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스미 요시노리 교수가 노벨상을 수상해서 떠들썩하다. 일본 이공계와 기업에 대해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어서 적는다.
1. 1998년, 규슈 대학
카이스트 석사 재학시절에 ‘충남-규슈 심포지엄’이라는 행사가 있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본에 가봤다. 그때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막연하게 우습게 보는 반일 정서에 푹 물들어있던 시절이라 당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규슈 대학에 가서 학회 발표를 보니, 일본 애들 참 우습더라. 영어도 아주 못하고. 수줍어서 자기 발표자료만 보고 말한다. 연구내용? 가끔 괜찮은 건 있지만. (물론 당시 석사 1년 차라서 내가 누구 연구 내용을 평가할 깜냥이 안됐다)
당시 보았던 후쿠오카는 1998년 기준으로 깨끗하고 잘 정비되어 있었다. 특히 커널시티는 멋졌다. 학회 기간 중에 안면을 튼 몇몇 일본 애들 약 20명과 밤에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때 일본 지방대 우습게 보면서 유창한 영어로 수다를 떨었다. (물론 당시 내 영어는-_- 미국도 2000년 유학 나올 때 처음 왔으니, 그냥 자신감으로 말하는 수준이었다)
술이 좀 취해서 옆자리에 앉은 자잘한 일본 애한테 ‘규슈대학은 일본에서 좋은 학교야?’라는 학벌 지상주의적인 발언을 던졌다. 뭐, 카이스트 한국에서 공돌이 학교라고 천시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자부심이 있었다. 결국, 저 질문은 ‘내가 니들보다 좋은 학교 다닌다’는 답을 받아내고 싶어 물어본 것이었다.
그 친구는 딱히 기분 나쁜 느낌 없이 일본에서 7~8위 정도라고 대답했다. 근데 옆에 있던 다른 녀석이 술 한잔 들이키고 내게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규슈대학은 제국대학으로 시작했다. 4번째로 설립된 제국대학이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제국대학 설립 순서대로 좋은 학교로 친다. 게이조 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 서울대학교의 전신)이 6번째 제국대학이니 규슈대학이 그보다는 좋지 않겠나? 너희 학교(카이스트)는 경성제국대학보다 좋은 학교냐?”
아, 갑자기 눈앞에 불꽃이 튀겼다. 술잔으로 쥐콩만한 이 녀석을 때려서 멀리 날아가게 하고 싶었다. 한국어로 입에서 욕이 몇 마디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술 많이 마시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엄청나게 불쾌한 기분으로 규슈대학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보니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국대학 설립 당시 지어진 실험실 건물도 있었다. 1911년, 일본에서 4번째로 설립된 제국대학에는 공학을 가르치는 학부가 있었다. 실험실도 있었다. 참고로 7번째 제국대학은 다이호쿠 제국대학, 즉 현재 타이페이에 있는 국립 타이완 대학이다.
학회가 끝나고 선배들과 며칠 일본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내 생각은 그랬다. 일본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나라였다.
2. 소니 출신 일본인 동료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만난 소니 출신 일본인 엔지니어. 동료로서 일본 사람과 깊이 일해본 건 이 친구가 처음이었다.
제품 설계에 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3달 안에 지지고 볶아서 뭘 내놓아야 하는 좀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처음 1달 동안 이 친구가 일을 안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설계 초안도 없었고, 쪼잔한 것에 집착하면서 질문만 해댔다. 모든 파라미터 테이블을 만들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자들과 디테일을 묻고 또 묻는 것이다.
중간에 나는 좀 짜증도 냈다. 장사 한두 번 해 보나, 이런 걸 포함해 봤자 대강 결과는 같다. 하지만 자기는 죽어도 그걸 정확히 알아야겠다며 계속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는 동안 좀 속이 타서, 우리 쪽에서 나름대로 컨셉을 잡고 초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1달이 지나고 이 친구가 엄청난 속도로 진도를 뽑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친구가 하자는 대로 같이 일하다 보니 일이 2달 만에 끝나버렸다.
반면에 내가 하려는 방식대로 진행했으면 나중에 Corner Case에 약간의 차이로 걸릴 것들이 많았다. 당장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후 신뢰성 측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분명히 있었다.
같이 하던 일이 마무리되고, 이 친구와 맥주 한잔 하면서 물어보았다. 이건 1998년 나의 질문과도 흡사했다.
“넌 이렇게 똑똑한데, 소니는 왜 잘 안 되냐?”
“일본 회사는 너무 관료적이야. SVP가 회의를 잡으면, 그 준비회의를 밑에서부터 단계별로 4번쯤 해야 해. 그리고 관리자나 임원이 나이가 여기(미국)보다 훨씬 많아서 결정이 느려. 옳은 결정이라도 2, 3년 지나서 내리면 무슨 소용이야.”
3. 넘사벽 소재, 부품 산업
최근 2년 간 업무 때문에 일본 출장을 많이 다녔다. 그러면서 일본의 화학 소재, 정밀장비 업체들과 미팅을 진행하면서 많이 감탄했다. 그중 하나의 일화만 소개해 보자.
소재 쪽 몇몇 회사들의 제품개발 인력들은 기술자 곤조와 실력이 엄청나다. 특정 소재의 물성을 정확하게 측정한 데이터가 필요해서, 그 제품의 견적서에 나온 측정치를 조목조목 따져서 내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다시 측정해 알려달라 요청한 적이 있다.
당시 연락이 닿은 한국 업체가 있었다. 이 업체는 그 요구 사항을 5일 만에 끝냈다며 결과 보고서를 보내왔다. 한국에 와서도 한 번 확인해 보라고도 했는데, 그냥 데이터를 보면 안다. 이게 제대로 측정된 게 아니라는 것을.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재현 테스트를 해보라고 하면 걸릴 게 뻔한 내용이었다.
반면 일본의 회사는 달랐다. 독촉 메일을 보냈는데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버틴다. 2달 걸렸다. 무려 2달.
이후 회의를 할 때, 자기네가 이렇게 측정하려다 세팅에 문제가 있어서 엄청 고생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자세히 이야기했다. 비즈니스 관계를 떠나서, 그걸 완성한 꺼벙한 일본인 엔지니어가 존경스러웠다.
마무리하며
다들 하는 얘기고 너무 흔한 얘기지만, 노벨상을 타느냐 타지 않느냐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타고 싶다고 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13년째 기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나 같은 엔지니어가 보기에는, 노벨상이라는 것도 사회 저변에 무엇인가 쌓여야지 누군가 받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참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키워드 따라서, 유행 따라서 연구과제의 제목을 바꾸고 그 안의 내용이나 기초는 별반 다를 것 없이 연구비만 따내고 논문 쓰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 정부가 연구비를 풀 때 뭔가 fancy한 것에만 집착하는 것. 연구성과 측정을 대통령 임기보다 훨씬 짧게 해야 하는 것. (측정은 무슨 측정이야) 드라마에서 보이는 전문직이나 직업군에 따라서 대입 학과 커트라인이 바뀌는 것.
결과적으로, 이공계는 한국에서 인기 없는 학문이다. 매우 똑똑하게 태어난 재능있는 사람이 어떤 한 분야에 몰입해서 오직 그것만 잘 해보고 싶을 때, 다이나믹한 한국사회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 누가 뭘 어떻게 해서가 아니다. 연구자 본인 스스로도 시류에 따라 지식을 파는 게 쉽지, 바보같이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자신만의 것을 찾으려 하겠는가.
원문 : 최재인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