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강철의 사나이)’은 슈퍼맨의 수많은 별명 중 하나이고, 슈퍼맨을 다룬 수많은 DC코믹스 원작 중 여러 편의 제목이기도 하다. 사실 탄생 10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슈퍼맨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약간 부담스러운 일이다. 워낙 많은 텍스트가 워낙 긴 세월에 걸쳐 축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마니아가 아니고서는 근 80여년에 걸쳐 축적된 슈퍼맨이라는 캐릭터의 온 역사와 변천 과정, 다양한 외전과 작품 사이에 서로 상충되는 설정에 대해 다 알 리가 없다. 거론되는 텍스트의 양으로 보아 한 학자가 평생을 바쳐 연구해야 할 과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드니까. 여기에 ‘저스티스 리그’ 처럼 배트맨이나 원더우먼 같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같은 우주에서 만나기 시작하면, 그건 정말 총체적 혼란이 와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코믹스 팬들, 정말 존경한다. 아무튼 잭 스나이더와 크리스토퍼 놀런이라는 최강의 조합으로 새롭게 시리즈를 시작하는 ‘맨 오브 스틸’을 봤다.
일단 줄거리.
지구에서 엄청나게 먼 행성 크립톤은 고도로 과학을 발달시킨 문명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친 자만으로 행성의 소멸을 막지 못한다. 늘 문명의 종말을 경고해왔던 과학자 조엘(러셀 크로)은 갓 태어난 아들을 캡슐에 태워 종족의 미래를 잇게 하려 한다. 한편 무능한 원로들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군인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은 조엘을 죽이지만, 반란 혐의로 체포되어 우주 유형에 처해진다.
지구에 도착한 어린 슈퍼맨은 미국 캔자스 주 스몰빌(!)에 사는 조나산 켄트(케빈 코스트너)와 마사 켄트(다이언 레인) 부부의 아들로 성장하고, 사춘기가 지나 슈퍼맨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하지만 북극 기지에서 크립톤의 선조들이 날려 보낸 우주 정찰선을 발견하는 과정에 유능한 기자 조이스 레인(에이미 아담스)의 눈길을 끌게 되고, 결국 레인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러는 사이 족쇄에서 풀려난 조드 장군이 지구에 나타나 ‘조엘의 아들’을 요구하고 나선다. 대체 누가 친구고 누가 적인지 알지 못하는 인류는 혼란에 빠진다.
우선 맨 처음 경고.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스토리의 개연성을 따지자는 것은 이 영화를 보지 말자는 것과 같다. 배트맨이나 아이언맨 같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비교해도 슈퍼맨의 경우는 특히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설정 자체가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 수 있고,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고, 다치게 할 수도 없다. 왕년에는 크립톤 별에서 나온 광석, 즉 크립톤나이트를 접하면 약해지는 약점이라도 있었지만 ‘맨 오브 스틸’에서는 그조차도 없어졌다.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신이다. ‘토르’같은 히어로는 참 신이라고 불릴 가치도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슈퍼맨 이야기는 아무리 정교하게 꾸미려 해도 그냥 동화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슈퍼맨이 ‘아무 이유 없이(혹은 성격상의 문제로)’ 자신의 능력을 덜 쓰지 않는 한, 패배가 불가능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꽤 정교해질 수 있는 배트맨 이야기와는 달리 슈퍼맨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이건 원래 그냥 유치한 옛날 이야기에요’ 라는 자세를 유지해왔다. 오죽하면 슈퍼맨이 성장한 동네 이름은 ‘작은 동네(smallville)’고 성장한 슈퍼맨이 기자 클락 켄트로 활동하는 대도시는 ‘대도시(metropolis)’이겠는가?
그런 면에서 슈퍼맨 이야기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뇌의 회전을 멈추고, 그냥 영화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비해 비판하지 않고 어린 시절 옛날 이야기를 듣듯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그게 최선의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오브 스틸’ 제작진은 최대한 이 이야기가 마치 지성에 근거한 것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도입부에서 크립톤 행성의 의사결정기관이 반란죄로 체포된 조드 일당을 굳이 행성 밖으로 추방하는 데 대해 조드 장군이 “나를 죽일 용기도 없는 놈들!”이라고 욕을 하는 대목 등이 그렇다(하지만 사실은 이 ‘유배형’이야말로 크립톤 행성의 소멸에서 조드 일행이 살아남는 계기가 된다. 한마디로 최고의 문명이 발달한 크립톤 행성 사람들은 반란군에게 – 죄 없는 사람들보다 우선해서 – 최대한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문명이었던 것이다).
뭐 이런 대목을 세다 보면 역시 날을 지샐 수 있으니 그냥 덮어 두도록 하겠다. 이 영화를 즐기려면 많은 걸 [덮어 둬야] 한다. 꼭 기억하시기를.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본 이 영화는 너무나 신나는 엔터테인먼트의 총체이다. 며칠 전에 본 ‘스타트렉:다크니스’의 비주얼이 갖고 있는 장대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슈퍼맨과 조드 일당이 벌이는 액션의 강도는 역대 최강급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쌓인게 많은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절대 비아냥 아니다. 정말 신난다)
아무튼 보다 보면 이 영화의 슈퍼맨은 두 다른 맥락의 영웅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는 ‘맘만 먹으면 지구를 파괴할 수도 있는 선과 악의 두 존재가 지구를 무대로 싸우는 이야기’다. 바로 드래곤 볼 시리즈다. 슈퍼맨과 조드가 싸우기에는 지구라는 무대, 특히 뉴욕 메트로폴리스 같은 대도시는 매우 취약한 공간이다. 그래서 이들의 싸움에 허망하게 부서져가는 고층건물과 차량 및 시설물들이 참 안쓰러울 뿐이다. 싸우려면 좀 사막 같은 데 가서 싸우든가…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드래곤 볼 시리즈의 손오공 역시 외계에서 온 인류의 구원자. 신과 죽음을 초월한 능력자. 자손 대대로 이어진 히어로 계보와 팬덤의 확장 등을 보면 무척 비슷하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또 하나는 바이블 스토리. 슈퍼맨을 예수에 대입시키는 해석이나 시도는 결코 새롭지 않다. 심지어 ‘슈퍼맨 리턴즈’에서는 ‘부활’이란 설정까지 등장해 수많은 관객들에게 떡밥을 던졌다. 그런데 ‘맨 오브 스틸’에선 또 다른 식으로 이런 해석을 밀어붙인다. 물론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도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외계 세균의 존재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스와닉 장군에게 “33세까지 아무도 감염시킨 적이 없다”며 은근히 나이를 공개하는 대목이다. 33세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나이다. (슈퍼맨의 나이가 33세라는 것이 슈퍼맨 일대기의 공식 설정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다른 의견 있는 분이 계시면 말씀해 주셨으면 한다.)
사실 예수와 슈퍼맨(특히 영화 ‘맨 오브 스틸’의 슈퍼맨)은 많은 성장기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친아버지를 모르는 채 양아버지에 의해 양육됐고 ▲정체성 때문에 고민했고 ▲인류와는 엄청난 능력 차이를 가졌고 ▲기적을 일으켰으며(광신도 엄마가 “Act of God”이라며 흥분하는 장면도 나온다) ▲왜 친아버지가 자신을 인류에게 보냈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며 ▲공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구금되기도 하지만 ▲언제든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런 슈퍼맨을 의심하고, 괴물 취급하고, 욕하는 인간들은 빌라도 앞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 유태인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존재들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맨 오브 스틸’의 많은 장면은 ’21세기에 예수라는 존재가 인류 앞에 나타났다면’ 이라는 상황을 상상하게 한다.
(한편으론 ‘너무나 신에 가까운’ 슈퍼맨이란 캐릭터 자체가 반 기독교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다. 슈퍼맨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피조물일까? 그도 구원받을 영혼을 갖고 있는 존재일까? 이런 이유로 ‘맨 오브 스틸’ 중간에 삽입된 슈퍼맨과 신부의 대화는 묘하게 코믹하게 느껴진다.)
영화가 ‘슈퍼맨’이다 보니 할리우드의 톱스타들이 지나가는 청소부 역까지 맡을 정도로 화려한 캐스팅이 눈길을 끈다. 이런 배우들이 몇마디 안 되는 대사로 슥슥 지나가는게 아쉬울 지경이다.
개인적으론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로이스 레인은 매우 흡족하고 다이언 레인의 주름살이 참 가슴아팠다.
뭐 가장 중요한 슈퍼맨 역의 헨리 캐빌은 기대 이상이다. 당초 ‘전형적인 각진 턱 미남’이 아니라는 점에서 살짝 우려가 있었지만 연기력으로 충분히 커버되는 수준이다. (뭐 한때 니콜라스 케이지도 거론된 적 있었던 슈퍼맨 역할이고 보면…)
헨리 캐빌이 얼굴만 지나치게 잘 생긴 브랜든 라우스에 비해 좋은 캐스팅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2:8 가르마가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아무래도 왕년의 그분, 크리스토퍼 리브야말로 진정한 역대 최강의 슈퍼 페이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지금은 철거된 국제극장을 몇바퀴 감았던 살인적인 매표 라인을 뚫고 이 영화를 보러 간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이렇게 세 사진을 놓고 보니 슈퍼맨 수트의 색깔 변화가 더 확연하다.)
자, 이제 정리 들어가 보자.
‘맨 오브 스틸’은 ‘슈퍼맨 리턴즈’로 인해 위축됐던 무비 스타 슈퍼맨의 위치를 다시 세우는 데 더 없이 훌륭한 성취를 보여줬다.
주요 스태프들이 워너 브라더스와 3편으로 계약을 했다니 당연히 후속작이 나오겠지만(일부 보도에 따르면 다음 한 편은 그냥 속편, 그리고 3편째는 저스티스 리그-배트맨 같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함께 활약하는-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고 한다), 1편에서 워낙 기대 강도를 높여 놓은 터라 대체 2편째에는 어떤 악당이 슈퍼맨과 대결을 펼칠 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이래갖고는 어디 렉스 루더가 나올 수 있겠는가?
어쨌든 결론적으로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주는 엔터테인먼트 대작. 개인적인 취향으론 ‘스타트렉: 다크니스’가 더 다음에 들지만, 이 정도면 그리 실망하실 분은 없을 듯 하다. 강추.
아울러 이 친구의 장래가 기대된다. 딜런 스프레이베리 Dylan Sprayber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