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가 없다
박근혜의 ‘소통’은 한 번도 좋은 점수를 받은 적이 없다. ‘우주가 도와준다’ 라거나 ‘그런 기운이 온다’ 는 말로 대표되는 눌변도 그렇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말에 내용이 없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것’ ‘이것’ ‘그렇게’ 따위의 대명사로 점철되고, 긴 말을 쏟아내도 결국 요약을 해 보면 알맹이가 없다. 할 말이 없으니 눌변이 될 수밖에.
청와대 측은 15분 전에 갑작스레 간담회를 제안했을 뿐 아니라 노트북, 카메라 등을 지참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박근혜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눌변으로 본인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도, 곤란한 질문에 대해선 기자회견이 아니니 그만하자는 식으로 회피했다. 탄핵 소추 당해 직무가 정지된 상황에서 부적절한 처신이었으며, 사실상 장외 변론 자리가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것을 그냥 어떻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것으로
거기(주: 청와대 관저)에는 결재할 수 있는 시스템도 다 되어 있고, 또 필요하면 손님도 만나고, 또 접견도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위민관에서 할 수도 있고, 본관에서 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좀 일정이 특별하게 없으면 제가 그동안 조금 밀렸던, 막 바쁜 일을 하다 보면 계속 쌓입니다. 보고서라든가 결정해야 할 것, 그러니까 제가 그런 것을 그런 날은 계속 챙겨요.
박근혜 대통령 1일 새해 간담회 전문, 한겨레
우리가 박근혜에게 궁금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관저에 결재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궁금한 것은 그런 게 가능하냐는 것이 아니라, 실제 박근혜가 이를 실행했냐는 것이다. 정말 관저에서 집무실에 있을 때와 같은 수준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냐는 것이다. (사실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게 가능하다면 다들 뭐하러 출근합니까 다들 자택 근무하면서 페이스타임이나 합시다)
세월호 당일의 행적에 대한 질문에도 박근혜는 비슷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날은 마침 일정이 비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보고가 와서, 제가 무슨 재난 전문가는 아니지만, 대통령 입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빨리빨리 필요하면 특공대도 보내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 가지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조하라” 이렇게 해 가면서 보고받으면서 이렇게 하루 종일 보냈어요.
‘그것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보고가 와서’ … 박근혜의 이 발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박근혜가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역시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보고를 받기는 했다는 것뿐이다.
대통령의 컨텐츠가 이래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그런 보고’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왜 ‘무엇’이라는 알맹이가 빠져 있는가.
경호실에서는 제가 어디 간다고 그러면 확 가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경호하는 데는 요만한 필수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중대본에도 조금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 하여튼 그쪽도 무슨 상황이 생겨서 그렇게 해서 확 떠나지를 못했어요.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요만한’이 아니다. ‘그런 시간’이 아니다. ‘조금 무슨 사고’가 아니다. ‘하여튼 그쪽도 무슨 상황’은 하물며 더더욱 아니다. 모두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표현들이다. 이상의 발언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의미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세월호의 7시간’에 대한 박근혜의 아래 발언은 개중에서도 화룡점정이라 할 것이다.
그때도 이렇게 설명을 했지 않았어요. 청와대에서 나름대로 했는데, 그것을 그냥 어떻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계속 그냥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것으로 계속 나아가니까 이게 설명하고 그런 것이 하나도 의미가 없이 된 것으로 기억이 돼요. 그래 갖고 나중에 법원에서까지 그 문제가 돼 가지고 판결할 때 이것은 소위 7시간이라고 해서 한 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하고 판결도 났고 (… 후략)
‘그것을 그냥 어떻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냥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것으로 계속 나아가니까 그런 것이 하나도 의미가 없이 된 것’이라니! 이건 눌변의 예술이다. 박제해놓고 대대로 놀림감으로 삼아야 한다.
제 논에 물 대기
위 발언에서는 또 한 가지 박근혜식 화법의 특징이 드러난다. 대명사와 조사의 범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뿐, 박근혜는 이 담화를 통해 사실상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소위 7시간이라고 해서 한 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하고 판결도 났고
박근혜의 이 말은 엄격히 말해 거짓말이다. 박근혜의 7시간에 대해서는 아직도 갑론을박이 거세지만 그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청와대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말하는 ‘판결’이란 2014년 논란이 되었던 산케이신문의 칼럼에 대한 판결로 생각된다. 당시 산케이신문은 증권가 찌라시 등에서 ‘박 대통령과 한 남자에 대한 천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칼럼을 실었다. 1심 법원은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소문은 허위의 사실이며 명예훼손에 해당하나, 비방의 목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 판결에서 알 수 있는 건 그 ‘천한 소문’이 허위라는 것이다. 그 밖의 넘쳐나는 소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그런데 박근혜는 이를 특유의 눌변으로 ‘소위 7시간이라고 해서 한 것’이란 식으로 표현하며, 모든 의혹이 사실무근이라 판결이 난 것처럼 눙쳐버린 것이다.
사실 박근혜가 세월호 7시간에 대해 해명해야 할 가장 중대한 의혹은, 그가 굿을 했고 미용시술을 받았고 머리를 만졌고 하는 것보다, 그 7시간 동안 대통령으로서 일을 하기나 했냐는 것이다. 이는 박근혜 본인이 관저나 집무실이나 뭐가 다르냐는 식의 태도로 일관하는 것만으로도 더이상 의혹의 영역이라 볼 수 없다. (지금껏 정상적인 해명이 안 나오고 있는 걸 볼 때, 안 했으리라 본다)
물타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실이 전혀 아닌, 그런 것이 사실인 것 같이 아직도 얘기가 되고” 라며 자신에 대한 모든 의혹이 음모론인 것처럼 눙쳐버린다. 당장 최순실의 존재를 괴담이라 주장하며 심지어 엄정한 법질서 확립을 촉구했던 게 바로 그 박근혜다. 국민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통령이 사실이 전혀 아니라고 했던 일이 이미 사실로 상당 부분 드러난 상황이란 말이다.
미용시술, 백옥 주사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이렇게 해명했다.
자기가 어디가 아플 수도 있고, 그러다가 여기저기 좋은 약이 있다고 하면 할 수도 있고 그런 거를 일일이 다 대통령이 내가 여기가 아파서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 이런 약을 먹었고, 뭐 그런 거를 다 까발려서 한다는 거는 너무나 민망하지 그지없는, 다 누구나 사적 영역이 있고 그거로 인해서 국가에 손해를 입혔다거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미용주사도 쓸 수 있고 백옥주사도 맞을 수 있다. 의혹의 핵심은 이를 낮시간에, 비선 의료진(또는 심지어 의료인도 아닌 자)에 의해, 집무실 대신 늘상 관저에 머무르며 맞아왔다는 것이다. 헌데 박근혜는 이에 대해 해명하기는커녕 미용 시술 의혹 자체에 대해서도 제대로 해명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한 눌변으로 내가 어디가 아파서 어떤 시술을 받았는지를 다 말해야 하는 것이냐며 의혹 제기가 곧 사생활 침범인 것처럼 뭉뚱그렸다.
우리가 원하는 건 소리가 아니라 내용이다
‘정명’이라는 말이 있다. 말을 바르게 한다는 말이다. 호칭과 실제를 일치시킨다는 말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실제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고, “모른다”고 하면 실제로 모른다는 것이다.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하면 정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것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개보신당이 전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는 그 수장답게 한 수 위다. 말과 실제가 일치할 것도 없이, 애당초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박근혜의 음성이 말로서 성립하려면 아래와 같이 바뀌어야 한다.
- “소위 7시간이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7시간 동안 밀회를 했다는 소문”이라고 정확히 지칭해야 한다.
- “그것을 그냥 어떻게 그게” 가 아니라 당시의 타임라인에 따라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한 일을 시계열적으로 설명하면 된다.
- “그날은 마침 일정이 비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있었다” 가 아니라 어떤 보고를 받고 어떤 직무를 수행했는지 말하면 된다.
- 미용시술 의혹에 대해서는 미용시술 얘기를 하면 되지, “여기가 아파서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 이런 약을 먹었고” 하는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
박근혜식 눌변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그것이다. 눙쳐버린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겉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뽑아 자신에게 유리한 맥락에서 해석하고, 그걸로 해명을 끝내버린다. 밀회설, 굿 설과 같은 극단적인 음모론을 뽑아 그것이 거짓말이니 자신에 대한 의혹은 다 거짓말 아니냐는 식으로 뭉뚱그리는 것이다.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주술 같은 음성 속에 담아서 말이다.
말에 내용이 없으니 질답이 이뤄질 수도 없다. 청와대 내에서 어떻게 정책이 수립되어왔을지 도통 상상할 수가 없다. 말은 괜찮다. 눌변이어도 괜찮다. 위대한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눌변이 많았다. 하지만 그 눌변이 대통령이 텅 비어있기에 나온 것이라면, 그건 문제다.
이제 와서 컨텐츠까지 요구할 생각은 없다. 이미 의미 없는 것이고. 다만 최소한 말 다운 내용이라도 전해 들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원문 : 임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