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류(華流), 중국 컨텐츠의 역습
화류가 한류의 뺨을 치는 시대가 도래했다. 김수현, 송중기와 더불어 한류 스타인 이종석보다 더 만나기 귀하신 몸이 있다. 중국 배우 황징위다. 4만 8천원 대 19만 8천원, 신인 황징위의 한국 팬 미팅 티켓 가격은 한류스타 이종석보다 무려 15만원이나 높았다.
“팬으로 장사하는 것이냐”, “한국을 호구로 보느냐”와 같은 볼멘소리도 더러 있었지만, 어쨌든 팬 미팅은 성공리에 끝났다. 무리수라는 소리까지 나왔던 높은 가격을 주최 측이 밀어붙인 데에는 다 그만한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흡사 아이돌 팬덤과 같은 인기는 황징위를 한국 거대 포털사이트인 다음의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려놓았다.
또한 팬들은 황징위의 생일 축하 메시지를 서울 지하철의 광고판에까지 올려놔, 인지도 상승효과까지 그에게 안겨주었다. 이제 갓 데뷔한 이 배우가 외국에서까지 이 같은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답은 웹 소설에 있다.
1800억, 정치 사극 <랑야방2>의 원작인 웹 소설의 IP를 사기 위해 지불해야 할 천문학적인 액수다. 과연 월스트리트저널이 “웹 소설이 중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가치가 높고 파급력이 크다”라는 극찬을 표할 만하다. 현재 중국 콘텐츠 업체들은 인기 웹 소설의 IP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드라마·영화·게임 등 파생 콘텐츠의 성공을 가져다주는 흥행보증수표이기 때문이다. 올해 중국에서 방영된 시청률 상위 10개 드라마 중 4편이 웹 소설이 원작이다.
그뿐인가, 지난해 중국 대륙 최고의 화제작인 무협극 <화천골> 역시 웹 소설 IP를 활용한 예로, 같이 제작된 게임 버전과 더불어 달마다 360억 원의 수익을 냈다. 이쯤 되면, 웹 소설은 중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화수분인 셈이다.
다시 황징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미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그가 웹 소설의 리메이크 작품에 출연했으리라는 추측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르는 무엇일까? 힌트를 하나 주자면, 금지된 사랑이란 키워드다. 그렇다, 한국에서도 ‘음지’, ‘내 취향이지만 남에겐 들켜선 안 되는’ 등의 인식으로 취급받는 BL이다.
황징위가 주연한 웹 드라마 <상은>은 앙숙으로 만난 두 소년이 티격태격하다가 어느새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지만, 서로의 부모가 재혼을 해 졸지에 가족이 되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공산당 하에 모든 콘텐츠가 통제되는 중국에서 이런 실험작이 나왔다는 게 놀랍다. 그리고 이 웹드는 퀴어 콘텐츠에 목말라있던 한국 여자들의 취향을 저격했다.
아쉬운 대목은 한국이 아닌 외국의 콘텐츠가 스나이퍼의 역할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분명 <상은>보다도 수준급이고 국내 정서에 더 맞는 BL 웹 소설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2차 콘텐츠는 미미할까.
커넥티드카, 광군제 등 ‘돈’이 되는 시장을 귀신같이 알아본다는 평가를 받는 마윈의 알리바바 그룹은 지난 4월부터 자체 웹 소설 서비스를 선보였다. 또한 <태양의 후예>의 중국 흥행을 책임진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아이치이의 웹 드라마 중 절반이 웹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일각에선 이처럼 한중간 엇갈리는 기류를 두고, 국내 콘텐츠 업체들이 좁은 시야로 스토리를 찾은 것은 아닌지 자성해야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편 항상 한류스타가 중국을 떠들썩하게 방문하는 것에만 익숙해 있던 한국인들은 황징위가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잠시 지나가는 반짝인기일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웹 소설을 위시한 화류는 서서히 한국에 스며들고 있다. 일드, 미드에 비해 한국인에게 인기가 없었던 옛날의 중국 드라마가 아니다. 물론 <황제의 딸>, <판관 포청천> 등은 과거 인기를 끌었지만, 극히 소수이며 사극이란 장르에만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로맨스·BL·사극·무협 여러 장르의 중국 드라마들이 한국에서 사랑받고 있다. 이 다양성 역시 장르 문학을 지향하는 웹 소설의 산물이다. 물론 웹 소설 IP 확장의 수혜자에 파생 콘텐츠만 있진 않다. 연어가 고향으로 회귀하듯, 리메이크 작을 즐긴 대중들이 모태인 웹 소설에까지 손을 뻗치기 때문이다.
우리도 새로운 시장 ‘웹 소설’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이야 중국 웹 소설의 정식 번역본이 한국에도 출간되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는 언감생심이었다. 좋아하는 드라마의 원작을 보고 싶다는 일념 하에, 네티즌들은 영어로 번역된 원작을 다시 한국어로 이중 번역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이러다 보니 국내에서 중국 웹 소설 번역이 가장 활발한 카페가 중국 드라마 팬 카페다. 중국의 구글인 바이두에서 서비스하는 웹 소설만 해도 18만여개다. 이를 비롯한 다른 플랫폼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웹 소설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인기 작품들이니, 한국인들도 그 매력에 풍덩 빠질 수밖에.
이렇다 보니 이제 덕후들은 아직 리메이크도 되지 않은 소설까지 번역해 읽어 보고, 또 가상 캐스팅을 해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웹 소설과 파생 콘텐츠가 서로 상부상조하는 셈이다. 이 과정 속에서 한국의 대중들은 화류 문화에 빠져들고 있다. 웹 소설의 원본을 사거나 드라마의 촬영지를 방문하기 위해, 직접 중국에 여행가는 이들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잊지 말자, 한류의 시작도 욘사마를 보러 한국에 온 일본 팬들의 관광이었음을.
언젠간 한류가 화류에 먹힐지 모른다는 비판과 위기감이 문화계에서 나오고 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선 웹 소설 IP 하나로 궁극의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실현하는 왕서방을 배울 필요가 있다. 최근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이 주인공 박보검을 국민남신으로 만드는 등 히트를 치긴 했지만, 전문가들은 아직까지 국내 웹 소설은 IP의 확장보다는 자체 소비에 집중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이제 시작인 셈이다.
국내 웹 소설의 소비층은 광고주들이 선호하는 2040세대로써, 이미 그들에게 검증된 원작을 활용하는 편이 투자를 받는 데도 유리할 것이다. 더욱이 국내 웹 소설 플랫폼들마다 강세를 보이는 장르가 다르기 때문에, 원하는 콘텐츠를 찾기 쉬운 환경이다. 무협 게임을 만들고 싶으면 문피아를, 로맨스 코미디극을 제작하고 싶으면 조아라와 북팔을 보라.
중국 인터넷 사용자의 절반이 웹 소설을 본다는 대기록이 나오고, 그리고 중국 엔터 업계가 웹 소설 특수를 누리는 데에는 안목 있는 왕서방들의 웹 소설 IP 확장이 한몫 했다.
이제 우리도 더 이상 웹 소설을 스몰 콘텐츠로 한계지어선 안 될 것이다. 웹 소설이 스토리 산업의 중추가 될 빅 플랫폼이 되도록 해야 한다. 히트 안타를 치고 싶은 콘텐츠 제작자 여러분들, 스마트폰으로 지금 당장 웹 소설을 보길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