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스런 담화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는 실망스러웠다. 사실 스스로 퇴진을 선언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담화도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그는 담화에서 “단 한 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검찰이 대통령을 피의자로 규정하는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다. 지난 18년 동안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 했다고 호소하는 그의 말은, 기득권과 보수, 그 아버지의 명예만을 위해 내달려온 그의 행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박근혜는 “짐이 곧 국가”라는 절대왕정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관념에 빠져, 공익과 사익을 분별할 수 없는 지경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하면서도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전제를 달았다.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며,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주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퇴진하겠다는 것인가
얼핏 보면 하야를 선언한 것처럼 보이지만, 따져보면 그렇지가 않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거취다. 그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오로지 대통령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탄핵뿐.
그러나 박근혜가 말하는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이 탄핵안을 뜻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강제력이 없는 퇴진 결의안이라도 채택하라는 것인가? 영수회담이라도 열어 박근혜 퇴진 스케쥴표를 짜서 청와대로 갖다 달라는 것인가? 중도 퇴진이라면 당연히 임기를 다 채울 수 없는 것인데, 굳이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라 발언한 것도 이상하다. 이는 곧 대통령제를 건드리는 개헌을 전제로 퇴진하겠다는 선언은 아닌가? 5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담화에서조차 메시지가 이토록 불분명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실제로 정치권뿐 아니라 시민사회, 나아가 국민 개개인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어떤 언론은 ‘사실상 하야’했다고 평가하는 반면 어떤 언론은 ‘탄핵안 발의를 늦추기 위한 꼼수’라고 평가하고 있다. 야당은 탄핵안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여당 비박계는 9일까지 일단 논의한 뒤 탄핵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무엇을 논의하고 어떤 합의점을 찾을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친박 일부에서는 개헌 이야기가 다시 올라온다는 풍문이다.
질문에서 도망치는 대통령
언제는 안 그랬겠느냐마는, 이번 담화는 정말이지 질의응답이 꼭 필요했다. 최순실의 범행을 알고 있었는가? 국정이 농단 되었음을 인정하는가? 본인의 피의사실은 인정하는가? 검찰 수사는 왜 거부하는가? 최순실에게 국정에 대해 어디까지 조언을 구했는가? 그동안의 담화에서 왜 거짓말을 했는가? 물어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담화가 명확한 하야 선언인지, 국회의 논의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결의안을 뜻하는 것인지, 대표 간의 합의를 뜻하는 것인지, 혹은 임기 단축을 포함한 개헌안을 뜻하는 것인지 물었어야만 했다.
청와대 기자단은 그동안 언론인으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왔다. 수많은 언론사의 수많은 베테랑 기자들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공산국가를 배경으로 한 블랙코미디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괜한 돈 주고 기자를 쓰느니 그냥 목각인형을 장식해두는 게 훨씬 실용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질의응답을 원천적으로 거부한 청와대와 그 수장 박근혜가 가장 큰 문제겠지만.
청와대는 이번 담화에서도 앞서 미리 질의응답이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모양이다. 그러나 때가 때이기 때문인지, 수년 만에 정적을 깨고 기자단 쪽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박근혜는 그 소리를 듣고서도 뒤돌아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명백히, 질문으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실로 비극적이지 않은가. 도망치는 대통령이라니.
대답하지 않는 대통령이 만든 것
박근혜는 눌변으로 유명하다. 사실 눌변이란 말조차 변호로 느껴질 정도다. 단순히 말솜씨만 없는 게 아니라 말에 알맹이가 없다. 국정 철학이 없는 건 물론이고, 그 차원조차 넘어서서 말이 아무 내용도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뭘 지칭하는지도 알 수 없는 대명사를 잔뜩 넣고, ‘우주가 도와준다’느니 ‘그런 기운’이라느니 ‘혼이 비정상’이라느니 하는 기이한 표현을 쓴다.
하물며 본인밖에 결단할 수 없는 거취 문제에 이르러서까지 여전히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눌변이다. 정제되고 또 정제된 담화문인데도 그렇다. 당연히 국정이 더욱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혹자는 이것이 의도된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일부러 ‘여야 정치권의 논의’ 같은 불분명한 전제를 깔아둠으로써 탄핵 발의를 늦추고, 여야 간의 싸움을 유도하며, 더 나아가 개헌 등 제2, 제3의 활로까지 모색한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있는 분석이다.
그러나 그 눌변이 의도된 것이든 의도되지 않은 것이든 결국 국정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의도하지 않았다면 그 무능력함에 치를 떨어야 할 일이다. 의도한 것이라면 그토록 무능력한 사람이 오직 하나,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의 운신에 있어서만은 놀라운 정치적 감각을 발휘한다는 것이 더욱 치 떨리는 일이다.
대통령이라면 반대여야 한다. 보통 대통령이라면 대통령직이 위태로울 짓은 애당초 하지 않겠지만서도 – 대통령으로서의 직위가 아니라 흔들리는 국정을 진정시켜야 했다. 여야에 폭탄을 넘기는 무책임한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폭탄을 떠안고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야 했다. 만일 그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명확하지 않게 느껴진다면, 몇 번이고 질문을 받아 자신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거듭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질문으로부터 도망쳤다. 뒤돌아 나가버렸다. 혼란을 남겨두고 말이다. 그 혼란이 하루 이틀에 정리가 될지, 아니면 그 이상 긴 시간을 끌게 될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박근혜가 도망쳤다는 사실 한 가지 뿐이다. 질문으로부터, 국정으로부터, 혼란으로부터, 그리고 대통령직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줄곧 도망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대통령이 짊어져야 할 국정의 무게로부터 말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모든 명예를 내버리고, 정말로 도망쳐버렸다.
원문 : 임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