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가 본 영화 <연애담>
마땅히 기댈 곳이 없는 작곡가가 간신히 혹은 게으르게 붙잡은 후크송 라임처럼, ‘그 말’은 참 끈질기고 익숙하게 따라붙는다.
동성애를 다뤘지만 보편적인 사랑으로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높은 확률로 퀴어로맨스를 다룬 영화를 극장에 올린 후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소수자로서는 다소 서운한 말이나 이해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또 나는 이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소수자들도 다른 이성애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보편적인 연애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놀랄만한 일이겠으나 누구나 당신의 놀라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러 가고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떤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듯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좋으면 웃고, 때로는 전쟁처럼 싸운다.
그렇다고 저 말이 완벽히 진실만을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3년 전, 나는 지금의 애인을 만나면서 그간 크게 관심이 없던 성정체성을 마주할 기회가 생겼다. 내 성정체성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밝힌 적은 없으므로 뭇사람들에 모욕을 당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그것은 인종이나 성별과는 다른 것이어서 티를 내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애인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 속에서 내 성정체성이 자주 튀어나온다는 사실과, 나의 연애가 헤테로 섹슈얼들의 연애처럼 ‘평범’해지기 위해서 여러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연애담>은 내가 지금껏 보아 온 어떤 퀴어 영화보다 퀴어들이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그 수많은 장벽들을 현실적으로 그렸다. 보고 나면 “모든 연애가 보편적”이라는 말 같은 건 조금은 접어둘 수 있는, 그래서 2016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퀴어에게 고맙고 또 필요한 영화였다.
<연애담> 속 거짓말들
이를테면 너무 사소해 친구들에게 푸념하기도 어려운 것들. ‘남자친구 있느냐’는 물음에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반항심이 들어 “남자친구 없다”고 쏘아붙이던 일. 일 년 정도 지나자 매번 물음에 날을 세우는 것에도 지쳐 그냥 “있다”고 말하고 말았던 일들.
여기서 시간이 더 지나면 거짓말 모서리가 무뎌진다. 그와 만난 지 3년째가 된 지금 나는 어떤 감정의 동요나 죄책감도 없이 뻔뻔하게 디테일까지 응용해가면서 답할 수 있게 된다. 내 성정체성을 알고 있는 지인들 앞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하는 거짓말은 점차 늘어난다. 내가 영화 <연애담>에서 마주했던 건 나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저질렀던 (의식하지 않게 된) 사소한 거짓말들이었다. 커밍아웃은 그렇기 때문에 당신 앞에서는 “더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혹은 “하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연애담> 속 카메라는 시종일관 주인공의 ‘일상적인’ 모습을 정직하게 포착한다. 클로즈업도 아낀다. 그러다가 유일하게 영화가 그 균형을 흩트리고 핸드헬드 기법을 사용해 화면을 전환하는 순간이 있다.
같이 사는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한 후 윤주는 친구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윤주는 친구에게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거의 유일하게 극적이었던 그 순간마저 일상의 중력 속에 파묻혀 사라지고 영화 끝까지 언급되지 않는다. 당연히 커밍아웃을 받아줄 것이라 믿었던 친구의 거절은 물론 차갑지만, 결코 대단하거나 극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마치 퀴어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커밍아웃 거절처럼.
프랑스 퀴어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상대방의 부모와 함께 식사를 하는 식탁은 주인공 두 사람의 좁힐 수 없는 신분 차이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 기능하지만 <연애담>에 와서는 사뭇 다르다. <연애담>의 식탁 신은 바로 앞에서 식사를 함께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둘 사이의 관계가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되는 하나의 과제로서 기능한다. 많은 한국인 부모들이 퀴어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예 모르거나, 알더라도 본인의 자식이 퀴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쪽은 남자친구 있느냐”는 <연애담> 속 부친의 말은 그래서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잘 짜인 거짓말을 해야 하는 숙제처럼 먼저 다가온다.
식탁 위로는 긴장감이 흐르고 지수는 난이도 높은 식탁 위의 과제 앞에서 윤주에게 쉽사리 발언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상희와 류선영 두 배우는 영화 내내 대화마다 지나치기 어려운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가져간다.
연애의 빛나는 순간들
누구나 자신의 성정체성을 이른 나이에 깨닫는 건 아니다. 영민하거나 혹은 예민한 사람들은 일찍부터 자신의 성정체성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게 삶을 꾸려나간다지만, 그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진 않는다.
영화 <연애담> 속 윤주 역시 마찬가지다. 윤주는 갑자기 찾아온 성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법한데, 오로지 좋아하는 감정 하나만, 빨개진 볼만 신경 쓰며 망설임 없이 지수에게 향한다.
영화 <연애담>이 지난 11일 관객 2만 명을 넘어섰다. 독립영화로서, 특히 퀴어영화로서 유의미한 숫자다. 영화가 흥행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연애담>은 한국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연애와 퀴어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퀴어가 아니라면 경험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함께 보여준 탓이 아닐까.
지수에게 푹 빠진 윤주가 추운 겨울날 그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면서 내밀었던 작은 선물, 그리고 이어진 그의 대사.
네게 잘 보이고 싶었어.
모든 연애의 반짝이는 순간을 응축해놓은 것만 같은 윤주의 말. 때로는 하루의 반 이상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성소수자들에게도 이런 반짝이는 연애가 있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막차 시간, 망해버린 졸업과제, 하늘처럼 높기만 한 서울의 월세, 다정하나 가끔은 서늘한 애인의 눈동자가 있다. 윤주처럼, 나도 이런 연애를 하고 있다. 스스로가 성소수자임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내가 본 <연애담>은 그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