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로맨스 소설이 나타나는 요즘, 어떤 것을 읽어야 할지 고민인 이들에게 정은궐 작가의 <해를 품은 달>을 권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재미있으니까.
지금은 로맨스 시대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당당하게 한국 로맨스 소설이 자리 잡고 있는 시대다. 이북 시장 역시 로맨스 소설이 강세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웹 소설 사이트의 순위 목록 중 상위권을 로맨스 소설들이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의 내리자면, 지금이 바로 한국 로맨스 소설의 황금기라는 얘기다.
현재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 로맨스 소설이지만, 사실 국내에 로맨스 소설이 자리를 잡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PC 통신 시절부터 로맨스 소설을 쓰는 이들은 분명 존재했으나 본격적으로 이슈화 된 것은 1996년 ㈜신영미디어에서 제1회 한국 로맨스 소설 공모전을 열면서부터다.
이때 <노처녀 길들이기>라는 작품으로 박윤후 작가가 한국 로맨스 1호 작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이후 고영희, 김정선, 박영아, 이상원, 이선미 등과 같은 작가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이 2000년대 쯤이었다. 이후 로맨스 소설 시장은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는데, 모두 6권의 소설이 무려 1만 부 이상 판매됐다. 최근 국내소설의 전자책 시장으로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 역시 로맨스 소설이다.
고작 20년 만에 한국 로맨스 소설이 장르 문학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기존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톡톡 튀는 문체로 참신한 소재의 작품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중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작가가 바로 ‘정은궐’작가다.
성균관에 이어 해품달까지, 로맨스 소설의 전성기를 연 정은궐
2004년 <그녀의 맞선 보고서>를 시작으로 한국 로맨스 소설계에 발을 들인 정은궐 작가는 그 이후 2007년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들과 2009년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을 발표한 후 교보문고, 예스24, 인터파크, 알라딘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기록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종이책으로만 80만부가 판매된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이외에도 정은궐 작가의 다른 작품들까지 포함하면 누적 판매량은 200만부를 훌쩍 넘어선다. 중국과 일본에서 출판된 번역본도 큰 인기를 끌었으니, 이 정도면 가히 21세기 로맨스소설, 아니 한국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정은궐 작가가 인기를 끈 이유는 탄탄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치밀하면서도 매력 있는 스토리 구성을 선보이기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정은궐 작가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2005년 선보인 <해를 품은 달>이다. 정은궐 작가 특유의 역사 로맨스 소설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해를 품은 달>은 조선 시대 가상의 왕과 액받이 무녀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2012년 김수현, 한가인 주연의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드라마 방영 당시 전국 시청률 40%를 돌파하며 국내는 물론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까지 소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보다 더 뛰어난 원작 소설 <해를 품은 달>
이처럼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원작 소설 <해를 품은 달>의 탄탄한 스토리와 높은 흡입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드라마가 원작 소설의 매력을 다 담아내지 못해 아쉬움이 남을 정도다.
남자 주인공이자 조선 시대의 가상의 왕 ‘이훤’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여인 ‘연우’를 잊지 못하다가 자신의 액받이 무녀로 들어온 ‘월’을 보고 ‘연우’를 떠올린다는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는 같지만 20회 안에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드라마 장르 특성상 섬세한 묘사가 어려워 사건의 시작점과 인물 설정을 달리하고 스토리에 약간의 변화를 줘 드라마는 소설과는 무척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드라마 속에서는 여주인공인 연우가 오빠인 염이 장원급제해 입궐을 한 날 함께 궁에 갔다가 세자 훤을 우연히 마주쳐 그것을 인연으로 두 사람이 정을 쌓아가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고 그저 서찰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간다. 훤이 연우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8년 후 액받이 무녀 ‘월’로 궁에 입궐한 연우를 훤이 알아보는 데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런 훤을 지켜만 봐야 하는 월, 즉 연우의 심정이 더 애달프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드라마 상에서는 훤이 이미 연우의 얼굴을 알기 때문에 액받이 무녀 ‘월’을 보고 바로 연우를 떠올리며 혼란스러워하며, 극적인 요소를 부여하기 위해 연우가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을 더했다. 문제는 이러한 추가적인 설정 때문에 원작에 나오는 인물 간의 섬세한 심리 묘사를 제쳐두고 연우의 기억 찾기에 초점을 둬 극의 개연성이 떨어졌다는 것.
또한 원작 내에서 훤보다 빨리 연우의 정체를 의심하며 남몰래 연우를 좋아하기도 해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던 호위무사 운의 비중을 크게 줄인 대신, 연우를 좋아하는 역할로 이훤의 형인 양명군을 내세우는 한편 한평생 훤을 바라보는 왕후의 비중을 키워 전형적인 드라마 요소인 삼각관계를 나타내 극 전체가 조금 식상해진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게다가 생방송과 다름없는 촬영 일정과 방영 당시 방송사 파업으로 인한 불안한 제작 여건 등의 문제로 중요한 장면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드라마가 급하게 마무리 되는 모습을 보여줘 더욱 아쉬움이 크다.
소설과 드라마라는 장르 특성상 소설 속 이야기를 드라마에 모두 담아내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유독 <해를 품은 달>이 아쉬운 이유는 <해를 품은 달>의 진짜 매력이 각 인물의 섬세한 묘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양이자 왕을 뜻하는 훤, 달을 뜻하는 월, 구름을 뜻하는 운과 밝은 햇볕을 뜻하는 양명 등 등장인물의 모든 이름에 등장인물이 특징에 맞는 저마다의 뜻이 숨어 있는 것은 물론,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세세하게 표현되는 심리적인 변화와 인물들끼리 얽히고 얽힌 관계들을 정은궐 작가는 특유의 문체로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해 냈다.
한국 로맨스 소설을 이끈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인 정은궐 작가의 대표작이자, 20회라는 짧은 드라마 호흡으로는 차마 다 담아내지 못했던 <해를 품은 달>의 진짜 매력은 비로소 책을 읽은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