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JTBC의 정유라 체포 보도 과정과 관련해, 일각에서 이것이 언론의 중요한 원칙을 저버린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ㅍㅍㅅㅅ는 어제(1월 3일) 위 문제를 제기한 박상현 메디아티 이사의 글을 실었었고, 이에 대해 다양한 첨언과 반박의 글들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쪼록 발전적인 논쟁의 장이 열리길 바랍니다.
이해의 충돌과 신뢰의 문제
Conflict of interest의 문제는 과학계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self-funding이 가능한 개인이 아니라면 누군가 돈을 줘야 연구를 할 수 있다. 펀드 제공자는 그 연구의 결과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한다. 펀드 제공자가 국가나 비영리기관이라면 그 이익이 기초과학의 발전 자체겠지만, 사기업인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약회사로부터 돈을 받은 생물학자의 연구는 우리가 어떻게 신뢰해야 하는가? 과학계는 기초적으로 신뢰를 기반으로 묶여 있다. 상호 간의 신뢰가 무너지면 과학 전체가 무너진다. 편향의 가능성이 있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기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기자가 관찰자가 아닌 행위자인 경우 우리는 그 기사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자신의 행동에 의한 결과를 기사로 쓴다. 문제를 스스로 키우거나, 자신이 한 일을 미화하거나, 없는 문제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언론 또한 신뢰를 기반으로 서 있다. 신뢰의 문제가 무너지면 언론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순수한 관찰자가 아닌 기자는 공적 토대를 무너뜨리니 무조건 지양해야 할 것인가?
문제를 밝힘으로써 해소하다
과학계는 사기업에서 지원된 펀드에 의한 결과를 인용한다. 펀드는 언제나 소중하다. 기업이 어떤 기술이나 과학적 사실을 필요로 하는 것은 훌륭한 연구의 동기다. 어떤 연구를 기반으로한 서 있는 기업보다 그 분야에 전문적인 집단은 드물다. 신뢰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해 충돌의 문제가 존재함을 솔직히 밝힘으로써 해소한다. 학회지나 저널들에서는 논문을 받을 때, 이해 충돌에 대하여 명시하도록 한다. 기업의 돈을 받거나 기업 연구소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의 경우, 논문에 이를 밝힌다. 연구자들의 Affiliation-소속 기관을 밝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어떤 동기로 해당 연구를 수행했는지 알도록 하는 것이다.
글을 읽는 사람들이 특정한 형태의 이해 충돌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읽도록 한다. 논문에 특정한 형태의 편향이 존재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으로 문제를 우회한다. 신뢰의 문제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공적 이익을 추구한다.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는 논문에 대해서 메타 태그를 담는 것. 그렇게 연구를 유지하는 것이 공적으로 더욱 큰 이익이 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정유라 사건에서 기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관찰자가 아닌 기자가 공적 신뢰를 무너뜨리는 문제는 유사한 방법으로 우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사건이 기자로부터 일어났음을 상세히 밝히는 거다. 정유라 체포에 있어서 JTBC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식으로 취재가 이루어졌고,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행동을 했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빠짐없이 이야기한다. 기자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이 사건의 행위자의 하나였음을 솔직히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전부 보여주는 것을 통해 순수한 관찰자로서만 행동할 수 없었음을 알린다. 그 기사의 신뢰도가 높지 않음을 알린다.
공공성 문제의 ‘일반해’
물론 기자의 행동 수칙들은 원칙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이런 행동 수칙들은 기자들이 ‘생각을 덜 하면서’ 공적망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매번 자기가 하는 행동이 공적인 망을 부수는지 여부를 고민하면서 취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자 행동 수칙을 지키는 것은 공공성의 문제에 일반해를 제공한다. 기자가 관찰자로서의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는 행동 원칙은 일반해로서 옳다. 기자의 행동 수칙이 일반해를 제공할 수 없는 경우 최선을 다 해 목표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JTBC의 당시 상황이 일반해로 해결될 상황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문과 관계 없는 잡설. 개인적으로는 순수한 관찰자로서의 기자가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다. 모든 관찰은 행위다. 물리학적 의미에서도, 인지과학적의미에서도, 그리고 누군가와 만나서 대화하고 카메라를 들이밀어야 하는 기자라는 직업에서도. 그 단어는 추구해야 할 어떤 행동 양태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지, 문자 그대로의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정유라가 꼭꼭 숨은 상황에서 그를 찾아다니는 취재 자체가 관찰자로서의 기자로 볼 수는 없지 않는가. 누가 내 소식을 묻고 돌아다닌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