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후 6개월 고열로 인한 뇌성마비로 1급 지체,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30대 청년 사업가이다. 혼자 걸을 수 있기는 하지만 300미터쯤 가면 앉아서 조금 쉬어야 할 정도로 몸이 불편하고, 양손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 이외에는 생활하는데 매우 불편한 상태이다. 거기에 언어장애가 있어서 처음 만난 사람은 말을 알아듣기 힘든 정도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런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는 내가 여러 차례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니 주위에서도 매우 놀랐다. 여행기를 써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기도 했고, 나와 같은 장애인들이 좀 더 용기를 갖고 해외여행을 다녔으면 하는 마음에 여행기를 공유하려 한다.
또한, 해외에서는 한국과도 너무나도 다른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느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글을 접하고 조금은 반성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또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써 보려 한다.
1. 여행지 선택하기
개인적으로 유적지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이나 캄보디아 같은 고대 유적지가 있는 곳에 가고 싶었으나 오래 걷기가 힘든 상황. 그래서 휴양지로 유명한 필리핀을 선택하였다.
필리핀 휴양지 하면 주로 세부를 생각하는데, 너무 휴양만 하는 것보다는 그 나라의 문화를 좀 더 많이 느껴보기 위해서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와 미 해군기지로 유명한 마닐라 근처 휴양지인 ‘수빅’으로 여행지를 선택하였다.
2. 장애인 항공 서비스 이용하기
티켓팅은 웹투어, 인터파크투어 등 일반적인 비행기 예매 사이트를 이용해 국내 항공사 위주로 예매하였다. (예전에 해외 항공사에서 탑승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 물론 그때도 엄청 따져서 비즈니스 클래스로 타고 가긴 했다) 국내외 항공사 및 진에어와 같은 저가항공사에서도 모두 장애인을 위한 항공 서비스를 제공한다.
나는 걸을 수 있지만 휠체어 서비스를 꼭 이용한다. 혼자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출국수속을 밟는 일은 나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다. 휠체어 서비스를 이용하면 출국수속도 기다릴 필요 없이 원스톱으로 패스할 수 있고, 휠체어로 비행기 타는 곳까지 빠르게 데려다준다. 또한 내릴 때도 입국심사를 원스톱으로 패스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짐도 찾아주고 안전하게 공항 출구까지 데려다준다. 택시를 잡아달라고 하면 택시까지 잡아주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나는 항상 호텔 바우처를 출력해가서 항공사 직원에게 택시를 잡아달라고 요청한다.
처음에는 ‘장애인 혼자 체크인을 하면 잘 받아줄까?’ 하는 마음에 호텔에 이메일을 보내서 확인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러한 생각은 기우였다. 내가 체크인한 20여 군데 호텔과 리조트는 아무런 문제 없이 받아줬다.
3. 본격적으로 시내 관광 시작
마닐라 공항 도착시간은 밤 11시. 입국수속을 밟고 짐을 찾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11시 40분 가까이 되었다. 공항직원에게 택시를 잡아달라고 해서 호텔에 도착하니 12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여권과 호텔 바우처를 건네주고 간단히 체크인을 완료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무 더워서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땀 때문에 환복의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짐을 가져다준 호텔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고 매우 잘 도와주어서 무사히 환복을 할 수 있었다.
기내식을 잘 못 먹어서 배가 고팠던 나는 밥을 먹기로 결심하고 호텔 식당으로 갔으나 이미 가게는 오프 상태였다. 마닐라 최대 번화가인 마카티에 위치한 호텔이어서 밖에서 요기할 요량으로 호텔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호텔 직원이 어디를 가냐고 물었고, 배고파서 밥을 먹으러 간다 대답하니 혼자 가면 위험하다고 호텔 차로 드랍을 해준다는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호텔은 가까운 거리는 픽업 & 드랍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해준다)그래서 차에 올라타서 근처 맛집 좀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자 한 레스토랑을 추천해줬다.
사실 한국에서 장애를 가진 몸으로 혼자 음식점에 가면 천 원짜리 돈을 내밀며 쫓겨난 곳이 많아서(혼자 가면 40%는 쫓겨나는 것 같다.) 내심 걱정을 했다. 그런데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내 모습을 보자 점원이 밖으로 나와서 반겨주더라.
숟가락보다 포크가 편해서 스테이크 류를 주문하였다. 그러자 따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테이크 컷팅을 다 해주었으며, 계속 내 옆에 붙어서 서브를 봐주었다. 땀도 나면 알아서 닦아주고 입도 닦아주고.
숟가락질하기 힘들어 밥을 먹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왜 밥을 안 먹느냐 묻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하여 밥까지 모두 비울 수 있었다. 혼자 식당가면 쫓겨나는 한국과는 정말 차이가 많았다.
배가 부른 후 야경도 볼 겸 71층에 위치한 클럽에 향했다. 마카티에서 가장 핫하다는 ‘그래머시71’ 클럽이다. 한국에서는 ‘밤과 음악 사이’ 외의 클럽에서는 거의 퇴짜를 맞아서(혼자 간 적은 없다. 하지만 나이+장애 때문에 퇴짜맞았을 것으로 예상)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갔는데, 예상외로 전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통과를 할 수 있었다.
혼자 갔기 때문에 바에 앉아 위스키 샷을 2~3잔 마시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냐? 등등을 물어봐서 대화를 하였다.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시끄러운 클럽이었기 때문에 차분히 몇 번씩 되물으며 들어야 했다. 한국 같으면 제 말을 조금 못 알아 듣겠으면 아예 끝까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남자는 본인이 27세 ‘산미구엘’ 사 직원이라고 했다. 혼자 놀러 왔는데 같이 놀자고 제안을 해 왔다. 그래서 술도 함께 마시고 여자들도 함께 부킹(?)하며 밤새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숙취가 심해서 호텔 조식 뷔페에서 해장이 될만한 국물을 좀 마시고 길을 나섰다. 마닐라 대성당과 마닐라 베이를 구경하기 위해 호텔 직원에게 택시를 잡아달라고 요청하였다. 택시를 타서 마닐라 대성당을 가달라고 말했는데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다. 기사님이 옆 사람들에게 들어보라고 몇 번 부탁을 하여 출발하였다.
(한국에서는 승차거부도 워낙 심하고 나와 몇 번 애기하다가 못 알아듣겠으면 그냥 내리라고 한다. 요즘은 카카오택시가 생겨서 매우 편해졌다)
대성당에 도착하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사 때문에 문을 닫았다. 그래서 당황하고 있는데 기사님이 다른 성당을 가보겠냐고 물어왔다. 물론 OK하고 출발하였다. 이름 모를 성당에 도착하였는데, 기사님이 자기가 가이드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여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사님은 어디에선가 휠체어를 가져왔고, 나는 그 휠체어를 타고 편안하게 구경하러 다녔다.
기사님이 추천한 두 번째 장소는 수산시장이었다. 노량진 수산 시장처럼 수산물을 골라서 사면 가게에서 요리를 해주는 방식이다. 나는 여기서 기사님과 함께 식사하였다.
세 번째 장소는 아쿠아리움이었다. 섬나라답게 크고 잘 되어 있었지만, 두바이 등에서 대형 아쿠아리움을 많이 봐서 큰 감흥은 없었다.
아쿠아룸까지 구경하고 나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서 기사님께 얼마를 드려야 하는지 물어보니 1,500페소(한화 3만 6천 원)만 달라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운전하고 휠체어도 끌어주셨는데 솔직히 좀 놀랐다. 그래서 1,700페소를 드리니 매우 좋아하셨다. 좋은 친구를 만나서 기분이 좋다며 번호도 교환하였다.
한국과는 너무도 다른 대접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밤이었다.
4. 휴양지 수빅 베이로
다음 날 미리 예약해준 수빅의 리조트로 향하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 하는데, 호텔에서 수빅까지 드롭&픽업해주는 서비스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호텔차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마닐라에서 수빅까지는 3시간반 거리로 왕복 요금 5000페소(한화 12만원)를 지불하였다. 그리고 점심시간 때쯤 수빅 리조트에 도착하였다.
수빅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세부가 거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머무는 고급 리조트가 많은 곳이라면 수빅은 유럽인 장기 투숙객과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저렴한 리조트가 많다. 세부처럼 산호초가 많아 아름다운 색의 바다가 아닌 우리나라의 동해안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예약한 곳도 1박에 5만 원 선으로 저렴한편이였다.
리조트에 짐을 풀고 한가히 혼자 파스타에 와인한 잔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백인 아저씨가 말을 걸어 왔다. 혼자 여행 왔냐며, 용기가 대단하다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매우 친해졌다. 알고 보니 그분은 MIT 미디어랩의 교수였다. 관심 분야가 빅데이터 분석으로 같아서 매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매사추세츠에 오면 자기 딸을 소개 시켜준다고 했다^^;; 그 날은 교수님과 KTV(노래방)도 함께 가고, 계속 술을 마셨다.
리조트 둘째 날은 혼자 튜브를 이용해 바다 수영(?)을 하였다. 수영을 계속 하다 보니 투숙객 여성들과 친해졌다. 둘 다 필리피노였지만 홍콩에서 휴가차 왔다고 한다.
그 날 이후, 그 두 여성과 교수님과 어울리며 함께 식사도 같이하고 바나나보트도 탔다. 혼자 여행 온 사람들끼리 뭉쳐서 재미있게 놀았다.
이렇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휴양지에서의 밤은 역시 심심한 법, 나는 주위의 로컬 바에서 술 한잔할 생각으로 리조트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리조트 사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혼자 나가면 위험하다고 보디가드(?)를 붙여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친구와 함께 나갔다. 바와 클럽을 전전하며 신나게 놀다 보니, 이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페북으로 자주 연락한다.
이렇게 즐거웠던 5일도 금방 지나갔다. 마닐라 호텔 차가 픽업하러 와서 나는 바로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공항에 도착하니 휠체어가 대기 중이어서 편안하게 비행기에 탑승을 할 수가 있었다.
5. 여행기를 마치며
이제까지 필리핀, 태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을 혼자 여행하며 느낀 점이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한국과는 아예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자기들은 장애인이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고 그냥 ‘스페셜가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장애 자체도 하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는 필리피노 여성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떨까? 내가 만약 ‘혼자 부산 여행하기’를 한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우선 혼자 식당을 가면 쫓겨나서 한 끼 때우기도 어려울 것이다. 택시는 승차를 거부하여 이동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몇 배는 더 잘 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국에서 장애인들이 불편함 없이 혼자 밥 먹고 이동하는 것만이라도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했으면 좋겠다.
원문 : 디지털 연금술사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