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난지도 벌써 반 년이 지났는데 또다시 노무현이다. 그 인기를 어떻게든 등에 업어 보려는 무리들부터, 부관참시를 기도하며 반전을 노리는 무리들까지, 정치인 노무현은 이승을 떠나서도 사람 여럿 먹여 살리고 있구나 싶다.
다시 불이 붙기는 했지만 NLL을 둘러싼 논란에서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단 하나 추가된 것은 지난 20일 국가정보원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당시 노무현-김정일 회담 대화록 일부를 보여주었다는 (그리고 이에 대해 문재인 의원이 대화록 공개를 제의한 것) 정도. 그러나 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관계가 드러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할 이야기에도 새로운 내용은 하나도 없다.
‘영토를 팔아먹은 종북 노무현’
NLL 논란을 부추기는 쪽에서 국민들로 하여금 떠올리게 하려는 이미지는 ‘김정일에게 영토를 팔아먹으려 한 종북게이 노무현’인 듯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문제에 대해서 북한과 협상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영토를 협상의 대상으로 삼는 대통령은 그와 같은 비난을 받아도 싸다.
그런데 NLL이 영토선이긴 한 걸까? 논란은 자연스럽게 NLL의 법적 지위로 이어진다. 한때 헌법 3조를 두고 ‘어차피 한반도 전체가 우리 영토인데 왜 NLL을 영토선이라 주장하느냐’는 반론이 나오자 보수 정치인과 법학자들은 ‘해상경계선’이라고 표현을 바꾸어 가면서 NLL이 사실상 ‘해상에서의 군사분계선’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작년 11월, 진중권과의 NLL 토론에서 승리하며 인생의 정점을 찍었던 변희재 또한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 개인적인 관측으로는 그전까지 NLL 이슈는 여전히 수면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변희재가 진중권을 토론에서 이겼다’는 대한민국 4강 진출과도 같은 놀라운 소식이 전해지자 NLL 이슈에 크게 불이 붙었다(개인 차원에서의 토론이긴 했지만 준비를 부실하게 한 진중권에게도 대선 패배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있다).
NLL에 대한 1974년 CIA 보고서
보수 법학자들은 NLL이 1953년 8월 30일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에 의해 설정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 해군이 그 내용을 해군본부 작전명령 제1235호로 공식화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클라크 사령관의 작전명령서는 물론이고 해군 작명 제1235호도 이미 폐기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보다 결정적인 증언은 1974년 1월에 작성된 미국 CIA의 보고서(The West Coast Korean Islands)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NLL이 1965년에 유엔군 산하 해군 구성군 사령관에 의해 설정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1961년에 비슷한 내용의 기준선을 NLL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지정한 적은 있으나 그보다 이전의 기록은 찾지 못했다는 것이 CIA 보고서의 내용이다.
또한 CIA 보고서는 1965년에 설정된 NLL의 유일한 목적은 “특별한 허가 없이는 유엔군 사령부 소속의 군함이 그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명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북한의 군함이나 어선이 NLL을 내려온다고 해서 이를 막을 수 있는 근거가 NLL 개념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 이양호 당시 국방장관이 “NLL를 침범한다 하여 정전협정 위반은 아니다(관련기사)”라고 답한 것이다.
박정희도 NLL을 영해선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영해는 ‘영해 및 접속수역법‘에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법에 따르면 서해 5도 해역은 영해에 포함이 되어 있지 않다. 이는 법이 처음으로 제정된 1977년부터 그랬다. 그리고 1977년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영해법에 NLL을 따라 명기를 해두었다면 적어도 국내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왜 박정희 정권은 서해 5도 지역은 빼놓고 영해법을 선포했을까?
2006년에 비밀등급이 해제되어 공개된 1975년의 미국 외교 전문이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외교 전문에 따르면 미국은 NLL을 영해선으로 주장하는 것이 국제법에도 위반되며 해양법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에도 배치된다고 보았다. 1975년에 이 전문을 작성한 이는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였다.
미국 정부도 NLL을 영해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 국방부가 북한 선박과 항공기의 NLL 월선에 대해 ‘영해’를 침범했다는 주장에 대해(그러므로 대한민국 정부가 한번도 NLL을 영토선이라 주장한 적은 없다는 변희재의 주장은 거짓이다), 헨리 키신저는 “북방정찰한계선(Northern Patrol Limit Line: 키신저는 북방한계선(NLL) 대신 이러한 표현을 쓰고 있다)은 국제법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 이는 일방으로 설정된 것이며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공해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분할하고 있어 국제법에 분명히 대치되며, 해양법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과도 대치된다”고 말했다.
또한 키신저는 같은 전문에서 “한국 국방부의 ‘영해’라는 잘못된 어휘 사용은 위의 문제를 악화시킨다… 미국 정부와 유엔군 사령부는 해당 사고(북한의 NLL 월선)가 한국의 영해 또는 심지어 배타적어로구역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을 전혀 지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가 영해법에서 서해 5도 해역을 넣지 못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NLL에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NLL의 소유권 등기가 김정일에게 이전되기라도 한 것인가? 2007년의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NLL 등을 비롯한 협상의 전권을 ‘NLL 사수’를 주장하던 김장수 당시 국방장관에게 위임했고, 김장수 전 장관은 작년 1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정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서 NLL에 대해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도 암묵적으로 NLL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CIA의 보고서나 키신저의 전문, 그리고 우리나라 영해법의 구성 등을 살펴보면, 국제법상으로는 변희재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 굳건하지 못하다. 현실적으로는 군사 분계선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법적으로도 엄연히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협상의 대상으로 삼느냐 아니면 필사수호하느냐의 문제는 온전히 정치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대급부로 얻어낼 만한 것이 있다면 협상도 해볼 만할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도 NLL을 수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실질적인 분계선으로서 기능하게 하여도 좋을 것이다. 국익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그러나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다시 말해 NLL을 협상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국헌을 부정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로 매도될 수는 없다(물론 비판이야 가능하다). 앞서 지리하게 설명했듯이, NLL은 국제법상 그 지위는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미국조차도 NLL을 영토선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국제사법재판소로 이 문제를 가져가면 변희재나 보수 학자들의 확신과는 달리 과거 북한이 1999년에 내놓은 해양경계선안이 절충안으로 채택될 확률이 높다.
여당도 정부도 국정원도 치졸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대체 이 이야기가 지금 왜 또 나온 것인가? 정전협정 문서에 NLL을 인정한 숨겨진 부속조항이 발굴되기라도 했나? 아니면 NLL 소유권 등기가 역적 노무현에 의해 김정일에게 몰래 이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했나? 실로 놀랍게도 아무 것도 바뀌거나 새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저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일부를 새누리당의 몇몇 의원들에게 공개한 일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정원은 왜 지금 이를 공개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최근 불거지고 있는 국정원 선거 개입 이슈에 물타기를 하려는 시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정치적 이득을 위한 작당이라지만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치졸한 일이다. 대화록을 공개함으로써 앞으로 대한민국 외교가 입게 될 타격은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본디 외교란 적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다. 친구들끼리의 소통에 면책 특권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적과의 소통, 그리고 합의를 일상으로 다루는 것이 외교이기 때문에 외교에서는 (자국의 여론과는 상관 없이) 실무자들의 자유로운 논의를 보장하는 관행 또는 장치가 발달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본래 비공개인 대화록을 함부로 공개한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의 어떤 정치가, 외교관이 진솔한 외교를 펼칠 수 있을까? 정청래 의원이 그랬듯 박근혜-김정일 회담록을 공개하자고 하면, 앞으로 중국과의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여 온 국민은 물론이요 미국도 열람할 수 있도록 하자고 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