비할 만큼 가벼운 성범죄가 아니다. 서로의 합의로 이루어질 것, 원치 않는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것. 이만큼 분명한 성윤리가 또 없을 것인데, 대놓고 이 성윤리를 어긴 사람들이 피해자를 힐난하는 모습이란 실로 소름 끼칠 지경이다.
그들은 분명한 성범죄의 피해자이며, 우리가 그들을 비난할 이유란 추호도 없다.
원문 : 임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