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의 당면과제
12월 9일의 탄핵소추 이후 우리 사회의 당면과제는 크게 봐서 세 가지다.
첫째, 황교안 권한대행을 압박해서 박근혜표 정책기조를 중단, 보류시키는 일이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이미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고 입법 권력을 잃었다. 이번 탄핵소추로 그나마 쥐고 있던 행정 권력도 잃었다. 박근혜 정권은 이미 정치적 실체가 없다. 황교안 대행체제는 필수적인 국가기능을 유지하라고 있을 뿐 대의 권력의 정당성을 상실한 박근혜 정권을 연장시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황교안 총리와 각료들은 박근혜라는 선출권력을 생명줄 삼아 태어났지만 박근혜가 헌법공인 좀비가 된 지금은 그렇지 않다. 황교안 과도내각의 생명줄은 더 이상 박근혜가 아니라 헌법의 권한대행 조항이다. 황교안 위기관리내각이 이미 무너진 박근혜 정권의 정책기조를 고수하며 박근혜 정권의 연장을 획책하는 것은 어떤 민주주의와 헌법이론으로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난센스다.
두 번째 당면 과제는 헌법재판소의 신속심리를 압박하는 일이다. 탄핵심리 기간에는 합리적인 제한이 없을까? 법으로 정한 최장기는 6개월인데 이 기간을 다 써도 되는 것일까? 심지어 이 6개월마저 연장할 수 있다는 일부의 해석은 온당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대통령 탄핵심판 기간에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들어선다. 권한대행 기간의 헌법적 한계가 곧 탄핵심판 기간의 헌법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헌법은 대통령의 사망이나 사임으로 인한 대통령 궐위 시 권한대행을 세우면서도 그 기간이 2달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한다. 60일 안에 새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명하기 때문이다.
헌법은 사망이나 사임 외에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때’에도 권한대행을 예정하고 있는데, 그 기간에 대해서는 헌법에 규정이 없다. 그 이유는 직무수행 불능기간만큼 권한대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술용으로 마취를 받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기간이 좋은 예다. 일반적으로 사고로 인한 직무수행불능상태는 짧으면 몇 시간, 길어야 며칠 만에 끝나야 정상이다. 대통령이 식물인간이 되거나 치매 상태에 빠지는 극단적인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경우 권한대행 기간을 무한정 인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귀책사유가 없는 사고로 인한 직무불능상태의 권한대행 최장기도 대통령 궐위 시와 마찬가지로 60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이유다. 이런 제한을 두지 않으면 선출되지 않은 권한대행 정부가 너무 장기간 계속되며 정당성의 위기국면이 온다.
‘국회에 의한 대통령직무정지’라는 대형사고의 발생으로 발동되는 권한대행기는 귀책사유의 존재 때문에 대행기간에 더 큰 제약을 받는다. 탄핵소추로 성립하는 권한대행은 최장 60일까지 존속하되 최대한 단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대한 귀책사유로 대통령이 탄핵당한 마당에 대통령의 하수인격인 총리가 권한대행을 맡는 것 자체가 온당치 못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받아 권한을 정지당한 상황은 곧 정권 전체, 특히 행정부가 탄핵을 받아 권한을 정지당한 것과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와 헌법의 관점에서는 헌정질서 유린으로 탄핵당한 혼용무도 정권의 제2인자 총리에 의한 권한대행은 하루라도 짧을수록 좋다. 요컨대, 탄핵이건 질병이건 사고로 인한 권한대행 기간도 최장 60일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대의정부의 정당성 측면에서 문제가 최소화된다. 특히 탄핵 유고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 없다.
헌법재판소는 위와 같은 헌법해석에 기초해서 탄핵국면 권한대행 기간의 헌법적 한계를 60일로 인식하고 박한철 소장이 물러나는 17년 1월 31일까지 탄핵심판을 끝내야 한다. 혹자는 탄핵심판기간의 법정기한이 6개월로 정해져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심지어 위반 시 처벌조항이 없는 훈시규정이라는 점을 들어 필요하면 더 연장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탄핵으로 말미암아 대의권원이 사라진 상태의 비선출 권한대행 기간을 무한정 늘려도 된다는 참으로 무책임한 법기술자의 형식논리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과거 탄핵심판법 제정 당시의 탄핵심리기간은 30일이었다. 탄핵심판기간 중의 정치적 불확실성과 비정상적 권한대행 사태를 하루바삐 종식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으로 그렇게 정했을 것이다. 국민의 명령과 헌법의 원칙, 작금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헌재는 탄핵사안의 신속판단에 모든 지혜와 정성을 쏟아야 한다.
세 번째 당면 과제는 황교안 대행 기간 중에 권력구조 중심으로 뚝딱 개헌을 해내자는 주장에 대처하는 일이다. 국민들의 피땀 어린 민주화 투쟁으로 획득한 현행 헌법 개정을 통상적인 법률개정보다도 더 빨리 해치우자는 일부의 주장은 지금의 상황에서 정치적 동기가 불순하고 정치적 결과가 바람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절차적 측면에서도 아무런 합리성이 없다.
새 공화국을 여는 힘은 이미 촛불시민혁명을 통해서 확보되었다. 책임총리와 3권분립, 인권보장 등 현행헌법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시민의식의 각성도 과거와 비할 바 없이 광범위하다. 개헌을 뚝딱 해치울 그 힘과 정성이 있다면 여소야대 국회는 개혁입법부터 뚝딱 해치워야 한다. 대표적인 것만 꼽아도 결선투표제도입법, 선거연령인하법,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기본권보장법, 국사교과서국정화금지법, 해직교사의 교원노조가입허용법, 세월호특조위부활법, 비례대표의석확대법, 시민의회지원법, 피라미드출자제한법, 검찰독립보장 및 권한분산법 등 두 손으로 꼽아도 모자랄 정도다. 지금 논의되는 수준의 개헌을 해도 이런 개혁입법이 없으면 체제교체 효과가 안 나는 반면, 이런 개혁입법이 있으면 개헌을 안 해도 체제교체 효과가 크다.
개헌파 국회의원들은 개헌절차를 밟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내심 황교안 과도내각이 최소한 4, 5개월 유지된 후 탄핵심판이 내려지기를 바라기 쉽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주주의와 헌법의 관점에서는 ‘탄핵심판기간=권한대행 기간’이 짧을수록 좋고, 최장 2달을 넘지 않아야 한다. 개헌파들은 내심 헌재의 탄핵심판이 예컨대 박한철 소장의 퇴임일인 1월 31일은 물론이고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일인 3월 13일 이전까지 끝나는 것도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까지 개헌을 완료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탄핵심판이 내려지면 바로 60일의 대선국면이 기다린다. 따라서 개헌절차는 반드시 탄핵심리기간 중에 종료되어야 한다. 개헌안 작성과 심의, 국회의결, 공고, 국민투표로 이어지는 개헌절차를 1월 31일까지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3월 13일까지도 불가능에 가깝다. 최대한 국회의결까지 끝내고 향후 국민투표 일정에 합의를 도출할 시간까지는 될지 모르겠다. 국회개헌특위가 연초부터 바로 가동되더라도 최소한 국가 30년 대계를 세워야 할 개헌작업을 두 달 만에 뚝딱 해치우는 것이 바람직할 리는 없다.
여야의 ‘당장 개헌파’들은 그렇기 때문에 탄핵심리기간이 그 이후로 늘어지기를 내심 바라고 있기 쉽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이들에게 무엇을 위한 개헌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즉각 개헌파들의 개헌지상주의에는 나라와 국민의 혼란은 간데없고 주창자들의 권력욕만 판을 친다고 정리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실적으로 ‘당장 개헌론자’들은 ‘헌재심리기간=권한대행 기간’ 중에 국회에서 개헌안을 의결하고 대선일에 국민투표에 붙이는 일정을 기대하기 쉽다. 즉각 개헌은 이런 일정에 20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합의할 때만 가능하다. 손학규, 김무성, 김종인, 박지원, 정세균 등 여야의 개헌파들이 개헌을 매개로 제3지대에서 뭉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일단 새누리 분파는 비박, 친박을 불문하고 개헌으로 재단장할 시간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개헌에 적극적이다. 따라서 야권에서 70명의 국회의원만 모으면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국민의당과 민주당 반문계가 가세할 경우 불가능한 것도 아닌 정계개편 시나리오다.
지금 상태에 뾰족한 돌파구가 열리지 않으면 국회개헌특위가 가동될 새해 벽두부터 정치공학적 개헌구상과 대선셈법 아래 정파 간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의 시도가 어지럽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한번 젯밥에만 눈이 어두운 온갖 정치구태가 춤을 추게 될 것이고, ‘이러려고 촛불 들고 탄핵 했나’ 자괴감이 들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근혜와 황교안, 헌재보수파와 보수언론이 다시 기지개를 펴는 반동의 시간이 기다리기 쉽다. 탄핵 이후의 당면 과제 세 가지는 상호연관성이 높기 때문에 개헌전선이 뚫리면 헌재 전선과 황교안 전선도 덩달아 뚫릴 위험성이 높다.
만약 탄핵 이후 당면과제 이행에서 정치적 혼선과 실패가 이어질 경우 대통령 교체와 정권 교체를 넘어 시대 교체와 체제 교체까지 이뤄야 할 시민혁명의 궁극 과제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요컨대, 새해 벽두부터 전개될 권력구조 개헌정국을 초기부터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흔히 말하는 죽 쒀서 개 주는 역사적 악몽이 재현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앞으로 몇 개월간 정치권은 정계개편과 정권창출을 동상이몽 하며 끊임없이 요동칠 게 명약관화하다. 오직 흔들리지 않는 광장의 민심과 꺼지지 않는 촛불만이 다가오는 역사반동의 시간을 막을 수 있다.
광장의 목소리를 모을 ‘구심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광장의 열기를 유지하면서도 광장의 한계를 뛰어넘는 묘책이 없을까? 광장의 분노와 함성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시민의 생활수요와 규범원칙에 맞춰 복잡다단한 현실을 바꾸려면, 시민들이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식견에 뿌리박되 일정한 학습과 토론을 거쳐 강령적 수준에서라도 제도개혁 요구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한 대통령 교체를 넘어 사회경제적 삶의 구체적 조건을 바꿔 달라는 광장시민들의 강력한 요구를 좀 더 손에 잡히는 제도개혁 요구로 구체화하는 데 필요한 시민권력의 정치적 조직방안이자 정치적 공론장의 활성화 방안으로 강구된 것이 지역민회다.
기본구상은 100명에서 300명의 적극적 참여 의사가 있는 능동적 시민들이 전국의 226개 시군구 단위로 모여서 전국적으로 동일한 개혁 의제를 놓고 매주 토론하여 국민개혁 요구안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민회에서 충분한 발언과 토론이 이뤄진 후에는 반드시 표결에 부쳐 쏟아져 나온 개혁요구의 전략적, 단계적 우선순위를 정하고 전국적으로 그 결과를 집계, 공표하여 홍보와 확산을 꾀한다. 그렇게 해서 여론과 언론, 정치권과 대선주자에게 분야별 개혁과제의 최소한을 제시하고 그들을 견인한다.
이때 지역별 또는 전국단위 온라인 민회를 함께 운영하며 오프라인 지역 민회와 최대한 토론과 투표를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합리적인 토론과 투표가 이뤄질 수 있도록 매주 민회 의제로 선정된 특정 개혁분야의 전문가들은 정책 쟁점과 대안 처방에 대해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자료를 온라인에 제시하고 온오프 민회에서 성실하게 질의에 답변한다.
토론하는 민회는 소리치는 광장과 조정하는 의회의 중간 역할을 하는 개방형 시민정치조직이자 국민주권의 또 다른 표현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광장과 의회 사이는 몹시 멀다. 의회는 광장에 비해 너무나 높이 또한 멀리 떨어져 있다. 광장에는 몇백만도 모이지만 의회에는 몇백이 고작이다. 광장에는 보통사람들이 잠시 구호를 외치다 흩어지지만, 의회에는 뽑힌 극소수가 뭐든지 타협하고 조정하며 지속적으로 모인다. 광장은 아무런 입법권이나 감독권이 없지만 의회는 모든 입법권과 행정부 감독권을 갖는다. 의회가 광장의 대표기관이라지만 의회와 광장은 속성이 너무나 다르다.
의회의 뿌리가 광장인 것은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광장에서 멀어진 의회는 젖줄에서 떨어진 아이처럼 영양실조에 빠져 힘없는 의회가 되게 마련이다. 강한 의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광장의 구호와 함성으로 표출되는 강력하고 원초적인 일반시민의 헌법 의식에 뿌리박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가 광장을 의식하는 때라고는 4년에 한 번 선거할 때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입법을 촉구하고 입법에 반대하고 저항할 때가 전부다. 광장의 속성상 광장만으로 의회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은 몹시 어렵다.
평상시에 광장과 의회 사이의 시공간을 채우고 매개하는 역할은 다양한 자율결사체의 모임이 수행한다. 특히 정당과 노조, 언론과 대학, 시민단체와 비영리조직, 기업과 협동조합, 동창회와 동향회, 교사회와 학부모회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시민들이 이런 결사체 모임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공동체의 현안을 놓고 토론할수록 민주주의의 실질이 채워지고 수준이 높아진다. 일반시민들, 특히 자율결사체의 공론장이 가장 원초적이고 비정형적 의미의 민회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두 달의 촛불시민혁명 기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온오프라인에서 활발하게 의사소통과 토론논쟁이 일어나며 여론형성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공적 관심사에 대한 토론들이 특별한 목적의식이나 학습과정 없이 진행되는 데다 가시적으로 결집되는 조직형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SNS시대 비조직 정치 행동의 가능성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조금 더 구심과 형식이 갖춰질 경우 더 큰 시민권력을 만들어내고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시다발 지역민회 형식을 활용해서 시민권력을 적극적으로 강화하기에는 지금이 최적기다. 지금처럼 시민 각자의 발언 욕구와 개혁 의지가 강하고 시민 상호 간에 유례없이 강한 존중과 신뢰가 형성된 국면이 일찍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극적 시민들에게 광장 참여를 넘어 민회 참여의 기회를 활짝 열지 않으면 그것은 진보진영의 직무유기에 가깝다.
8주차 넘게 광장에서 촛불을 지키는 적극적인 시민들의 주인의식과 개혁의지를 관심사에 따라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는 개방형 지역민회 형식으로 모아내서 100대 국민개혁요구를 만들어내자. 이것으로 황교안 과도내각을 제압하고 여소야대 국회와 대선주자들에게 국가정책의 최대공약수를 제시하자. 광장에서 촛불을 들 200만 시민의 힘과 온오프 지역 민회에서 토론하고 투표할 500만 시민들의 힘으로 모든 정치적 반동의 가능성을 차단하자.
원문 :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