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축전이라는 올림픽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족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우리 선수들의 경기를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메달 소식에 환호성을 내지르던 시절은 이미 갔다. 글쎄, 우리 집만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올림픽엔 가족들과 같이 경기를 응원한 기억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금메달 소식도 심상하고 안타까운 탈락도 그리 아쉽지 않다. 까짓것, 최선을 다했으면 됐지. 꼭 메달을 따야 맛이야? 우리도 이제 메달 빛깔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만큼 살 만하게 된 것일까. 개인의 영광을 굳이 나라의 그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국민의식이 성큼 자란 셈인가.
골프와 대중
언제 개막하고 언제 폐막했는지도 모르고 끝난 리우올림픽의 정점은 박인비가 찍은 듯하다. 116년 만에 올림픽에서 열린 여자골프에서 그녀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정작 시청자들보다는 언론과 방송이 자못 흥분했으니 말이다.
쟁쟁한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금메달을 땄다는데 재를 뿌리는 건 아니다. 박인비가 딴 금메달과는 무관하게 나는 그걸 보도하는 언론의 환호에 담긴 의미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는 얘길 하는 것이다. 글쎄, 언제부터 우리 언론이 골프 관련 보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골프는 박세리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처음으로 우승한 1998년부터 온 국민의 화젯거리로 떠오른 듯하다. 뜻은 잘 모르지만 엘피지에이(LPGA)를 귀와 입에 익히게 된 것도 그때였다. 아마 그 무렵에 환호했던 국민들 가운데 골프의 경기규칙이라도 제대로 알았던 사람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박세리의 우승에 환호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골프야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 선수가 미국에서 우승을 했다니 그걸 사심 없이 축하한 것이었을 게다. 거기다가 세계 최강국인 미국에서 우리나라 어린 여자 선수가 이룬 우승을 통해 일종의 대리 만족과 함께 민족적(!) 자부심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골프 인구’에 포함되는 골프를 일상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의 느낌은 또 달랐을 것이다. 골프의 묘미를 알고 즐기는 이들에게 골프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스포츠이니 그 경쟁에서 승리한 박세리의 우승도 좀 더 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잘은 몰라도 그걸 보도하는 언론사 기자들도 이미 골프에 입문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특정 스포츠를 공부해서 보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자신도 즐기는 종목이라면 훨씬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보도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박봉에 시달리며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던 1960년대의 신문기자들은 대중교통 중에서 버스 관련 기사를 주로 썼다고 한다. 다소 여유가 생긴 70년대 이후에는 택시 관련 기사가 많아졌고, 80년대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된 이후엔 승용차 관련 기사가 많아졌다고 한다. 기자들이 남 먼저 오너드라이버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보도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계급(계층)과 그 의식이 기사에 반영된다는 얘기다. 그들의 존재 양식이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결정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골프대회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 골프 기사의 비중이 커진 것도 그런 상황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골프의 대중화?
박세리를 필두로 미국 골프계에 진출하는 한국인 선수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남자 선수로는 최경주가 입지전적 성공담을 보여주었고, 누구라고 하면 알 만한 선수들의 이름은 시즌이 되면 날마다 신문과 방송을 탄다.
덕분에 골프는 소수의 동호인들이 즐기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주변의 동료나 지인들 가운데서 골프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른바 ‘필드’까지는 나가지 못해도 골프연습장을 드나드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나는 골프를 전혀 모른다. 골프장은 군 복무 시절에 정부 요인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수색정찰’이라 하여 서울 인근의 골프장을 뒤지고 다닌 경험이 전부다. 골프는커녕 골프 연습장에도 가 본 적이 없으니 문외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것과는 무관한 처지라고 해야 옳다.
나는 골프가 예전과는 달리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이 나라에선 대중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고급의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골프를 나와 무관한 운동이라고 여기고 거기 어떠한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이유다.
영국은 한국과는 달리 골프가 대중화되어 있다지만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평생 골프장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블레어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영국에서도 기본적으로 골프는 서민의 스포츠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변의 교사들은 물론이고, 경찰이나 일반직 공무원 가운데서도 심심찮게 골프를 즐긴다는 이들을 만난다. 저마다 입문의 동기나 경로, 또 즐기는 수준이 다르겠지만 나는 그들의 기호를 존중한다. 자기 경제력과 무관하게 일종의 과시의 형태로 골프를 즐기는 게 아닌 한은 말이다.
이들이 말하는 골프는 이 나라의 기득권 인사들이 즐기는 골프와는 일정하게 구분되는 측면이 있다. 대중화되었다고는 해도 한번 이른바 ‘필드’에 나가는 비용은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대체로 ‘도상(圖上) 골프’라 할 수 있는 스크린 골프 정도를 즐기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퇴직자들의 산행에서 만난 선배와 ‘골프’를 갖고 논란을 벌인 것도 저마다 바라보는 골프에 대한 생각과 범위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퇴직자들뿐 아니라 재직자들도 소일거리로 골프(주로 스크린 골프)를 즐긴다고 했다.
그의 경험 범주 안에서 골프(스크린 골프)는 “돈도 거의 들지 않는데다가 술 마시고 놀아가면서 즐길 수 있는 ‘오락’”이다. 그가 전하는 풍경을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들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골프’가 대중 스포츠 경기 종목의 하나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가 말하는 골프와 내가 말하는 골프가 구분되는 지점이다. 그것은 고작 연습장 주위를 오가는 수준의 골프가 아니라 이른바 돈과 권력을 갖춘 사람들의 사교의 수단이다. 그들만의 차별적 문화를 향유하는 여흥으로서의 스포츠다.
‘골프연습장’조차도 고단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선배는 스크린 골프장에서 만나는 이들이 교사뿐 아니라 공무원, 교도관 등 봉급생활자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그런 부분이 그가 골프가 더 이상 귀족들의 여흥이 아니라 대중화된 스포츠라고 여기는 근거였을 것이다.
나는 그들 봉급쟁이는 그나마 ‘삶의 여유’를 누리는 계층이라고 반박했다. 굳이 총 급여가 2천만 원 이하인 근로소득자가 전체의 절반에 육박(44.9%)하는 750만여 명이라는 통계를 불러올 필요는 없다. ‘골프’뿐 아니라 ‘골프연습장(스크린골프)’조차도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른바 ‘필드’를 도는 골프와 무관하게 ‘도상 골프’를 즐기는 이들의 기호와 취향은 그것대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런 형식으로나마 골프를 즐길 수 있다면 그걸로도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골프 인구에 편입시키면서 골프가 대중화되었다든가, 골프가 대중 스포츠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외견상 ‘골프장 문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불황 탓에 중산층이 줄고 골프장 수가 급증하면서 부킹이 쉬워지고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회와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대중화 시대의 도래’를 주장하는 논리의 주 근거다.
주중 10만 원 내외로 라운드가 가능한 골프장이 수두룩하고 20~30대 젊은 층의 골프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골프의 대중화와 골프 인구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게 스크린 골프다. 싸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 골프장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이들 평일 스크린 골프 인구를 주말 필드 인구로 옮겨오는 게 과제가 되었다.
대한골프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20세 이상 인구 4천여 만 명 중 골프 인구는 약 619만 명에 이르러 성인 10명 중 1~2명이 골프를 생활 스포츠로 즐기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골프가 생활 스포츠로서 발판을 다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정부도 정책적으로 골프 대중화를 촉진하려고 한다.
이 같은 외부적 지표만으로 보면 골프 대중화 시대가 눈앞에 온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여전히 여가를 모자란 잠과 휴식으로 때워야 하는 세대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가깝다. 일상적 해고의 위험 앞에 노출된 비정규직 노동자도 천만에 이른다.
여가를 즐긴다는 것은 얼마간의 돈만 있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돈보다 여가를 온전히 재충전을 위한 소비로 인식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 사소한 여유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체 임금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이 누릴 수 있는 작은 여유들, 스크린골프이나 골프 연습장을 드나들면서 골프를 즐기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그걸 준거로 ‘골프가 대중화되었다’고 골프가 ‘대중 스포츠’라고 강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노태우 정권 당시 어떤 설문조사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인식하는 응답자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서 조사기관을 당황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소득이 늘면서 자신의 계층을 실제보다 높은 것으로 인식하는 일종의 허위의식으로 분석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중화 인식, 계층간 경계 무화하여 사회적 갈등 은폐할 수도
도상 골프를 즐기는 수준의 여유 있는 대중들이 자기 경험을 과대하게 해석하여 그걸 ‘골프의 대중화’라거나 골프를 ‘대중 스포츠’로 규정하는 것도 비슷한 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골프 대중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과정과 형태로 이해해도 자연스럽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명확한 계층(계급)간 경계를 무화시키면서 계층 간 격차에서 비롯한 빈부 문제 등 사회적 갈등을 은폐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을 고급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계층에 편입하면서도 겉으로는 서민대중으로 포장하는 게 계층 문제에서 드러날 수 있는 몇몇 문제를 덮어버릴 위험성이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나는 내 주변의 이웃과 지인들이 자기 기호에 따라 골프를 즐기는 것을 비난하거나 폄훼할 생각은 없다. 그들의 기호와 취향을 존중하는 대신 그들이 과도기적 형태에 그치는 자신의 취미 생활을 과대평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있는 갈등과 해결해야 할 모순을 무화하거나 은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저께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새누리당 의원(강효상)이 골프장에 부과되는 개별소비세 폐지를 골자로 하는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한다. “김영란법 시행이 예고되면서 언론인과 공직자 등의 ‘골프 접대’ 관행이 도마에 오른 가운데”서다. (관련 기사)
골프 선수 박세리를 대동하고 연 기자회견에서 이 언론인 출신의 선량이 편 법안 취지는 꽤 낯익다. 그는 “골프는 사치성 스포츠가 아닌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중 스포츠”라면서 “개별소비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시켜, 다른 스포츠와의 부당한 차별을 없애고 골프의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별도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회원제 골프장에 1인 1회 입장 시 부과되는 ‘그린 피(green fee·입장료)’ 가운데 세금이 2만2200원이고, 이 가운데 개별소비세가 1만2000원이란다. 그는 이 세금 가운데 개별소비세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그가 조사한 평균 골프장 입장료는 퍼블릭 골프장이 주중 11만8800원, 주말 16만9600원이고, 회원제 골프장은 각각 16만3500원, 21만1700원이었다. 그는 이 요금을 일본(5~17만 원), 미국(3~5만 원), 말레이시아(3만~8만 원)의 평균 입장료와 비교·대조시켰다.
2016년 현재, 골프장에 가서 골프를 즐기려면 입장료로 최저 12만여 원에서 최고 21만여 원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료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어떤가. 역시 “골프는 사치성 스포츠가 아닌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중 스포츠”인가, 아닌가.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