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레 베르농이라는 프랑스 여배우가 있다. 그녀는 ‘억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이라는 1인극(프랑스에서는 이 공연 형식이 꽤 보편적이다)을 통해 억만장자에게의 ‘취집’을 선언한다. 전세계에서 서른 세번째로 부유한 남성과 결혼하고 말겠다는 그녀. 이는 흔한 드라마 속 로맨스 중 하나인 걸까? 아니면 재벌가문에 시집 가는 연예인의 프랑스 버전인 걸까?
결론은 ‘아니오’다. 베르농이 말하는 취집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들어본다면, 결국 당신도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가난하기 때문에 돈에 집착하는 것이다
부자보다 돈을 더 많이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돈이 아닌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 빈곤의 저주가 있다. – 오스카 와일드
이 세상을 살며 매일 ‘돈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재용이 아닌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가난뱅이들이다. 물론 모두가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배 곯지 않고 따뜻한 집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꿈조차 모두에게 허락되지는 않는 것이 이 세계의 현실이다.
따져 보니 저는 태어날 때부터 운이 없는 쪽이더라고요. 통계를 내 보면 제가 이 지구에서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누군가와 결혼할 확률은 여섯 명 중에 한 명이에요. 이 숫자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진짜 영양불량으로 굶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또 너무 가난한 극빈층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과 결혼할 가능성은 네 명 중에 한 명 꼴이에요.
그리고 제가 억만장자와 결혼할 확률은 8백만 분의 1이었어요.
베르농이 배우 일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 진단한 본인의 ‘취집 확률’이다. 이 세계의 가난의 규모가 그 어떤 통계보다 확연하게 와닿는다. 그녀가 사랑이 아닌 돈을 통해 결혼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녀 자신이 바로 매일 생계를 걱정하는 가난뱅이이기 때문이다.
2. 이런 월급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취집을 마르크스가 싫어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경제문제를 다룬 1인극의 창시자답게 준비된 답변을 내어놓는다.
삼촌이 살던 때는 아직 베이비 자본주의 시대였으니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수익 분배 차가 어느 정도는 괜찮았었죠. 고용자의 수익이 피고용자의 20배는 넘지 않았으니. 와우, 최소한 얼마나 불평등한지 비교라도 할 수 있었네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면서 카를로스 슬림(멕시코 최대 부자)과 같은 부자가 되려면 4백만 년 이상을 일해야 해요.
그렇다. 제조업 버프로 경제성장률이 기본빵으로 10프로를 찍던 시대에는 성별을 불문하고 ‘젊어 고생하면 나중에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계급은 고착화되었고,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그 누구도 로또를 제외한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계급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계급 역전 같은 원대한 꿈을 꾸지 않더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한국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며 내집마련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36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을 때의 이야기다.
3. 어차피 우리는 재벌 주머니에 돈을 갖다 바치며 살 운명이다
이쯤 되면 ‘그렇다고 해도 지조를 지키며 가난하게 살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더러운 진실은 가난하게 사는 사람조차, 혹은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더더욱 재벌의 배를 불리며 살게 될 확률이 높다는 데 있다. 베르농이 말하는 보통 사람의 일상을 들여다 보자.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미네랄워터를 한 잔 마셔요(네슬레의 릴리안 베탕쿠르, 전 세계 11위 부자의 재산에 한 푼 더 보탭니다). 까르푸(베르나르 아르노, 전 세계 부자 랭킹 14위)에 가서 요구르트를 사고, 밀카 초콜릿 한 조각(워런 버핏, 세계 부자 랭킹 3위)을 삽니다. 아마존(제프 베조스, 전 세계 부자 랭킹 5위)에 들어가 책을 한 권 사고, 페이스북 업데이트를 하고(마크 저크버그, 전 세계 부자 랭킹 6위), 세포라에 들러(아르노, 전 세계 부자 랭킹 14위) 화장품 샘플 하나를 받아옵니다.
그래요! 공평하고 적절한 소비와 함께하는, 평범한 하루에요. 억만장자 모두에게 조금씩 보태준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듭니다(잠들기 전 던롭필로 매트리스의 조지 소로스, 전 세계 부자 랭킹 23위에게 한 푼 더).
이역만리 중산층의 일상답게 생소한 브랜드들이 대거 등장하여 뭔가 어렵게 느껴진다. 이를 한국화시켜 재연해 보도록 하자.
삼성 갤럭시(한국 억만장자 3위 이재용)로 알람을 듣고 일어나, 에뛰드하우스 화장품(2위 서경배)으로 단장을 하고, 스타벅스(세계 595위 하워드 슐츠)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현대자동차(5위 정몽구)를 몰고 출근해서는, 카카오톡(16위 김범수)으로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간식으로는 초코파이(25위 이화경)를 먹고, 이마트(27위 이명희)에서 장을 보고, SK텔레콤(8위 최태원)에 통신요금을 냅니다. 한국 재벌 모두에게 공평하게 보태준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듭니다. (참고: 포브스)
이렇듯 우리의 거의 모든 생활은 재벌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재벌은 그들만의 고오오급진 물건을 소비하지만, 재벌이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 곁의 모든 물건이기 때문이다.
4. 결혼은 재벌의 돈을 둘로 쪼갤 가장 합법적인 방법이다
우리의 모든 생활을 지배하는 억만장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 1,826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도무지 남들과 나누지 않는다. 아래는 베르농이 말하는 전 세계 14위의 억만장자, 루이비통 사장 베르나르 아르노의 이야기다.
베르나르의 돈은 써서 없애버릴 수 있는 돈이 아니에요. 아무리 돈을 써 봤자 그 돈이 다시 자기 주머니로 돌아오거든요. 예를 들어 그가 까르푸에 가서 물건을 산다고 해봐요. 그래봤자 다시 그의 주머니로 돌아갈 뿐이에요. 봉마르셰에 간다 해도 역시 자신의 주머니로 다시 돌아가요. 크리스찬 디올, 루이비통, 세포라, 갈리마르, 샤토 디켐……. 여기서 쓴 돈은 모두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악순환 같은 거예요. 그의 돈은 써서 없애려야 없앨 수가 없어요! 여기도 내꺼 저기도 내꺼, 내꺼, 내꺼, 내꺼, 내꺼, 내꺼, 내꺼, 내꺼, 내꺼, 모두 다 내꺼……. 모두 다 그의 것이니 어쩔 수가 없죠.
가뜩이나 저임금으로 낙수효과도 물 건너갔는데 그들의 소비조차 자신의 주머니로 돌아간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결국 부의 재분배를 위한 최후의 합법적인 수단은 역시 결혼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다.
그들을 잘 알아야 그들을 낚을 수 있다
베르농은 3년동안 경제를 공부하며 쌓은 내공으로 이 세상의 억만장자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 취집을 위해 쌓았다는 그녀의 지식은 세상 어느 사회과학 비판서보다 적나라하게 이 세계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1인극을 통해 ‘취집을 원하는 여배우’를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농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무기로 1인극이라는 형식과 결혼이라는 소재를 선택했다. 그녀는 지금도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과 TV 시사프로 같은 곳을 무대로 ‘혁신적 리더’들의 실체를 폭로하고 있다.
당신 부자들이 어떻게 은행에 돈을 쌓아 놓았는지 말해 봐요. 맞아요. 세계 인구의 0.000002퍼센트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5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어요. 이게 당신들이에요. 당신들은 세계의 35억 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어요.
일하고 소비하고 세금을 지불했던 사람들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어요. 이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훔쳐올 것도 없어요. 물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좋은 해답이 있죠. 당신의 마음에는 들지 않겠지만, 이윤을 덜 남기고 사람들에게 보수를 더 주는 것, 이게 해답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