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오늘(8월 29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간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되었다. 이 조약은 이미 지난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인한 것이었다.
이미 조인된 조약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일주일 만인 이날, 순종황제의 조칙 형태로 발표했다. 이 조약이 공포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강제 편입되면서 국가의 지위를 잃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일제는 ‘일한병합(日韓倂合)’이라고 부르고 우리나라에서는 ‘경술년의 국가적 치욕(경술국치)’이라 기록하는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합병 이후, 한반도는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가 되어 ‘일본 제국령 조선(Korean Dependency of the Japanese Empire)’ 또는 ‘일본 통치하 조선(Korea under Japanese rule)’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 공포
제3대 통감 데라우치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이루어진 이 조약의 조인은 그러나, 황제의 비준절차가 빠져 있었다. 8월 29일 발표된 조칙에 찍힌 옥새도 순종황제의 대한제국 옥새가 아니라 일본이 강제로 빼앗은, 퇴위한 고종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었으며 순종황제의 서명도 없었다. 이는 이 조약이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무효’라는 증거들이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무효든 아니든 한일합병조약은 한국을 ‘일본 령(領)’으로 규정한 형식 절차였을 뿐이었다. 이미 한국은 명목상의 독립국이었을 뿐 사실상 일본의 속령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었으며,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경찰권과 사법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던 것이다.
1909년 4월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무대신은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하여 ‘한일합방’안을 성안했다. 같은 해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 방침을 확정한 뒤 일왕의 재가를 받아놓고 있었다. 합방의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병합에 관한 건
제1,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단행할 것. 한국을 병합하고 그것을 제국 판도의 일부로 하는 것은 반도에서 우리 실력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제국이 내외의 형세에 비추어 적당한 시기에 단연코 병합을 실행하고, 반도를 명실공히 우리 통치하에 두고, 한국과 제외국과의 조약 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은 제국 백년의 좋은 계책이다.
병합 계획을 실행하는 방법론으로서 가쓰라는 “모든 준비를 하고, 그들로 하여금 병합의 필요성을 열망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을 최상으로 한다.”고 메모했다. 즉 한국에서 합방 청원을 요청받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일제의 ‘한국 병탄’ 시나리오
이 ‘병합 청원’의 시나리오에 동원된 것은 일본 정재계의 흑막의 실력자이자 친일단체 일진회의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와 정미7적(1907년의 한일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7인)으로 불리는 송병준이었다.
송병준은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 상주문(上奏文)’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여론을 조작,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뒤에 다시 일본에 건너가 일제의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흥정하는 매국외교로 전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송병준의 이러한 활동을 눈치 챈 이완용은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와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이완용은 일본에 유학했던 비서 이인직으로 하여금 교섭에 나서게 했다.
일제는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는데 이는 적중했다.
이완용은 송병준 내각이 들어서면 보복당할 수도 있고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현 내각이 붕괴되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자신의 내각이 조선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일제의 시나리오가 착착 진행되면서 일제는 ‘병탄(倂呑)’의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판단,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내세우고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 공작을 시작했다.
조선 병합에 앞장섰던 극우적 국가주의 단체 ‘흑룡회’의 설립자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는 일찍이 송병준이 작성했던 ‘한국 황제, 통감, 한국 수상에게 보내는 합방 건의서’를 참조하여 일진회 명의의 ‘합방 청원서’를 재작성했다.
우치다는 이를 스기야마에게 주어 가쓰라와 데라우치에게 제출하도록 했다. 데라우치는 이완용이 합방 청원을 받아들여 황제에게 합방의 승인을 요구하고, 황제가 천황에게 합방을 제의한다는 식의 수순을 취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뒷날 초대 조선 총독이 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연극을 시종 나는 모르는 것으로 하며, 그들이 단독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다.”
12월 1일, 우치다가 가져온 ‘합방 상주 및 청원서’를 받은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문구를 수정하여 4일‘일진회 성명서’를 <국민신문>에 부록으로 발표함과 동시에 ‘합방 상주문’, ‘총리 이완용께 올리는 합방 청원서’, ‘통감께 올리는 합방 청원서’등을 제출했다. 바야흐로 합방의 시나리오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고 있었다.
1910년 2월 2일, 일본 총리 가쓰라는 ‘일진회의 수년에 걸친 친일적 성의를 이해하고, 일진회의 청원을 수리한다’고 전했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을 관저로 불러 병합의 승인을 요구하며 미리 준비해 두었던 각서를 수교하였다.
마지막 각의의 8대신, ‘경술국적’
조약 체결이 다가오자 일제는 이 사실이 알려져 소요가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나남·청진·함흥·대구 등에 주둔한 일본군을 밤을 틈타 서울로 이동시켰다. 조약 체결일인 8월 22일에는 용산에 주둔한 제2사단을 동원하여 경비를 담당케 했다.
8월 18일, 대한제국 정부의 마지막 각의에 합병조약안이 올랐다. 내각대신 가운데 학부대신 이용직만이 조약에 반대하다 쫓겨났고 나머지 대신들이 조약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조약안이 통과되었다. 이 마지막 각의에 협조한 대신들은 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등 8명이었다.
이들 8명의 매국노들은 한일 병탄 조약 체결 이후 공을 인정받아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들을 일러 ‘경술국적’이라 부른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경술국적에도 이름을 올려 3관왕이 되었고, 백작 작위를 받았다가 뒤에 후작으로 승작되었다(관련 기사, ‘후작에서 자작까지, 경술국치와 조선귀족들‘).
8월 22일, 형식적인 어전회의가 열려 이완용이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완용은 순종의 국새를 찍은 위임장을 받아 남산 기슭의 통감관저로 달려갔다. 위임장은 받아냈지만 순종은 옥새를 찍으려 하지 않았다. 황후 윤씨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놓지 않자, 시종원경(시종원의 수장) 윤덕영(황후의 외숙부)이 빼앗아 찍은 것이었다. 윤덕영은 이 공으로 ‘국적’에 이름을 올리고 매국의 상급을 받았다.
8월 4일부터 합병조약이 조인될 때까지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사이를 오가며 매국 공작을 꾸민 자는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었다. 신소설 <혈의 누>, <귀의 성>, <은세계> 등을 발표한 작가 이인직도 <친일인명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이날 오후 통감관저 2층의 데라우치 침실에서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이 체결된 뒤에도 일제가 이의 발표를 미룬 것은 우리 민족의 저항을 두려워하여서였다. 조약 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 나라를 넘겨줌)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이 제1조에서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고 규정하고 있는 이유다. 이로써 519년을 이어온 조선왕조는 국권을 완전히 잃고 역사에서 퇴장하게 된 것이다.
나라가 망한 뒤, 왕족과 매국의 은사를 받은 반역자들의 안락한 삶은 계속되었지만 백성들을 기다린 것은 가혹한 식민지배와 수탈의 세월이었다. 정작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 가운데 그것을 감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