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이 모인 날, 우리는 멋지고 자랑스러웠다
내가 경험한 첫 집회는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앉아 촛불 들고 어색하게 구호를 외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다양한 집회 한쪽 모서리에 참석했지만, 경찰과 심각하게 대치를 한다거나 물대포나 캡사이신을 맞아본 적은 없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최대한 안전하게 참석했다.
마치 정시에 출근했다 퇴근하는 직장인처럼 광장에서 열리는 문화제에 참여하여 인증샷 찍고, 어색하게 구호 외치고, 짧게 행진하다 (지인들과 밥 먹고) 돌아오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비겁한 시위자’라 생각한다.
집회 참석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항상 아쉬움과 자괴감에 휩싸이곤 했다. 10만이 모이든, 50만이 모이든 이런 방식의 집회가 저 권력자들을 두렵게 하여 결국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득했다. 그런 권력에 어떻게든 강력하게 항의하기 위해, 막힌 곳을 뚫어보려고 앞에서 싸우다 연행되거나 다친 이들의 소식을 들으면 ‘나는 광장에서 대체 뭘 하고 돌아온 걸까?’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 SNS에 집회 참가 사진을 올리지 못한다(태그 된 것 제외).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이야기다.
내 주변 지인들이 11월 12일, 광장에 얼마나 큰 결심을 하고 어렵게 참석했는지 너무 잘 안다. 지방에서 큰돈 들여 상경하고, 엄마 혼자 어린아이 둘 데리고 나오고, ‘이번에는 나가야겠다’며 태어나서 처음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엄청난 열망이 ‘100만’이라는 기적을 만들었다.
물론 그날 내 SNS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풍경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약간 온도 차이가 났다. 누구는 광장에서 흥겨웠고, 어떤 사진은 차 벽 앞에서 비장했다. 누군가는 그 흥겨움을 비판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과격함을 나무랐다. 그러나 흥겨웠든 과격했든 외치는 구호는 같았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긴 싫지만, 솔직히 그날 우리는 멋지고 자랑스러웠다. 100만 명이 선명한 구호 아래 모여 큰 사건 없이 집회가 마무리된 건 대단한 의식과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이건 다 같이 인정했으면 좋겠다.
이것은 평화로운 집회가 아니라 ‘용기 있는 집회’다
그러나 집회를 ‘평화와 성숙’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문제는 생각해봐야 한다. 집회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12일 밤 트위터 실검에 ‘폭력집회’라는 단어와 ‘평화집회’라는 단어가 동시에 올라왔다. 내자동 사거리에서는 경찰과 대치하던 23명의 시민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차 벽을 기어오르던 시민들을 두고 ‘평화집회를 변질시키는 선동꾼’이라 공격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정도를 ‘폭력’이라 부를 정도로 폭력을 싫어하면서 그동안 국가 폭력이나 약자를 향한 폭력은 어떻게 잘도 참았는지 모르겠다. 100만 명이 모였는데 모두 하나의 방법으로 시위하는 게 가능한지, 그렇다면 나의 방식은 ‘평화’고 타인의 방식은 ‘폭력’이라 규정하는 근거는 뭔지 궁금하다. 여기에 ‘성숙’이라는 단어까지 동원되면 마치 착하고 질서정연하게 문화제를 즐기거나 산책하듯 행진하다가 10시 되면 얌전하게 돌아가는 시민만이 성숙한 사람들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성숙’은 도대체 누구의 기준일까? 그래서 나는 경찰이나 언론 등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와 성숙’ 프레임을 짜고, 시민들이 그 안에 순응하며 서로를 억압하는 현재 흐름에서 우리가 뭘 놓치고 있고, 어떤 것을 보완해야 하는지 의심하고 개선(거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성숙이란, N개의 생각이 서로 존중되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집회를 ‘평화롭고 성숙한 집회’가 아니라 ‘용기 있고 역량 있는 집회’로 기억하고 싶다. 다시 말하자면, 내 지인, 이름 모를 시민들은 정말 용기를 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아쉽거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럽게 인식되기도 했겠지만, 광장이든, 차 벽 앞에서든 목표를 위해 주체적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했다. 권력은 무능하고 악하지만 우리는 다르기에 그나마 사회가 덜 망가지는 것이다. 그런 용기와 자부심이 앞으로의 동력이 되면 좋겠다.
사실 평화/폭력 집회에 관한 논쟁은 집회 때마다 반복되는 ‘클리셰’이다. 그만큼 결론을 내기 힘든 주제다. 다만 한가지 고민을 해보자면, 지금은 우선 더 많은 사람이 용기를 내서 광장으로 나올 이유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100만이 모여 문화제만 하다 돌아간다고 뭐가 달라지나 불만이 많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청와대로 행진하고 차 벽 넘어가면 뭐가 달라지나? 언론이나 정부는 그걸 구실 삼아 시민들을 분열하게 할 것이다. 이것 또한 최근 몇 년간 지겹도록 축적한 ‘실패’다.
나는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모이는 것 자체가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그 메시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최대한 우리의 지혜를 끌어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N개의 생각이 모이는 경험, 뭐라도 해보자는 용기를 공유하는 시공간이 중요하다. 모여야 하는 이유보다 더이상 나가야 하지 말아야(않아도) 하는 이유가 많아지면 우리는 진다.
당신들은 고민해야 한다 : 이것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우리가 진짜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평화/폭력 집회 자체 보다는 다른 데 있다. 그렇게 모이는 힘을 바탕으로 그다음을 구상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머리, 즉 상상력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아닐까? 주최 측이든, 정치권이든 ‘모인 다음’을 생각하고 실행해야 하는데 이건 어떻게 풀어야 할까?
설마 청와대 침투하여 박근혜를 끌어내리는 걸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100만 개의 촛불을 구실 삼아 치열하게 구상 좀 했으면 좋겠다. 시민은 모이는 것 자체가 역량이라면 시민단체나 정치권의 역량은 그걸 받아 큰 그림 그리며 실행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라고 우리가 모인 거잖아!
큰 이변이 없다면 우리는 다음 토요일에 또다시 모이게 될 텐데 그때는 앉아서 문화제 하는 시간 줄이고 각 구역으로 행진하면 좋겠다. 이왕이면 청와대를 포위하는 모양으로. 광장 밖의 시민들을 향해. 이런 전략에 관해서는 누군가 설계를 해주면 좋겠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우선 나 자신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다음 집회에서는 덜 비겁해지고 싶다. 태생적으로 과격하거나, 급진주의적으로 운동하는 건 글러 먹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어 만족하는 관성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어제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가지길 원한다. 나보다 앞에서 몸으로 뚫고 나가는 이들이 뒤를 돌아봤을 때 허무하지 않도록 함께 버티었으면 좋겠다. 물론 다음에도 비겁하고 게으른 시위자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의 도리는 제대로 해야 덜 부끄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