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법 제9조(정치 관여 금지)
① 원장·차장과 그 밖의 직원은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제1항에서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1.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결성 또는 가입을 지원하거나 방해하는 행위
2. 그 직위를 이용하여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지지 또는 반대 의견을 유포하거나, 그러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찬양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의 의견 또는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
3.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을 위하여 기부금 모집을 지원하거나 방해하는 행위 또는 국가·지방자치단체 및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공공기관의 자금을 이용하거나 이용하게 하는 행위
4. 특정 정당이나 특정인의 선거운동을 하거나 선거 관련 대책회의에 관여하는 행위
5. 소속 직원이나 다른 공무원에 대하여 제1호부터 제4호까지의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거나 그 행위와 관련한 보상 또는 보복으로서 이익 또는 불이익을 주거나 이를 약속 또는 고지(告知)하는 행위
국가정보원은 수많은 국가 조직 중에서도 비교할 대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특수한 기관이다. 보안 정보를 수집하고, 기밀을 취급하며, 국가 안보와 관련된 수사를 수행한다. 보통 사람은 그 문턱도 넘기 힘들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국가정보원은 철저히 정치와 거리를 둬야 한다. 그들이 수집한 그 가장 내밀한 정보가 정치에 활용될 때 발생할 폐해는 실로 상상하기도 싫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정보원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국가정보원이 지켜야 할 정치적 중립이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중정)이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뿐 아니라, 오늘날 국가정보원(국정원)에 이르기까지, 이 정보기관은 정치의 가장 내밀한 중심에서 활발히 활동해왔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태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 야권 후보에 불리한 글을 썼고, 경찰은 관련 수사 결과를 고의적으로 은폐했다.
2013년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태는 이렇게 정리된다.
사실 이는 국가정보원이 정치에 개입했을 뿐 아니라, 다른 공권력인 경찰이 이 사실을 은폐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작 댓글이나 다는’ 모습 때문에 그 심각성은 희석된다. 하도 어이가 없다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느껴지는 미묘한 상황이다. 혹여 이런 현상까지도 국가정보원이 의도한 건 아니었을까,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이 사건을 단순히 원세훈 전 국장 아래 국가정보원의 ‘돌발 행동’으로 본다면 얘기를 해프닝으로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보긴 힘들다. 이 기관이 걸어온 긴 역사 때문이다.
손대선 안 되었을 정치의 역사, 그 역사는 1961년, 중앙정보부란 이름으로 기관이 창설되고 그 장의 자리에 김종필 – 우리가 익히 아는 ‘3김’의 한 축 – 이 앉은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5.16 군사정변과 중앙정보부 창설, 4대 의혹 사건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부정축재 및 조직범죄 등에 대한 처벌을 통해 정치적 지지를 끌어모았다. 그러나 ‘4대 의혹 사건’이라 불리는 스캔들로 상당한 지지를 잃어버렸는데, 이 4대 의혹 사건의 중심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것이 바로 중앙정보부, 즉 지금의 국가정보원의 전신이 되는 기관이다.
이는 단어 그대로, 군사정권 초기 발생한 4가지 사건을 가리킨다.
첫 번째는 증권파동으로, 중앙정보부가 증권회사를 설립하고 주가를 조작한 사건이다.
두 번째는 워커힐 사건으로, 역시 중앙정보부가 위락시설 워커힐을 세우며 대량의 자금을 유용한 사건이다.
세 번째는 새나라자동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가 재일교포 측과 접촉하여 새나라자동차를 설립하고 일본에서 불법 수입한 자동차를 국내에 팔아 큰 폭리를 취한 사건이다.
네 번째는 파칭코 사건으로, 불법 도박 기기인 파칭코를 국내에 밀수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모두 중앙정보부가 공화당의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사건으로 알려졌으며, 그 시절답게(?) 의혹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 내막이 완전히 드러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4대 의혹 사건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옷을 벗어야 했다.
인혁당과 동백림
초대 부장이 옷을 벗었지만 정치 개입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인민혁명당 사건 – 약칭 인혁당 사건 – 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며, 그중에서도 2차 인혁당 사건, 즉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당시 대선후보)의 공식 사과를 부르기도 했다.
1964년, 김종필 초대 부장이 물러난지 약 1년 반 후.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으로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41명의 ‘인민혁명당’ 관계자를 검거한다. 이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이 과정에서 사건에 대한 검찰 내부에서의 이견이 발생했을 뿐 아니라, 또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 등이 폭로되기도 했다.
또 1967년 중앙정보부는 독일 및 프랑스로 건너간 유학생 및 교민이 동베를린을 통해 간첩교육을 받고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발표했으며, 이 과정에서 강제송환 및 고문 등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들은 2000년대 들어 ‘국가정보원 과거 사실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재조사를 통해 상당 부분 확대, 과장된 사건임이 밝혀지게 된다.
유신의 선포, 저항, 그리고 김대중 납치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한편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국내 정세가 혼탁해지면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사건들이 대거 발생한다. 김대중 납치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코리아게이트 등이 그것이었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고 반유신 활동에 매진하던 정치인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정권은 이 납치와 한국 정부의 관련성을 부정하였으나, 오늘날 이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중앙정보부 요원을 동원하여 벌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목적이 단순 납치가 아니라 김대중을 살해하는 것이었다는 설도 설득력있게 제시되고 있다.
유신 선포에 이은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국내 여론이 부정적으로 치달아가자, 1974년 박정희 정권은 ‘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불법단체가 불순단체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발표하고 긴급조치 4호를 공포한다. 이어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을 정부를 전복하려는 세력이라 발표하였고,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추가 발표를 통해 여기에서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대법원에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로서 기소된 21명 중 8명은 사형, 7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사람들은 15~20년을 선고받게 되는데, 이중 사형 판결을 받은 8명에 대한 형이 바로 다음 날 집행되었다. 이 판결은 국제적으로도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으며,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린다.
그로부터 삼십 년 가까이 지난 2002년에 이르러서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이 조작된 정황을 밝혀냈고, 재심 청구 끝에 2007년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에 대한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10.26과 국가안전기획부
유신의 끝은 – 모두가 알다시피 한 정의 총에 의해 갑작스레 찾아왔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시해한 것이다.
10.26의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 사이의 알력, 박정희의 편애, 부마 항쟁 등 유신 체제의 붕괴 전조, 김재규의 발기부전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으나 그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이것이 중앙정보부가 국내 정치에서 일으킨 가장 거대한 사건이라는 데는 누구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0.26 사태로 박정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공백이 되었던 권력은,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키며 다시금 군부의 손에 넘어갔다. 전두환의 제 5공화국이 출범하며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10.26이라는 사태가 일어나고 이름이 바뀐 뒤로도 그 ‘어둠의 권력’이 힘을 잃는 일은 없었다.
수지 킴과 용팔이
1987년, 전두환 정권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한창 높아졌을 시절. 수지 킴이라는 이름의 여간첩 이야기가 문득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윤태식이라는 평범한 남성의 부인이 사실 북한의 간첩 ‘수지 킴’이었으며, 이 수지 킴이 싱가포르를 경유해 남편 윤태식을 북한으로 납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더욱 무서워진 북한의 납치 수법에 대해 보도하며 시민들의 안보 의식 강화를 주문했다. 북한으로 납치당할 뻔 했던 윤태식은 새옹지마인지 이후 벤처 사업에 진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그의 행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결국 전혀 딴판인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윤태식은 홍콩에서 말다툼 끝에 부인을 살해한 뒤 싱가포르로 날아가 북한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한다. 이에 그는 한국 대사관에서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한 시나리오를 꾸미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의 부인이 간첩이며 자신이 북한 대사관을 통해 납치당할 뻔 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안기부는 이미 그의 말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으나, 보안 정국을 구성하기 위해 이를 묵인하고 사건을 조작하고 기자회견을 마련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같은 1987년 일어난 ‘용팔이 사건’도 대표적이다. 당시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의 ‘빅딜’로 창당된 통일민주당의 창당대회가 열렸는데, ‘용팔이’로 불리던 조직폭력배 두목 김용남의 주도 아래 조직폭력배들이 이를 방해했다. 이 사건을 사주한 것도 안기부로 알려졌다.
미림팀 – 문민정부 출범에도 불구하고
미림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1991년부터 98년까지, 노태우 정부 및 김영삼 정부 시기 안기부가 운영했던 비밀 도청팀으로, 김영삼 정부 출범시 해체되었다가 94년 다시 재조직되었다.
미림팀의 도청은 정부부터 정치인, 기업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미림팀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미림팀의 도청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삼성 엑스파일’ 때문이었다.
미림팀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다시 해체된다.
또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당시 야당 대선후보의 낙선을 목적으로 안기부장이 재미교포를 포섭,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돈을 받았다’는 내용의 허위주장을 유포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안기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당선되면서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안기부 직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 일로 인해 안기부는 다시 한 번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외에도 총풍 사건 등이 비슷한 시기 일어났으나, 이와 안기부 사이의 관련성은 증명되지 않았다.
민주정부 10년, 잃어버린 10년? 여전한 10년?
김대중과 노무현의 당선으로 10년간 민주당계 정부가 들어서고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정치적 스캔들은 예전, 특히 군사독재 시대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격변기에는 종종 국정원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2007년 대선에서 이재오는 국가정보원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관련된 엑스파일을 작성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며, 이명박과 함께 당시 야권(한나라당)의 대선후보군 중 한 사람이었던 박근혜에 대해서도 엑스파일이 작성되었다는 설이 돌았다.
한편 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김대중 정부의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에 불법적으로 자금이 송금되었다는 의혹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는 대북송금 특검을 통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이 ‘대북송금 사태’에서도 국정원이 대출 및 송금을 위해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국정원장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다시 2013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와 성명
다시 2013년. 국정원의 ‘댓글 선거 개입’이 검찰 수사로 확인되면서, 수세에 몰린 여당 새누리당은 다시 한 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발언을 했다’는 ‘북풍’으로 맞불을 놓는다. 이에 야당 민주당 측이 ‘이렇게 된 이상 대화록을 직접 확인해보자’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하자, 국정원은 돌연 2급 비밀로 분류되어 있던 당시 대화록을 국회의원들에게 돌연 공개했다.
그러나 대화록 전부가 세간에 공개되었음에도 불구, 거의 모든 매체의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NLL 포기를 뜻하는 게 아니며, 대화록 전반적으로도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을 했다고 보는 여론이 더 우세하게 나타났다.
이후 국정원은 대화록 공개가 국정원의 명예와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또 뒤이어 심지어는 대화록의 내용을 ‘해석’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국정원 본연의 업무와 동떨어진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반복되는 역사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지어는 정권 재창출 시기 때조차 늘상 불거져 나오는 국정원의 정치 개입 의혹. 이 한 번의 사건이 그저 해프닝일 뿐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정치 개입의 역사는 오히려 끊긴 적이 없다. 매번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이름이 바뀌고 전 국정원장이 법적 처벌을 받는 등 풍파가 몰아치지만 그 또한 그때 뿐이다. 그리고 2013년, 그 정치 개입의 역사는, ‘댓글 달기’라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 그러나 여전히 심각한 형태로 재현되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 ‘기록된’ 국정원의 암흑기가 과연 국정원의 ‘숨겨진’ 진짜 역사 중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할까 하는 것이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중앙정보부 시절 만들어진 그들의 첫 번째 원훈만큼 이 조직의 특수성을 잘 보여주는 말도 없다. ‘음지에서 일하는’, 그래서 기록되지 않은 그 수많은 역사들은 대체 어떤 모습일 것인가.
한편 ‘댓글 선거 개입 사태’에 이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사태까지 반복된 작금에,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에 ‘스스로 개혁할 것’을 주문했다. 이 ‘셀프 개혁’이 과연 반복되는 선거 개입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보검이 될 수 있을지는, 글쎄, 알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