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성욕은 ‘자연’ 그 자체다. 우주의 섭리, 고정불변의 진리, 결코 변치 않을 거대한 말씀과 같은 위상을 가진다. 성욕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남성의 성욕’이 가진 의미는 과하게 부풀려져 있으며 어떤 결과를 막론하고 성욕이라는 ‘동기’를 들이대면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반면 여성의 성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의미를 가진다. 세속화되지 못한 여성의 성욕은 신성화되거나 악마화되기 일쑤다.
여성의 성욕: 악마와의 결탁
FOX에서 방영된 제리 브룩하이머의 13부작 드라마 〈루시퍼〉는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악마가 주인공이다. 영국 배우 탐 엘리스가 바로 지옥에서 온 루시퍼 역할을 한다. 엘리스의 매력에 기댄 부분이 많고, 워낙 매력적인 악마가 등장하다 보니 악마인지 정의의 사도인지 가끔 망각한다. 그런 이유로 이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학부모들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악마가 매력이 없으면 악마가 될 수 있을까. 악마는 대체로 매력적이다.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의 덫을 던지니까 악마다. 루시퍼가 능글능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상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예외 없이 그에게 음흉한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여성과 남성이 이 악마를 대하는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다. 모든 여성이 루시퍼의 눈빛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성욕’을 느낀다. 극중 또 다른 주인공인 형사 클로에 데커(로렌 저먼)만이 예외다.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는 여성을 처음 본 루시퍼는 당황하여 “모든 여자들이 나를 보면 여자의 음습한 욕망을 고백하는데 너는 왜 안 그러냐”고 진지하게 묻는다. ‘여자의 음습한 욕망’, 곧 성욕은 악마와의 결탁을 상징한다.
여성의 ‘자연’: 모성
여성에게는 성욕이 아니라 모성이 ‘자연’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여성의 성욕은 터부시되지만 출산은 여성의 임무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여성은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남성의 성욕을 ‘받아주고’ 씨를 ‘받아서’ 기르고 낳는 ‘그릇’이 된다.
남성의 성욕과 여성의 모성을 ‘자연화’하면서 서로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향은 첨예하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여성의 성욕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구조는 단지 ‘성욕에 대한 불평등’ 차원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다. 성욕의 수동성은 여성의 감정을 남성에게 종속되게 만들고, 여성의 세계를 남성과의 사적 관계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선택되는’ 존재이며 성욕을 부추기는 성적 대상이지 성욕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기는 어렵다. 그 대신 가정에서의 역할이 여성의 우선순위 임무가 된다.
『사랑은 왜 아픈가』. 내가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다. 한숨 소리와 어쩐지 쓸쓸한 목소리가 섞여 있을 법한 에바 일루즈의 이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덜 쓸쓸하다. 나의 경우는 그랬다. 만약 내게 이 책의 부제를 정하라고 한다면 ‘여자의 사랑은 왜 더 아픈가’로 할 것이다. 책 내용에 적합하다.
더 아파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그러나 여성의 감정이 주체적이지 못하고 여성의 감정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에게 ‘남자와의 사랑’이 더 많은 의미를 부여받는다. 또한 억압과 구속조차도 ‘날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여성들 스스로 이해하도록 길러진다.
여성의 헌신적 사랑으로 남성을 구원하거나 ‘가장’에 대한 연민의 서사가 풍성한 사회에서 가장의 소유물인 아내와 자식은 남성 가장을 이해해야 하는 막연한 의무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남성 가장에 대한 돌봄과 보조자의 역할을 이행하지 않는 ‘결혼 밖의 여성’은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쉽게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다.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닌 ‘자유로워 보이는’ 여성은 가족에 봉사하지 않고 제 욕망에 충실한 이기적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 그 여성이 무슨 일을 하든 그의 사회적 성취는 종종 외면받는다. 결혼 안 한 여성들에게는 사회의 ‘어르신’들이 “여자가 아무리 제 일이 있어도 남편 밥 먹어야 행복하지”라는 말을 쉽게 하면서 여성들에게 남자에게 보호받는 삶(가부장제)의 환상을 심어준다. (본인들은 그랬나?)
나아가 ‘사랑의 결과물’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에 대한 여성의 감정은 남성보다 더 강하게 요구받는다. 일반적으로 자식살해를 두고 ‘친부’보다 ‘계모’에 대한 비난이 더 크다. 흔히 남자를 가장으로 부르지만 집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범죄를 포함하여) 대한 죄책감은 ‘엄마’에게 더 무겁게 주어진다. “도대체 하루 종일 집구석에서 뭘 하는 거야!” 흔한 대사다.
사회는 여성에게 사랑에 대한 낭만적 감정을 전파하지만 결혼 후에는 정작 ‘일과 사랑(가정)’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주문받는 입장도 여성이다. 혹은 ‘양립’하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의 성역할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바깥일’이 동시에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이 되는 남성에 비하면, 여성의 ‘바깥일’은 ‘가정에 소홀한’ 상태가 된다. 여전히 가정 내에서 전통적 성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에게 일과 사랑 사이의 관계는 좋지 못하다.
내 주변의 여성들은 서른 중반을 지나면서 대부분 직장을 그만뒀다. 그쯤 되면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버틸 수 있는 한계치에 다다른다. 첫 아이를 낳고 한 번 육아휴직을 했으니 둘째를 낳고 또 휴직하기 눈치 보여서 직장을 그만두거나, 이제는 더 이상 출산을 미룰 수 없어 출산 준비를 위해 전업주부를 선택하거나, 아예 결혼과 동시에 그만두거나, 남편의 해외근무 때문에 자신의 직장을 그만뒀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공통점은 좀 더 가정 내 역할에 충실해야 할 시기를 외면할 수 없는 압박 때문이다. 결국 서른 중반을 넘기고도 ‘사회’라는 곳에 남은 여성은 대부분 피로에 지쳐 다크써클이 늘어가는 ‘슈퍼우먼’과 티라노사우르스처럼 무는 힘이 세다는 ‘노처녀’다(황금독신여성이라고 해야 하나…).
언제나 변수가 되는 여성의 삶
자신이 밖에서 일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입장은 언제나 여성, 곧 엄마다. 반면에 아빠는 집 밖에서 일하는 역할이 당연하고 오히려 집 안에 있으면 제 구실 못하는 남자처럼 취급받는다. 또 집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는 남성들도 많다. 성역할의 분리는 이렇게 여러 가지 형태의 압박을 낳는다.
여성이 가정에 충실하길 원하지만 그 가정을 위한 노동이 제대로 평가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여성이 처한 분열적 현실이다. 전업주부의 어린이집 이용을 제한하는 정책에 다수의 사람들이(61.9%) 찬성한다. 많은 정책들이 남성을 가정으로 ‘진출’하게 하는 고민은 보이지 않고 여성의 삶을 늘 변수로 삼는다. ‘바깥일 하는’ 남성의 삶을 기준으로 여성의 삶을 요리조리 재단한다.
사회 문제는 결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게으른 사고방식이다. 정치세력화 되지 않으면 ‘저절로’ 바뀌는 문제는 거의 없다. 이코노미스트에서 조사한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OECD 국가 중 꼴찌였다.
원문: Women in Wri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