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기술이며 문명입니다. 인공위성도 없던 시대에 정확한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첨단기술을 가진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해낸 사람이 고산자 김정호지만, 흥선대원군 일화 등 알게 모르게 잘 못 알려진 것들이 꽤 많습니다.
다행히 대동여지도의 진실이 서서히 알려지고 있긴 합니다.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정호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정확한 지리정보를 위해 헌신한 인물입니다. 그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대동여지도라는 세계적인 지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동여지도란 뜻은 ‘큰 조선 땅의 지도’라는 뜻입니다.
고산자 김정호와 흥선대원군에 얽힌 오해와 진실
이제는 제법 알려져서 다행이지만, 한동안 잘못된 정보 때문에 지식인들이 안타까워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흥선대원군과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얘기, 대동여지도의 진실입니다.
대동여지도란 뜻은 조선(大東) 여지(輿地) 도(圖)입니다. 여지는 수레라는 의미에서 파생해서 땅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고산자 김정호가 지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겨우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더니, 이를 본 흥선대원군은 대로하여 김정호를 옥에 가두고 고문했다는 것입니다. 쇄국정책을 하던 흥선대원군의 눈에는 국내의 군사, 지리 정보를 유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대동여지도의 진실이 많이 바로잡혔지만, 아직도 몇몇 어린이 역사만화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 이런 일화를 읽으며 자란 성인 중에는 아직도 이것을 사실처럼 알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막상 역사를 뒤져보면 흥선대원군이 고산자 김정호를 옥에 가두고 고문을 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이 대동여지도의 인쇄 목판본을 불에 태워버렸다는 설은, 목판본들이 멀쩡히 발굴됨으로써 낭설이라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 등에는 목판본이 전시 중입니다.
이런 거짓의 시초는 ‘조선어독본’이라고 합니다. 조선어독본은 일제강점기의 국어교과서였습니다. 초기에는 국어독본이 필수였지만, 일제의 말살정책이 강화되면서 일본어가 기본 필수과목이 되고 조선어는 선택과목이 되었습니다. 일제가 국어교과서인 조선어독본에 이런 거짓을 넣은 이유가 뭘까요?
조선인의 정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조선 정부는 대동여지도의 중요성도 모르는 무식한 정부라고 주입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조선어독본에 고산자 김정호와 흥선대원군의 거짓 일화가 적힌 것에는 육당 최남선이 조선어독본에 참여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최남선은 당시 이광수,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꼽히던 인물입니다.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도 유명한 최남선은 처음에는 친일인사가 아니었습니다. 3.1 만세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인물이 최남선입니다. 일제의 식민역사에 맞서 단군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말기에는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 황국의 병사로 전쟁에 참여하라고 주장하며 친일파로 변절하였습니다.
나름 지도에 관심이 있고 고산자 김정호의 공을 높이 샀던 최남선은 어떤 신문에서 흥선대원군과 김정호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그 글이 조선어 독본에 그대로 실렸던 것입니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정신 말살에 좋은 자료인 셈입니다.
흥선대원군과 김정호에 대한 오해와 진실 외에도 또 하나의 논란이 있는데, 고산자 김정호가 정말로 전국을 다녀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최남선의 <고산자를 회함>에서 최초로 언급되며 오해를 불러일으킨 속설입니다. 악의적인 의도가 없이 김정호의 노력을 높이 사기 위해 언급된 말이지만, 그 후 한동안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이 정말로 믿게 되는 문제를 낳았습니다. 조선 말기는 낡고 무식했다는 의식이 강하다 보니 김정호가 혼자의 힘으로 거대한 일을 해냈다는 얘기가 먹힐만한 소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면 고산자 김정호가 이전의 다른 지도들을 참고한 흔적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관인으로써 지도제작을 맡은 기간 안에 당시의 교통 수준을 이용해서 이렇게 정밀한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렇듯 대동여지도의 진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놀라운 대동여지도와 독도
전국을 일일이 다닌 것이 아니라 일부만 답사된 것이고, 그 외에는 기존에 만들어졌던 다른 지도들을 종합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인 대동여지도. 그러나 현대인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정확하고 거대한 규모로 놀라움을 주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3층 높이 정도의 공간이 있어야만 전체를 펼칠 수 있을 만큼 거대합니다. 축척은 실물의 16만 분의 1 크기입니다. 그래서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200여 개의 조각으로 나눠서 제작한 후 다시 연결하여 접었다가 펼칠 수 있도록 고안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김정호의 목판이 부서졌다는 낭설이 있는데 지도를 찍기 위한 인쇄용 목판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으며, 목판만 해도 60여 개가 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도가 너무 크다 보니 전도를 발간하기가 힘들어서, 간행된 대동여지도들은 대부분 축소된 영인본들이라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미움을 샀다는 낭설과는 다르게, 실제 조선은 지도가 더욱 필요했던 국가입니다. 중앙에서 지방 곳곳에 관리를 보내 다스리는 중앙집권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고산자 김정호가 어떤 경로를 밟아서 지도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심지어 대동여지도의 제작자가 김정호인가의 진실도 의문을 가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제작은 1800년대 역사에서 실학과 지리정보학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김정호가 교류했던 신헌, 김정희 등이 흥선대원군의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창안한 기호체계로 기록되어, 과거에 일일이 한자로 써넣었던 지도에 비해 편리하고 직관적인 지도입니다.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훨씬 정확해졌으며, 대량 인쇄 보급도 가능했고, 인구와 면적 등이 조사된 통계자료까지 담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김정호가 스스로 호를 고산자(古山子)라고 붙인 뜻은 그만큼 지도에 대한 애착을 알 수 있는 단면입니다. 어릴 때부터 지도 그리기를 좋아하던 김정호의 3대 지도는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입니다. 그중에 청구도가 첫 지도인데 대동여지도와는 다르게 책처럼 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학생들의 역사지리부도와 같은 형식입니다.
청구도도 뛰어난 점이 많지만, 인쇄본이 아니라서 직접 베껴 쓰는 필사본으로 간행되다 보니 점점 오류가 많아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에 동여도를 먼저 만들어보고(그러나 지리정보는 동여도가 훨씬 많다), 최종적으로 대동여지도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직접 발로 뛰어 만들었다는 속설과 달리, 고산자 김정호는 삼국사기, 고려사부터 신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 동국팔역도, 해동여지도 등 수많은 지도를 연구한 후 대동여지도에 흡수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전후도 같은 세계지도 제작에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항간에는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없어서 곤란하다느니, 대마도가 나와 있다느니 하는 오해도 많습니다. 1500년대에 만들어진 조선방역지도에는 대마도가 표기되어 있었지만, 대동여지도에는 대마도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대동여지도를 축소하여 새로 만든 대동여지전도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어 있는데, 대동여지도와 혼동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최초 목판본에는 독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무인도일 뿐인 섬을 위해 목판본을 더 추가하는 것이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대동여지도의 목판본과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 필사본에 독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제작 기간만 해도 10년이지만 이후에도 추가 작업은 계속되었는데, 이 대동여지도 필사본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진실인 듯 보입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뜻과 진실
고산자 김정호는 딱히 기록이 남겨지지 않아서 출생과 행적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조선은 기록문화가 발달했고 족보 제도가 있었으므로 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가 중인이 아니었겠냐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친구 최한기가 양반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양반 신분들과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면 몰락한 양반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김정호는 1800년대에 황해도에서 태어났고, 지리학자이며 실학자입니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의 과학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그 영향이 조선에 와서 실학으로 연구되고 있었습니다. 지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스무 살 때부터 지도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의 뜻은 옛 고, 메 산, 아들 자로 되어 있습니다(古山子). 다른 기록에 의하면 김정호 스스로 고산자를 지었다고도 합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김정호의 인맥으로는 최한기, 신헌, 김정희 등이 있습니다. 최한기는 김정호와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서 중국의 수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최한기도 지리, 천문 등에 다양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김정호를 여러 방면에서 지원해 주었으며 수집한 자료들을 김정호와 함께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에게 최한기 같은 친구가 있었기에 중앙에 있는 인맥을 통해 고급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생겼을 것입니다.
최한기는 실학자 김정희의 제자였기에 김정호도 추사 김정희와 교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서예가로 유명하지만 김정희는 고증학자이며 실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흥선대원군 시절 병조판서를 지낸 신헌의 도움도 컸습니다. 덕분에 김정호는 희귀한 규장각 도서를 볼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보통은 김정호의 작품으로 대동여지도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를 3대 작품으로 꼽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산자 김정호는 지리서도 제작했는데,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그의 3대 지리서라고 합니다. 지리서는 그림으로 표현 못 하는 기록과 묘사를 글로 적은 것인데,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대동여지도의 뜻 자체가 ‘큰 우리 땅의 지도’인 셈입니다.
그리고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하나가 아닙니다. 김정호는 죽을 때까지 자료를 보강하였는데, 그가 남긴 대동여지도는 목판본 외에도 여러 가지 필사본(손으로 직접 베낀 것)이 있습니다. 접는 방식에 따라 몇 개의 그림으로 구성된 지도냐를 가지고 14첩, 18첩, 22첩 등의 대동여지도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목판본의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사용자의 편리까지 염두에 둔 작업이었습니다.
10년이 넘는 기간의 제작 열정과 끝없는 자료조사를 통해 인간 승리의 집념. 이런 점에 의해 고산자 김정호는 후대의 여러 인사에게서 추앙받았고, <고산자 회함> 같은 글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어 교과서인 조선어독본에도 실렸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인 정신 말살정책에 의하여 조선 정부를 비난하는 도구로 역이용되어 대동여지도의 진실이 덮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벌을 주었다는 얘기나 전국을 직접 발로 뛰며 지도를 만들었다는 오해도 여기서 생깁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시 서양문물을 더 일찍 접한 일제도 놀랄 정도로 정교한 작업을 한 인물이었으며, 지금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해낸 인물로 남을 만큼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고산자 김정호입니다.
이렇듯 큰 획을 그은 김정호이지만, 말년에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일설에는 폐결핵에 걸려 죽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죽을 때까지 지도를 계속 연구하고 수정하며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원문 : 키스세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